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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끝을 향하여..
그 때 임펠리아에서는 때 아닌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라인버거 공작가의 '밀고'로 반역자들의 명단이 접수되고, 그 중에 아라크네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레미엘과 프레일은 그때까지 꾸미던 모든 계획을 집어 치우고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라크네의 회선을 통하여 은밀히 귀환해 있던 흑색창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단에 올라있는 귀족들의 영지를, 국방부대신 멕스웰의 명령을 받은 군과 함께 들이쳤다.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포박. 수도로 압송시켰다. 말이 명단에 있는 반역자 사냥이지. 그들은 명단에 실려있지 않은, 그들에게만 전해진 명단에 실려 있는 귀족들의 영지까지 들이쳤다. 숙청이었다. 그녀에게 저항하는 귀족들을 제거하는, 피의 숙청. 여왕의 정책에 내심 불만을 품고있던 귀족들은 갑자기 불어 닥치는 바람에 목을 짧게하고 그 바람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여왕의 눈밖에 날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이 이때까지 쌓아놓은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내전 당시 살아남은 귀족들이 대거 참여한 이번 사건에 대하여 아리나스는 그 당시 보여주었던 관대함은 어디 갔다 팔아먹었는지, 명단에 올라온 귀족들의 목을 모조리 치고, 그들의 가족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정녕 피를 보기 원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며 아리나스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초로의 재상은 여왕의 집무실 문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으며 결의를 다졌다. 그는 여왕의 허락 없이 집무실을 드나들 수 있는 허락을 받은 몇 안 되는 사람이기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고 그를 들여보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모시는 여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책상 앞에 앉아서 집무에 열심이었다. 잠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재상은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그 앞으로 다가갔다.
" 재상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죠? "
" 여왕폐하. "
유례없는 재상의 진지한 목소리에 아리나스는 고개를 들어 재상을 바라보았다. 굳은 얼굴을 한 재상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 정말로 그분들을................... "
순간, 아리나스의 얼굴이 약간 굳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재상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평소의 그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일인가 했더니............... 명령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하지만 그분들은 전하의!! "
" 동생이지요, 설마 내가 그것을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대답하는 아리나스의 목소리에서는 차가움을 넘어선 무심함까지 보이고 있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재상이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다.
" 그렇다면, 알고 계시다면!! "
재상은 차마 목구멍을 넘어서지 않는 목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무언가 간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리나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재상. "
" 예 전하. "
" 내가 누구죠? "
"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
" 그래요. 나는 왕입니다. 이 나라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자예요. 그렇다면 재상. "
" ..................... "
" 혈육의 정과, 나라사이에서 국왕은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재상은 말문이 막혔다. 뭐라 대답할 수가 없는 문제다, 보통의인간이라면 당연히 혈육의 정을 우선한다. 하지만 국왕이라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나라라는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어야 한다. 재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알겠습니다. "
재상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는 보았다. 창 밖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던 여왕이 흘린 눈물을, 방을 나선 재상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날. 끌려왔던 귀족들의 처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울부짖는 귀족들 가운데. 아리나스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그녀의 동생들, 두 왕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이름은, 접수된 명단의 제일 윗줄에 적혀있었다.
" ................. "
게덴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레이네의 얼굴은 질려있었고, 영운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 그 여왕폐하가.................... "
" 아무래도 이번엔 맘을 단단히 먹으신 모양입니다. "
게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이미 십여명의 귀족의 목이 날아갔고, 그 중에는 그녀의 친동생들의 목도 있었다. 아마 은근히 여왕에게 반항을 하던 귀족들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얼굴의 영운은, 한참동안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네를 바라보았다.
" 레이네. "
" 예. "
" 이동속도를 올리자. 최대한 빨리 임펠리아로 돌아간다. "
" 알겠습니다. "
" 게덴. "
" 넵. "
" 제국으로 가는 정보통제. 계속하고 있지? "
" 물론입니다. "
" 강화해. 멕스웰 경과 할슈타인 백작과 협의해서 국경을 막아라. 제국으로 도주하려는 귀족들이 있을지 몰라. 그들을 잡아. 알았지? "
" 알겠습니다. "
" 좋아. 다들 가보도록. "
영운은 이번의 일을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해야 할일. 피문을 일으키는 돌멩이가 너무 일찍 던져졌을 뿐이다.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게덴에게 국경봉쇄의 명령을 내린 것도 그가 상관하지 않기 위함이다. 자신이 간섭한다면. 아리나스 이상가는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귀족들위에 군림하는 것은 여왕, 아리나스여야 했다.
