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년제국-117화 (11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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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풍속의 전주곡-제국이라는 이름의 거인의 발자국 -쉬이이이익! 퍼어억!

"크르르륵..크륵! 크륵!"

날카롭게 울려 퍼지던 고함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성벽을 타고 올라오던 기사들 중 한 명이 쿼렐을 이용해 시끄럽게 외치던 병사의 목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목 근육의 뒤에 숨어 있던 기도가 화살에 관통 당해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대신 뜨거운 핏덩어라 입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병사는 더 이상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제길! 들켰어!"

"쓰발! 조용히 끝내기는 틀렸군."

기사들의 입에서 토해져 나온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욕설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 나왔다. 때는 만물이 희망찬 내일을 위해 깊은 잠 속에 빠져 휴식을 취하고 있을 새벽녘이다. 쌀쌀한 날씨 덕에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없는 그야말로 진한 적막만이 흐르는 새벽녘이다.

덕분에 역설적으로 조그만 잡음도 마치 곁에서 울리는 천둥번개 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린다. 더구나 죽은 병사의 목소리는 그런 조그만 잡음과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였으니 나른한 새벽녘의 잠에 취해 있던 주변 병사들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적..적이다. 적의 습격이다."

"무장을 갖추고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

"비상종을 울려라."

-땡땡땡땡..땡땡땡땡...."

긴급 신호를 알리는 종소리가 미친 듯이 울어댔다. 단잠에 빠져 있던 일부 수비군 병사들이 잠에서 깨어 간단한 무장을 갖추고 성벽으로 달려나왔다. 마치 벌집을 쑤신 것처럼 소란스러웠다.

"제길! 전하 어떻게 할까요?"

이미 성벽 위로 올라서는데 성공한 레이네는 영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미 작전의 성공은 라 센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실력으로 추정되는 영운, 그리고 소드마스터인 자신 레이네, 자신들을 따라온 10여 명의, 검기를 발현시키는 수준의 소드오러.

이 정도 수준의 집단이라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다. 다만 이것이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기껏해야 수백에서 수천에 한정된 작은 나라간의 전쟁이라면 몰라도 최소 일만 단위가 넘는 군대간의 충돌을 상정한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그랜드 소드마스터나 소드마스터의 상징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무시하고 작전대로 간다."

라이네의 굳은 표정을 읽었는지 영운은 힘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물러서는 것도 위험한 일이야. 이렇게 된 이상 우리들만이라도 움직여 성문을 열어야 돼!"

"불가능합니다. 이 요새에는 30,000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만으로 요새의 정문을 확보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철수해 후일을 기약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저희 군을 지휘하시는 전군 지휘관이십니다. 그런 분의 신상에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레이네로써도 그 이상 말하기가 곤란했다. 확실히 세계 대전사에는 우세가 확실했던 전쟁에서 최고 지휘관의 유고로 전황이 뒤집히는 경우가 왕왕있다. 지금 임펠리아는 확실하게 제국군을 압도하고 있지만 영운의 신상에 무언가 좋지 않는 일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우세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확률이 높다.

1, 2, 3군을 지휘하는 노장군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영운의 위치를 노장군들이 대신할 수 없다. 레이네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자고. 걱정이 많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야."

"저는 각하를 보좌하는 입장에서 최선의 방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수가 최선의 수가 될 수도 있지."

"끄응!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분이시로군요. 무모하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무모하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겠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영운에게 레이네는 이빨만을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고 있으면 완전 무장한 30,000의 요새 주둔 병력이 자신들의 달콤한 새벽잠을 깨뜨린 침입자를 향해 개떼같이 덤벼들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 할아버지라도 그 압도적인 머리 숫자 앞에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레이네는 마음이 조금해지기 시작했다.

"레이네. 날 믿지 못하는가?"

"옛?"

"날 믿지 못하냐고...."

"아..아닙니다. 전 대공 전하를 믿습니다."

확실히 면전에 대고 '믿지 못하겠는데요?'라고는 말할 수 없는 관계로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멋대로, 또 본능적으로 혓바닥이 돌아갔다. 레이네의 대답에 영운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실행한다."

"...."

"대답은 어디다 팔아먹었나?"

"옛!"

레이네는 영운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짧고 힘있는 대답으로 자신의 신뢰를 표시했다. 아니 본능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영운에게 비 오는 날 먼지 휘날리도록 얻어터질 것 같은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답한 것일지도 몰랐다.

"서둘러! 이제는 시간이 없다."

영운의 말에 성벽 위에 오른 임펠리아의 기사들은 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작전의 성공 여부에 따라 수많은 임펠리아의 병사들이 살거나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작전은 꼭 성공해야 한다.

'신이시여! 저희들을 보호하소서."

평소에 잘 찾지도 않던 신을 찾아가면서 레이네는 영운의 뒤를 급히 따랐다.

