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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끝을 향하여..
백작 정도되는 귀족이면, 왕성에도 전용의 휴게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자신의 휴게실에 도착한 백작은 자리에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는 딸을 돌아보았다. 자기보다 아내의 얼굴을 더 닮은 딸을 바라보던 백작은, 결연한 얼굴로 딸이 자리에 않자. 약간의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말했다.
" 그래, 무슨 일이냐. "
" 아버님. "
" 왜 그러느냐. "
" 아버님은...........여왕폐하를 진심으로 섬기고 계신 겁니까? "
백작은 딸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졌다. 딸의 질문은, 그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
" 대답해 주십시오. "
반드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담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 글쎄다. 어떤 대답을 원하느냐. "
" 아버님...................... "
" 패배감을 느꼈다. "
" 네? "
" 이 아비는, 이 아비가 믿고 따르던 라인버거 공작은, 단순히 이 임펠리아라는 나라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녀는, 여왕은 그릇의 크기가 다르더구나. 그녀는 이 임펠리아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 임펠리아를 넘어서 대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알았을 때, 느낀 패배감이 얼마나 큰 건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릇의 크기가 그렇게 달랐으니, 이길 리가 없었지. "
그녀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그릇의 크기를 실감했다. 반역자인 자신에게 여왕의 힘 중 하나인 아라크네를 맡기고, 그를 신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그를 의심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한숨만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레미엘은 자신의 아버지의 얼굴을 긴장한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백작은 딸의 시선을 느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은..................... 지금은 어떠한가. 고민해도 소용없다. 결과는 나와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쉰 백작은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 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 여왕페하는 상당히..................모실만한 상관인 것 같다. "
레미엘은 아버지의 대답에 활짝 웃었다.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모를 딸의 미소를 본 백작도 같이 웃었다.
두개 십부당 마차 한대. 임펠리아군의 이동의 기본이었다. 8만의 군대가 4천대의 마차에 타고 달려가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마차를 사용함으로써 임펠리아는 병사들의 피로를 줄이고 획기적이라고 할수 있을정도의 이동속도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 이 정도 속력이라면 밤새도록 달려도 좋을 것 같군. "
선두에서 말을 몰던 영운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이동중의 마차의 흔들거림에 익숙해진 몇몇 병사들은 느긋하게 자기 무기를 껴안고 졸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말을 달리던 군단장중 하나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 병사들중에는 아직 마차에 익숙해지지 않은 녀석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좀 살펴주시지요. "
웃으면서 꺼낸 이야기지만 상당히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다. 병사들의 상당수가 겪고 있는 문제였다. 대부분이 노예출신인 그들이 언제 마차를 타보았겠는가. 게다가 멀미는 고친다고 고쳐지는 병이 아니다. 몇몇 병사들은 멀미가 심해서 탈수증세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영운도 머리를 싸쥐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몇가지 예방책을 제시했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 그렇군. 진군을 정지하고, 주둔지를 만든다. 인원점검 하는 것 잊지 말도록. "
" 알겠습니다! "
울려퍼진 정지나팔소리에 달리던 마차들이 정지한다. 병사들은 마차에서 내리면서 마차에 비치된 천막을 치는데 필요한 도구들을 들어다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별히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마차에 탄 두개 십부중 하나가 막사를 치고, 나머지 하나의 십부가 외각경계를 담당했다. 진군하는 군대의 제일 끝에서 따라오던 취사반은 바삐 움직이며 조리도구를 내려놓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군단장들은 곧이어 들어올 부하들의 보고를 듣기위해 자신들의 막사 쪽으로 향했다. 영운은 바삐 움직이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병사들이 움직이는 진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지만 영운은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떨어졌다고 생각되자 영운은 말에서 내렸다. 그의 손엔 어느새 달빛을 받아서 취할 것 같은 은빛을 뿌리고 있는 은성이 들려있었다.
" 오랜만이군. 이걸 해보는 것도. "
은성을 눈앞에 세우고 눈을 감은 영운의 몸에서 천천히 황금빛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천천히 뭉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황금빛의 기운이 응집되어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영운, 그 자신이었다.
- 멸신무투. 원영신.
눈앞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그 자신. 눈앞의 그는, 황금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창을 들어 영운을 겨누었다. 영운역시 은성을 들어 분신을 겨누었다. 투기.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점점 평원에 퍼져나갔다.
" 간다. "
영운의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은성이 한줄기 섬광이 되었다.
격렬한 싸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복사한 분신이기에 그와 창을 휘두르며 겨루는 그 모습은, 거울과 겨루는 것처럼 보였다. 창을 내찌르는 괘도. 회피하는 방법. 똑같았다.
' 진화하라고 했던가? '
원영신의 분신은 기본적으로 시전자의 능력을 그대로 복사한다. 그러므로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시전자의 능력의 발전이 요구된다. 하지만 영운정도의 실력이면은, 그 실력의 발전이란 것이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무언가의 계기가 필요했다.
' 더 강해지고 싶은가? 고독해지고 싶은가? '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영운은 거대한 해머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잊어버리고 싶었던. 잊었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들. 그들을 살해하는 광기에 찬 자신의 모습.
- 찌익!!
과연, 똑같은 실력을 지닌 분신의 앞에서 한 순간이나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로 이어졌다. 간신히 상체를 젖혀서 피했지만, 자세가 흐트러져 연신 공격을 당하면서 밀리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 살려줘!! '
' 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
사람들이었다. 추잡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 그들은 자신을 반기지 않았다. 그저 크리터들의 이빨과 그들이 주는 죽음의 향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식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맞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힘이 필요 없게 된 순간. 자신을 제거하려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제거된 것은 그들이었다.
' 크아악! '
절규하는 그들의 얼굴위로 은성이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틀어박혔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환상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 몇 번이고 죽여주겠다. 얼마든지 말이다. "
영운은 은성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은성이 망설임 없이 휘둘러질 때마다 절규하는 환영들이 사라져간다. 그의 몸에 배인 멸신무투의 초식들이 하나하나 풀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베고 찌른다. 후려치고 비틀어서 베어버리고. 위로 쳐올려 내려친다. 찌르고 비틀어서 도려내고. 창을 돌려 날려버린다.
환영의 정체는 원영신에 딸려 나온 그의 약한 마음들.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기억들이 그의 움직임에 하나하나 부셔져 갔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얼마나 환영을 산대로 창무(槍舞)를 펼쳤을까, 어느 순간, 갑자기 눈앞에서 날뛰던 환영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주위의 정보가 범람하듯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딱 한번 있다. 비제타 챠크라. 육신의 불사성을 획득하게 만드는 챠크라를 열었을 때, 그는 육체가 뇌에 전달하는 모든 정보를 통괄할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힘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는 지금 이 정보들을 관조(觀眺)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제니아 챠크라가................열린 건가? "
비제타 챠크라가 육신의 불사성을 획득하게 만드는 챠크라라면 이제니아 챠크라는 진실을 꿰뚫는 심안의 챠크라. 영운은 밀려오는 정보를 통제하며 커다랗게 숨을 들이켰다.
" 기분..............괜찮은걸. "
영운은 무인이다. 무인에게 있어서,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쁜 일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