- 덜컹!
군수용의 마차는 예의상으로라도 쾌적한 승차감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개량이 필요한 듯 했다.
" 군수창에 말해서 개량해야 겠군, "
나직하게 중얼거린 영운은 몸을 뉘여 잠을 청했다.
아라크네와 은밀영. 이 두 정보조직의 정보는 새들을 이용해 전달된다. D급부터 B급까지의 정보는 비둘기를 통하여, A급부터 특급 까지는 매를 사용하여 전달한다. 그 매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소수의 열명 남짖한 특급요원들에 한해 한정된다. 물론 게덴도 특급요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라. 매의 사용자격은 충분했다.
" 자아 부탁한다. "
새장에서 꺼낸 매의 머리를 가리고 있던 두건을 풀자, 매는 날개를 펼치며 홰를 쳤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을 나르며 바람과 대화하는 이들을 이렇게 묶어놓는 다는 것도 못할 짓이다. 게덴은 미안한 감정을 듬뿍 담아서 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이고 잘 접은 쪽지를 매의 발에달린 통에다 집어넣고, 밀봉한 게덴은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 푸드득!
창공을 날아가는 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게덴은, 비어버린 새장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 대공전하도 참 엄하신 분이지. 이걸 보면 할슈타인 백작님이나 재상님이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비밀 유지를 해야 하는 정보요원이었기에 임펠리아를 향하는 마차의 행렬에서 떨어져서 작은 숲 속에 들어와 있었다. 품속에서 종이와 필기도구를 꺼내서 말 잔등에다 대고 무언가를 써내려 가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젓는 게덴.
" 명령받은 일이니 할 수 없지만.............. "
게덴은 중얼거리며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 삐익~~~ 휘파람을 부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홰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올린 그의 팔에 푸른 깃털을 가진 매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깃털을 손질하고 있는 매의 발에 달린 통에 쪽지를 집어넣고, 밀봉한 다음, 도도히 앉아있는 매를 향해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 하, 하하. 부탁한다 미스트랄. "
미스트랄이라 불린 푸른 매는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쏘아보더니 날개를 펼쳐서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매를 바라보던 게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어떻게 된 것이 저 녀석 만큼은 다루기가 힘들어............. "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매를 다룰 수 있는 자격을 지닌 특급요원들의 의견이었다. 미스트랄에게는 다른 매들에게 명령하는 것과는 달리, '부탁' 해야 한다고, 싫어도 도도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두 눈을 보면, 그렇게 된다고,
" 설마, 전설로 전해지는 '창공의 왕'이라도 되는 것인가? 설마............. 어? 어라라. 빨리 쫒아가야겠네. "
히죽거리며 잡생각을 하던 게덴은, 마차들의 행렬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달렸다.
특급의 정보가 매를 이용해 전달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빠르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게덴이 보낸 두 통의 쪽지는, 이틀을 꼬박 날아서 아라크네의 본부에 도착했고, 특급의 정보이기에 아라크네의 수장. 할슈타인 백작에게로 곧장 전달되었다. 그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실도서관의 지하에 위치한 아라크네의 본부를 나섰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숙청으로 인하여 필요이상으로 경직되어 있는 왕성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끼며 백작이 향한 곳은 여왕의 집무실이 아니라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재상의 집무실이었다.
- 딸깍!
" 안녕하십니까 할슈타인 백작님. "
집무실에 들어서기 위해서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서자, 그곳에서 근무하던 시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 재상은 안에 계신가. "
" 계십니다. "
"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알려주겠나. "
" 알겠습니다. "
시종은 집무실의 방문을 노크하며 안의 재상에게 백작의 방문을 전했다. 번거로워 보이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방문절차다. 여왕의 집무실같이,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되는, 그런 것이 이상한 경우다.
