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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제국-68화 (6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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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끝을 향하여..

이제는 죽음의 대지가 되어버린 땅위에 서있는 철옹성. 라클코니움 요새. 이미 십여만의 사람의 피를 집어삼킨. 요물이었다. 전쟁이 벌어진 땅에는 원한이 깃든다. 그 땅은 점점 죽어가게 되고, 그 죽은 땅에선 원한을 가지도 살아있는 것을 증오 하는 자들이 일어난다. 언데드다. 그래서 전쟁에는 항상 자비와 대지의 여신의 신관들이 동행한다. 그들은 대지에 깃든 원한을 정화하고 그곳에 매인 사령들을 승천시킨다. 그럼으로써 죽은 자들을 구원하고 죽어가는 대지를 구원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심각했다. 악에 받쳤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자군의 시신 수습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성벽으로 다가가면 어김없이 화살비를 퍼부었다. 사실 성벽위에서 수비한 삼국연합군의 시신이 성벽바깥에 있을 리가 없으니. 있는 것은 제국군 시신뿐이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같이 싸우던 동료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제국군 병사들은 이를 갈았다.

병사들의 의분이 넘치고 악이 받쳐서 전력이 상승되는 것은 좋으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라기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대지의 오염농도는 위험한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한번의 싸움이 더 일어난다면, 저기에 누워있는 죽은 자들이 모조리 일어설지도 모른다고 종군사제들이 충고했다. 부패한 제국 내부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많이 속세 물을 먹었다지만, 능력은 믿을만했기에 라기스트는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라기스트는, 갑자기 진지가 시끄러워진 것을 눈치채고는 분개하며 막사를 나섰다.

" 무슨일이냐!! "

" 사, 사령관 각하! 저길!! "

부하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는 곳엔 눈뜨고도 믿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곳엔 길이 생겼다. 이미 죽음의 전장을 살아서 넘어온 병사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내뿜는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무의식중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죽음. 병사들 대부분이 그들에게서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 맙소사!! "

자신을 향해 곧바로 다가오는 그들이 입은 검은 갑옷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을 본 라기스트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히드라! 그것은 제국내에서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문장이었다.

' 그들이다! '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래서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에 라기스트는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정해도 소용없다. 산 증거가 눈앞에 있잖은가.

그들에게서 전해지는 기세가 라기스트를 압박했다. 마나를 다루어 검기를 만들 수 있는 익스퍼트인 라기스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스터! 저 천여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전부 마스터다!!

" 황제의 적은 어디인가. "

" ................ "

눈앞의 기사가 물었지만 기세에 짓눌린 라기스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 만해도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 황제의 적은 어디인가!! "

- 황제의 적은 어디인가!

이번에는 1000명의 기사가 모두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외침에 전장이 울었다. 라기스트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라, 라클코니움 요새.......... "

그 말을 들은 기사는 고개를 돌려서 멀리보이는 철옹성을 바라보았다. 요새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적의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 황제의 적을 멸하라!! "

- 황제폐하를 위하여!!

그들이 발을 내밀 때마다 길이 생기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죽음의 사신들이 걸었다. 어찌보면 라기스트의 서로군정서 병사들은 행운아였다. 그들은 지금부터. 그들 평생에 볼 수 없는 살육의 광경을 구경하게 될 테니까.

성벽을 지키던 삼국연합의 병사는, 핏발이 서서 벌게진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혹시라도 다가올지 모르는, 제국군을 찾고 있었다. 애초에 제국군이 다가오면 보고없이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살기위해 필사적이 되어버린 삼국연합의 병사들은 보이는 족족 화살을 날려서 제국군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분위기부터 틀렸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 빛조차 반사하지 않는 검은 갑옷. 손에 들은 검은 검. 그들이 1000여명. 천천히 대형을 갖추며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어, 어이 어떡하지? "

" 어쩌긴 비상종 울리고 장군님들께 알려. "

성벽위의 병사들은 침을 삼키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안한 느낌. 그들은 이때까지 잘 피해온 죽음의 사신의 낫질을 이번에는 피해갈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현재 삼국연합의 공식적인 사령관은 마커스의 루넨이다. 그 루넨은, 물러날 기색이 없는 제국군을 막아내고, 삼국연합과 제국의 국경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지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기위해 수십 가지 전략을 검토하다 방금에서야 숙소에 들 수 있었다. 지난번 전투와 같은 공성전이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버틸 수 없다는 걸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 땡땡땡땡땡!!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지만 성벽위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검을 움켜쥐었다. 방문을 박차고 나가서 뛰어다니는 병사들을 붙잡았다.

