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년제국-72화 (7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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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끝을 향하여..

제국의 동부전선엔 아직 서로군정서의 라클코니움 요새의 탈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가끔가다 일어나는 소규모의 국지전을 제외하면, 전투다운 전투는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아. 전장의 분위기는 평화스럽기까지 했다. 동로군정서의 사령관, 바티스타는 부하들의 의견을 잘 수렴하고, 물러설 때와 공격할 때를 잘 구분하는 장수지만, 근본은 돌진하는 전군의 최전방에 서서 대검을 휘두르며 적을 몰아치는, 공격형의 장수. 당연히 가끔가다 벌어지는 국지전은, 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단 소리다. 그가 자신을 잘 다스리고, 곁에 냉철함, 그 자체인 부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전군을 휘몰아 신성제국군과 결전을 벌였으리라. 사실 라니움이 노리는 것도 바티스타가 분기탱천하여 뛰쳐나오기를 기다린 것이지만, 의외로 바티스타는 그의 함정에 넘어오지 않았다.

" 여간내기가 아니군. 확실하지 않으면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

" 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이빨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강할 겁니다. "

라니움은 고개를 끄떡였다. 글로비의 말대로, 지금은 웅크리고 있지만,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티스타의 공격은 날카로운 창처럼 자신들을 찌르고 들어올 것이다. 결국 공성전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다. 라니움은 얼굴을 찡그리며 글로비에게 물었다.

" 저 외곽의 요새에 얼마의 병력을 할당하면 될까? "

" 후우............... 성은 가장 기본적인, 나무와 훍을 사용한 토성입니다만...........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5만정도의 주둔군이 있습니다. 아마 최소한으로 잡아도 6만 이상. 최대로 8만 가량의 군대를 보내야 합니다. "

기본적으로 공성전을 하기 위해서는 주둔군의 5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 레가르탄 요새의 주둔군은 9만정도. 현재 신성제국의 병력이 23만으로, 약간 무리한다면 병력의 피해를 감수하고 요새를 점령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요새를 견제하기위해 병력을, 그것도 6만에서 8만사이의 병력을 쪼갠다면, 요새 점령은 꿈도 못 꾼다. 요새간의 위치가 실로 절묘한 것이 둘 중 하나를 노린다면, 필연적으로 옆구리를 남은 하나의 요새에게 드러내게 되는 위치였다. 전쟁에서 뒤를 내주는 것만큼 싫은 일이 없다지만, 옆구리를 내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렇게 요새 앞에 버티고 않아서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국의 농민병이 얼마 안 있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나마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병력 수에서도 뒤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라니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 막막하군. 막막해........... "

정말 방법이 없었다.

- 쾅!

바티스타는 제국의 수도. 영광의 홀로부터 날라 온 소식에 책상을 있는 힘껏 내리치며 외쳤다. 어떤 소식이기에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일까.

" 진정하십시오.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

냉정 그 자체인 로너의 말에 바티스타는 이성을 되찾고는 자리에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로너도 기뻐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소식이 길래 그들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일까? 장문의 글은 아니었다. 짤막한, 단 두 문장의 글이 적혀있을 뿐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따로 있을까.

- 라클코니움 요새 탈환. 삼국연합군 전멸 거두절미 하고 자세한 내막은 모조리 삭제해버린 결과만이 나와 있는 내용이었지만, 바티스타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바티스타는 로너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 퇴각하겠지? "

" 물론입니다. 뭐 더 얻어먹을게 있다고 붙어 있겠습니까? "

" 추적해야겠지? "

" 주인 된 입장으로 배웅은 해야지요. "

로너의 말에 바티스타는 고개를 끄떡였다. 당연한 일이다. 바티스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병력은? "

" 전 병력을 동원해도 될 겁니다. 이미 요새의 후방에서 농민병 30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요새의 수비를 맡기면 될 겁니다. "

" 좋아. 전 요새의 장병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 전투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갑옷과 무기를 몸에서 떨어트리지 말 것. 이것은 잘 때도 적용되는 명령이다. "

" 알겠습니다. "

바티스타는 벽으로 다가가 벽에 기대어져 있는 자신의 대검을 집어 들었다.

" 길었던 전쟁의 끝이다. "

바티스타의 말에 로너도 찬성의 의미로 고개를 끄떡였다. 전쟁은 끝이 날거고, 그리고 제국은 또 하나의 승리를 역사에 추가할 것이다.

이 소식은 신성제국에도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 이 소식이 가져오는 충격은, 제국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제국은 강하다. 혼자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기에, 신성제국과 삼국연합. 제국의 동, 서를 차지하고 있는 두 강국이 손을 잡아 동시에 침공한 것이다. 제국이 강하다고 하나 각각 20만이 넘는 대병의 침공. 한곳으로 몰려온다면 모를까. 좌우로 나누어서 쳐들어오니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제국의 모든 힘이 동부전선에 투입될 것이다. 라니움은 굳은 얼굴로 대기중인 글로비를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 글로비, 군단장들을 모두 소집하라. "

" 알겠습니다. "

글로비는 군단장들을 부르기 위해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막사에 남은 라니움은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 병사들의 목숨을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다. 이들 하나하나의 목숨은 나라의 힘이다. 신성제국의 힘. 그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이들을 본국까지 살려 보내야 한다.