" 들어오시랍니다. "
필요이상으로 허리를 구부리며 시종이 말했다.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주고는, 시종이 열어놓은 문으로 들어섰다. 백작은 귀족이다. 그리고 그의 가문은, 임펠리아에서도 유수의 명문가중 하나다. 그만큼 자존심도 높다. 하지만 백작은 눈앞의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초로의 재상은 임펠리아의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정치와 내정의 달인. 작위, 혈통, 자존심에 앞서서 재능으로 사람을 판별하는 백작에게 있어서, 그는 자신이 허리를 굽히는데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 백작이 이곳까지 무슨 일이오. "
" 게덴으로부터의 연락이 있었습니다. "
" ! "
백작의 말에 크게 놀란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의 커텐을 치고, 백작의 곁을 빠르게 지나, 방문 앞에서 대기 중인 시종에게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지시하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 말해 보시오. "
"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단 네 글자 뿐이었죠. "
라고 말하며 백작이 내민 종이를 받아 읽어본 재상은 얼어붙어 버렸다. 그 내용은 정말 간단했다. '걱정없음' 종이에 적힌 내용의 전부였다.
" 그와 함께 전해진 종이에는 국경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합니다. "
백작의 말에 재상은 신중한 얼굴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일까요. "
" 그런 것 같습니다. "
백작도 재상의 의견에 동의했다.
" 알았소. 생각을 해볼 터이니, 백작은 어서 여왕폐하께 가보도록 하시오. "
" 알겠습니다. 그럼, "
백작은 재상에게 인사를 한 후에,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백작이 나간문을 잠시 바라보던 재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아라크네 사이에 은밀히 존재하는, 대공을 감시하는 조직은 재상이 만들고, 할슈타인 백작의 협력해서 심어놓은 것이었다. 여왕은 뛰어난 인재였고, 훌륭한 왕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과, 이 나라의 백성들이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 또 하나의 국왕................... "
영운은 아리나스와 대등, 아니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녀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똑같은 재능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있다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남자를 더 주목하기 마련. 자칫하다가는 나라의 권력이 양분되어버리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이 나라의 군권은, 가이런 대공이 틀어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대공이 여왕을 대하는 태도에선 의심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고, 여왕이 대공에게 보이는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이런 대공은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지도 모르는 인간. 그의 능력만 보고 신뢰하기엔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 에휴................. "
나날이 늘어가는 한숨과 비례하여 늘어나는 흰머리를 잡아보던 백작은 암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여왕의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은 재상의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냥 문만 열고 들어가면, 시중드는 사람 한명 없이 여왕 홀로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여왕이 보인다. 자신과 재상, 여러 중신들이 제발 옮겨달라고 사정했었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여왕도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지금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 모두가 포기상태였다.
" 폐하. "
" 백작? 어서 오세요. "
최근의 사태로 인하여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 활기찬 모습이 왠지 가식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착각일까. 잠시 생각을 하던 백작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왕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곤 들고 왔던 종이를 천천히 여왕의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 원정군으로부터 온 겁니다. "
" ............... "
아리나스는 백작이 내려놓은 쪽지를 들어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힌, 내용에 아리나스의 얼굴은 쓴 웃음으로 물들었다. 아리나스 역시, 영운이 말한 내용에 담겨있는 뜻을 알아태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 이런, 남편에게 혼난 것 같네요. "
백작은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종이를 집어 들어 다시 한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혹독하신 분입니다. "
" 그래요. 하지만 약간은 기운이 나네요. "
확실히 아까와는 달랐다. 백작을 바라보며 웃는 여왕의 얼굴에는, 가식적인 부분이 완전히 사라진 미소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그럼 저는 이만. "
" 수고 하세요, 국경봉쇄의 문제는, 멕스웰 경과 상의해서 진행하세요. 맡기겠습니다. "
" 알겠습니다. "
백작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을 빠져나온 백작은, 이곳에 올 때마다 일거리가 하나씩 늘어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귓가를 울리는 부하들의 절규를 들으며, 우울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