" 무슨일이냐!! "

" 적들의 공격이랍니다! "

" 뭐? "

" 제국군과 마주한 성벽 쪽에서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저도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하고 장군님들에게 알리러 가던 중입니다! "

" 알았다. 모든 장군들을 깨워 성벽으로 모이게 해라! 서둘러! "

" 알겠습니다!! "

" 아, 케인경을 깨워 마법병단을 준비하도록 해라!! 잊지마라!! "

" 넵! "

황급히 달려가는 병사를 바라보던 루넨은 이를 악물고는 성벽을 향해 뛰었다.

성벽위에서 간간히 화살들이 날라 왔지만 이미 인간을 초월한 그들에게 소용 있는 공격은 아니었다. 일일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력으로 검을 휘둘러 화살의 촉만 베어내면서, 천천히 요새로 다가가고 있었다.

" 복용한다. "

선두의 기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들은 바삐 검을 놀리는 와중에도 남은 손을 움직여서 허리의 백팩에서 병을 꺼내들었다. 전에 달리던 와중에 먹은 약이랑은 효능이 틀린 것 같았다. 전의 약물은 붉은 색 이었지만 이번엔 검었다. 한 치의 주저 없이 그걸 마셔버린 그들. 변화는 그들의 몸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에서 나타났다. 점점 그들의 눈이 검게 물들고 있었다. 검은 투구로 가려 어두운 중에서 그들이 인간임을 알 수 있게 하던 눈빛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 투구속의 어둠과 동화되었다. 데스 나이트. 죽음의 기사들. 그들을 바라보는 피아를 가리지 않은 모든 병사들이 한 생각이었다.

" 시작한다. "

말이 끝나자. 선두에 서있던 기사들이 검을 요새에 성문에 겨누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검에 머물기 시작하는 마나! 마나를 느끼는 자라면 느낄수 있으리라. 그들의 검에서 일렁이는 마나의 위력을!!

- 우우웅~~ 묵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오러 블레이드가 만들어지고,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서 그 오러 블레이드를 성문을 향해 쏘아 보냈다. 라클코니움의 성문은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것도 모자라 그 사이에 철판을 끼어 넣은. 보통의 충격으론 jf대 부서지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요새를 만든 사람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수십 줄기의 오러 블레이드가 날아와, 성문을 그대로 후려갈길 것이라곤!!

- 쿠콰앙!!

천지를 뒤집는 소리가 나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흙먼지가 걷히고 완전히 산산조각난 성문을 바라본 삼국연합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다. 오러 블레이드.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전장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무려 1000명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직감했다.

성벽위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루넨도, 그들이 전원 마스터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기사의 나라라는 마커스도 5명의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을 뿐인데. 제국이, 저런 숫자의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성문이 뚫리고 그들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리고는 공포에 절은 주위의 병사들을 향해 호령했다.

" 뭐하느냐! 화살을 쏘아라! 저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해!! "

거의 비명이라고 말해도 좋을 외침이었다. 병사들은 그의 외침을 듣고서는 발악적으로 화를 당기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주위의 병사들의 창을 뺏어들고 그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 루넨경! "

" 케인! 어서 마법병단의 모든 화력을 저자들에게 집중하시오!! "

" 무, 무슨? "

" 어서! 저들...............저들이야 말로 제국의 진정한 힘이오! "

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인 후. 늘어선 마법병단에게 다가가 뭐라 명령을 내린 후에, 스스로도 그들에게 합류하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랜디오르 기사단! 성문으로 간다!! "

마스터인 그의 외침은 요새를 울렸다. 그의 말에 따라 마커스가 자랑하는 랜디오르 기사단은 그들의 무기를 굳게 잡고는 성문으로 향했다.

" 인정은 필요 없다. 자비도 필요 없다. 죽음 많이 있을 뿐!! "

- 멸망을! 공포를!! 죽음을!!!