' 퇴각이다. '

철수는 시간이 없다. 지금와서 진영의 물건들을 챙기자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이동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건 모조리 버리고 간다. 그리고 최대한 급속퇴각으로 국경을 향하는 거다.

' 하지만 보내줄 것인가? '

보통 이상의 장수라면, 자신이 퇴각할 생각이라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을 하면서 겪은 바티스타란 장수는, 그 정도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장수였고, 자신에게 들어온 그 소식이 제국군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 바티스타는 신성제국군의 진영을 유심히 살피고 있을 것이다.

" 사령관님. 모두 모였습니다. "

막사 밖에서 글로비의 목소리가 들리자, 라니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문득 눈에 들어온, 막사 한곳에 고이 모셔둔 성물(聖物))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야 말로 당신이 힘을 발휘해야할 시간이다. 우리에게 축복을. 라니움은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밖으로 나섰다.

작전회의용으로 사용되는, 다른 막사보다 두 배는 더 큰 막사 안에는, 암울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라니움은 상부에서 날아온 소식을 숨김없이 군단장들에게 공개했고, 그 사실을 들은 군단장들은 암울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 .....................해서 이제부터는 절대적으로 내 명령에 따라주시길 바라오, 지금부터 설명하는 계획은 한 치의 빈틈없이 실행되어야 하오. "

" 알겠습니다. "

군단장들은 그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떡였다. 라니움은 탁자위에 펼쳐져 있는 군사용 지도의 곳곳을 짚으면서 군단장들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낮의 하늘을 태우던 태양이 사라지고, 달이 하늘에 떠올랐다. 요새에서는 횃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횃불아래 제국군 병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신성제국군의 진형을 노려보았다. 이미 상부로부터, 신성제국군진영에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경우, 지체하지 말고 알릴 것이며, 알리는 사람에겐 상당양의 보상을 약속하여 병사들의 의욕을 재촉했다. 하지만 병사들이 볼 수 있는 시야보다 가까운 곳을 비치는 횃불 빛에 의지해 보기에는 신성제국군의 진영은 너무나도 멀었다. 물론, 신성제국군의 진영에서도 횃불을 피워놓고 있지만, 멀리서 본다면, 횃불 빛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도 사람으로 보인다. 특별히 눈이 비정상적으로 좋은 병사들이 아닌 이상은, 신성제국군의 진영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모닥불이 만들어낸 그림자와, 밤이 깔아놓은 어듬의 그림자를 타고 신성제국군이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릴 것은 다 버리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가장 기본적인 군장차림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23만이나 되는 병력이 하룻밤 만에 빠질 수 있을 리가 없다. 장비를 모조리 유기하면 이동속력이 가장 빠른 치중대 10군단과 공병대 11군단. 그리고 그들의 후위를 지킬 6군단 병력이 이동했다. 이미 병사들에게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도의 식량이 지급되었고, 남은 식량은 모조리 요리되어, 저녁에 신성제국의 병사들에게 지급,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다시없을 정도로 호화판의 식사를 했다. 물론, 이후는 퇴각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건량과 물만으로 때워야 하지만,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르는 전장에서 당장의 즐거움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없었다.

" 후퇴를 시작 했습니다. "

글로비의 보고에 라니움은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일생일대의 후퇴작전이 될 것이다. 그가 지시한 사항을 군단장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지켜준다면, 대륙역사에 남을 후퇴작전이 될지도 모른다.

" 남은 공성병기들을 정확히 아침을 먹을 시간에 파기. 불태우도록. 점심, 저녁시간에 맞춰서 작업을 하라. "

" 알겠습니다. "

그들이 후퇴하는 것은 좋으나, 두고 가는 공성병기들은 모조리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 본국을 향해 사용될 수도 있는 물건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파기할 수 있는 건 모조리 파기하라는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은밀하게 공성병기를 두들겨 부숴 땔깜으로 만들고 있었다.

" 내일이라도 당장 공격에 나설 것 같아 두렵습니다. "

" 저들은 병력이 나누어져 있고, 우리들은 뭉쳐있다. 저들이 요새 문을 열고 나오면, 우리는 그들 중 하나만 격파하면 그만이다. "

전통적인 제국의 수성전술은 병력을 분단시켜 자칫하면 각기격파로 함락당할 위협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함부로 병력을 나누었다가 요새를 잃은 서로군정서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바티스타는 그 분단된 병력이 머무를 최소한의 방어력을 갖춘 요새를 만들어 병력을 주둔시켰기에 서로군정서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 혹시 요새에서 병력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병사들에게 긴장을 풀지말라 이르고 교대로 잠을 청하도록 지시하라. "

" 알겠습니다. "

글로비가 나가고 나서, 라니움은 막사 안에 비치되어있는 자신이 팔라딘으로써 인증 받을 때 받았던 성물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는 성물을 바라보던 라니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힘을 발휘할 때다. "

그러니 우리들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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