황제의 적에 대한 가장 확실한 제재를. 그들의 발걸음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요새로 다가오는 걸 바라보는 삼국연합의 병사들은 필사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활을 들어서 쏘고, 겁에 질린 몇몇 병사들은 자신의 검마저 집어던지고 있었다.

" 쏴라!! "

케인의 외침과 함께 수백발의 화염마법이 날았다. 확실히 이것은 마스터라고 해도 위협이 되는 공격. 그들은 검을 뽑아들고 허공의,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휘둘렀다. 1000명이 일제히 발출한 오러 블레이드가 서로 얽히고 얽혀서 그물망을 형성하여 그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마법모두 마나를 사용하는 공격이다. 마나를 사용하는 공격이 맞부딪칠 때 그 승부를 결정하는 건 그 공격에 밀집된 마나의 농도가 결정한다. 그렇다면 검기의 결정체인 오러 블레이드를, 3써클의 마법이 이겨낼 리 없지 않은가.

- 콰콰콰앙!!

엄청난 폭음이 울렸지만 모조리 허공에서 요격당한 마법들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 마법을 쏘아 보낸 마법사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마스터의 힘인가. 인간을 초월한 자의 힘인가!

" 돌입한다. "

성벽위의 마법병단을 슬쩍 바라본 기사는, 나직이 말했다, 폭음이 울리는 와중에도 그의 말은 전장에 울렸다. 그들은, 열린 요새의 성문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꿀꺽!!

기사단의 누군가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랜디오르 기사단. 마커스의 최고 기사단이라는 명색에 걸맞지 않게 그들은 굳어진 얼굴로 성문을 통해 들어오는 1000명의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검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로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들.

화살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 상대. 그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검에서 폭발하듯 솟아오르는 오러 블레이드!!

" 죽여라! "

기사들이 뛰었다. 그리고 피의 바람이 불었다.

마스터는 인간한계를 초월한 사기적인 존재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오러 블레이드는 세상에 못 자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예리한 물건이다. 검이든 마법이든 마스터를 상대할수 있는 자는 마스터뿐이다.

" 살려줘!! "

" 으아악!! "

성벽위의 병사들을 몽아치는 10명의 기사들. 그들이 뿜어내는 오러 블레이드는 살기위해 도망가고 있는 병사들을 도륙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치명타를 주지 못해 꿈틀거리고 있는 병사들을. 검을 그들의 가슴에 꽂아 넣어 확실한 죽음을 선사한다. 저항하는 자도 있다. 궁지에 몰리면 위도 고양이를 문다고, 쫒기는 공포에 이기지 못한 병사들이 그들에게 무기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건 드래곤을 향해 덤벼드는 오크와도 같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 촤학!

휘둘러진 오러 블레이드는 그들을 해체시켜 버렸다. 사방으로 날아가는 인간의 팔다리와, 부숴진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뇌수와 피가 섞여서 요새는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의 기사들은 서문을 점령했다. 그것은 삼국연합군이 도망갈 마지막 탈출구를 봉쇄하는 행위다. 서문을 향하는 삼국연합군을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베어 넘기고, 살아남은 자들은 확실한 죽음을 안겨주었다.

1000명의 기사들이 흩어져서 병사들을 도륙하고, 랜디오르 기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남은 것은 100명의 흑기사들. 이제 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황제의 기사들. 히드라의 맹독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맹독들. 그들은 검을 랜디오르 기사단을 향해 겨누었다.

" 죽여라. "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랜디오르 기사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을 굳게 쥐고 이를 악물면서 그들을 향해 달렸다. 그들이 믿는 건 수적인 우위뿐!! 그들의 선두에는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면서 달리는 루넨이 있었다.

" 우와아아아아!! "

누가 시작한건지 모를 고함을 지르며 랜디오르 기사단은 전원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돌격했다. 흑기사들은 자신들의 검을 휘두르며 그들과 맞섰다.

요새는 공포와 광기에 물들어 가고 있다. 삼국연합의 병사들은 공포에 물들고 있고, 흑기사들은 광기에 물들었다. 저항하지 않는 병사들일지라도 오러 블레이드를 날려 수십토막을 내버리고, 우연히 부상병들의 병동에 들어간 기사는 보이지 않는. 하지만 느낄수 있는 미소를 짓더니.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는 그들을 살육했다.

피할 길은 없었다. 누라가 자랑하는 마법병단도, 마커스의 랜디오르 기사단도. 그들의 힘 앞에 압도적으로 살해되어 바닥에 드러누울 뿐. 그들은 더 이상 산 자가 아니었다. 죽은 자의 요새. 그랬다. 제국의 자랑. 라클코니움 요새는 죽은 자의 요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요새를 울리던 비명소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 끝인가................ "

루넨은 허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자는 없었다. 죽은 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을 휘두르며 같이 싸우던 부하들은. 이미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적 다섯을 베어 넘기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검에 의지해 간신히 서 있었으니까. 거의 죽을 정도의 상처들. 그는 흐릿해져가는 의식을 겨우 붙잡았다.

그들이 다가왔다. 요새 안에서 숨쉬던 8만여의 병사들의 숨을 거둔 사신들이 흐릿해져가는 시야에 그의 앞에 늘어선 흑기사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는 것이 보였다.

" 그, 그건!! "

누라의 케인과 소니아의 브록. 동료들의 목이었다. 그의 시선에 흑기사들은 들고 있던 목을 그의 앞에 던졌다. 그는 바로 앞까지 굴러온 목을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죽은건가? 모조리? "

" 황제 폐하의 적에겐 죽음을. "

기사들 중 하나가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루넨은 비틀거리면서 검을 들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기사로써, 무릎을 꿇고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흑기사가 달렸다. 루넨은 억지로 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들었다.

- 차캉!

검과 검이 지나가고, 그들이 엇갈렸다. 잠시간. 움직임은 없었다. 그들도, 주위를 둘러싼 흑기사들도. 움직임을 보인 건 흑기사였다. 천천히.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바로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루넨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는 흑기사의 왼팔이. 보이지 않았다.

" ....................... "

루넨은 죽어있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생명을 짜내어 공격한 것이다. 그 대가는 흑기사의 왼팔. 싼 대가는 아니었지만 비싼 대가도 아니었다. 오른팔만 남은 흑기사는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려고 하지도 않고, 검을 치켜들었다.

" 황제폐하의 적에겐 죽음뿐. "

- 촤아!

중얼거리며 휘두른 검이, 죽어있는 루넨의 목을 잘랐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피. 그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라클코니움 요새.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자들은 모두 죽었다. 말살시켰다. 그들의 말대로.

라기스트는 요새 안으로 들어오면서 주위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돌려야만 했다. 정망하는 얼굴들. 어느 병사는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죽어있었다. 눈에 비친 광경에는 사지가 모조리 절단되고, 그 고통에 한참을 꿈틀거린 모양이었다. 그 병사의 얼굴은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요새 안에 늘어져 있는 시체 중 그 무엇도, 사지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시체가 없었다. 그리고, 요새의 중앙에 그들이 있었다. 라기스트가 다가가자, 그들은 손에 쥐고 있던 머리들을 던졌다.

- 툭! 데구르르르 그의 앞으로 굴러오는 머리들. 라기스트는 그 중 하나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놀란 얼굴로 외쳤다.

" 루, 루넨? "

위대한 경지 마스터에 오른 자의 목이라니. 라기스트는 약간 분노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비록 적으로 싸우는 사이였다지만, 기사에 대한 예의도 모른단 말인가. 인간을 초월하여. 위대한 경지에 오른 자들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가!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이 부수고 들어왔던 성문으로 향했다. 그가 분노에 찬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든, 그들을 증오하든. 그들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황제의 적을 멸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달성되었다. 그것 이외엔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없었다.

" 종군 사제들에게 명해 작업을 시작하라 이르고, 시체 수습에 들어간다. 어서 서둘러!! "

라기스트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서있는 주위의 부하들에게 외쳤다. 부하들은 그의 외침에 몸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령관님. 이것들은 어찌............... "

부관이 가리키는 건 흑기사들이 던진, 삼국연합의 지휘관들의 목이었다. 라기스트는 조용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 잘 수습하여.................. 연합으로 보내라. "

" 알겠습니다. "

라기스트는 바삐 움직이는 주위의 부하들을 바라보다가 우중충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 우리의..................승리다. "

하지만 그건 참 씁쓸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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