일견 보기에도 영운의 작전은 무모함을 뛰어넘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결행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때문에 제리코 장군을 포함한 임펠리얼 제국 원정군 수뇌부들은 입에 거품을 물며 영운을 반대했으리라. 몇 가지 안 되는 공성 방법 중에 별동대를 구성하여 적이 잠든 야심한 밤을 택해 요새에 침투시켜 성문을 확보하여 열게 만드는 방법은 과거에도 많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다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고 또 그만큼 작전에 투입된 거의 모든 병력을 잃는다는 점이 있었지만 요새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방법보다는 희생을 줄일 수 있기에 많은 지휘관들이 공성에 선호하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침투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다. 최소한 적을 자극시켜 적의 준비 태세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 할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작전을 수행하는 주체가 영운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작전에 투입되는 별동대의 생존 확률은 매우 낮다. 수 만 명씩이나 되는 전력이 집결된 좁은 지역 한복판에 투입되는 것도 모자라 사방을 둘러싼 성벽까지,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위험 속에 몸을 내 던지는 거나 다름이 없기에 작전이 성공하던 실패하던 전사할 가능성이 99%에 달한다.

그곳에 영운이 직접 뛰어든다면,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아니 그랜드 마스터의 할애비라고 해도 죽음을 면키 어려우리라.

'제길,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좀더 적극적으로 영운을 말리지 않는 것이 후회될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이미 때늦은 후회이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 배 떠난 항구에서 손수건 흔들고 있기인데....

"레이넷!!!"

온갖 후회가 머리 속을 고속으로 지나쳐 갈 때 갑작스럽게 들려 오는 영운의 음성에 레이네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을 보면서 짧은 한줄기 신음성을 날렸다.

"흡!"

-챠르르릉 눈앞을 무섭게 찔러 들어오는 창에 레이네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날라오는 창을 검으로 막았다. 창의 날카로운 강철로 된 단면과 레이네의 검이 마찰을 일으키며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검명이 울려 퍼졌다.

"칫! 타아앗!"

-퍼어어억!

동시에 레이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집 끝을 상대편 병사의 명치 부분을 향해 찔러 넣었다.

"커어어억!"

병사는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쓰러 졌다. 자칫 잘못했으면 지금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될 뻔한 순간이었다. 거기에다가 병사의 창에 머리를 꿰뚫려 이승을 완벽하게 하직할 뻔했다.

"어디다 한눈을 팔고 있는 거야?"

영운의 질책성 음성이 레이네의 귓구멍을 사정없이 파해쳤다. 전쟁터에서 한 눈을 팔는 것은 죽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날아드는 창과 칼이 몸에 박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죄..죄송합니다."

레이네는 자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제국군 병사 한 명을 칼로 베어 올리며 영운을 향해 말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인간이 어이없게 골로 갈 뻔했다.

"전원 성벽을 여는데 주력을 한다. 난 몰려오는 적들을 막겠다."

"알겠습니다."

이미 사력을 사해 요새의 남쪽 성문이 있는 곳까지는 올 수 있었다. 남쪽 성문을 등지고 반원형의 진을 형성하여 돌진해 들어오는 제국군들을 베어 넘기며 공간을 확보하고 있던 영운들이었기에 성문의 빗장을 푸는 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무거운 성문을 열기 위해서는 10여명의 장정들이 달려들어 밀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손을 놓고 있을 여유가 없을 뿐이었다.

영운은 자신 곁에 있던 3인의 기사들에게 레이네를 도와 성문을 열도록 명령했다.

기사들중 둘은 전사하고 둘은 이미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은 상태다. 네 명은 성문에 달라붙어 있고 영운을 비롯해 남은 세 명만이 성문을 열려고 하는 레이네들을 제지하기 위해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제국군을 막고 있을 뿐이다.

'역시..이번 작전은 무리였나?'

발각되는 순간부터 작전의 성공을 물 건너갔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몇 명이 설친다고 30,000이 넘는 주둔군을 가진 요새가 꿈쩍을 할 까닭이 없었다.

'역시 이 방법 밖에 없는 것 같군.' 결단코 말해 이 힘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 영운이 이 세상에 와 이 힘을 사용한 적은 단 한 번, 아리나스를 구하기 위해 세바스찬과 그가 이끄는 철각기병대에게 사용했던 적 밖에 없었다. 그것도 정확하게는 그의 힘의 극히 일부만을 사용한 것뿐이다.

'사람을 향해서는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했던 맹세가 머리 속에서 떠오르자 영운은 고소를 지었다.

'결국 사용할 수밖에 없는가?'

자신이 가진 힘은 파멸의 힘이다. 멸신의 힘을 가진, 위대한 우주의 힘이다.

'힘을 가진 자는 그 이유야 어떻던 간에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한다. 그 어떤 대의명분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힘은 비극만을 남길 뿐이다. 권력, 금력, 무력.... 영운아! 네가 가진 힘은 쉬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힘이다.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자연을 상하게 하고 우주를 상하게 하고 나아가 너 자신을 상하게 하는 저주받은 힘이다. 부디 이 점을 유념하고 지혜로이 힘을 사용하도록 하거라.'

문득 영운은 자신에게 이 힘을 전해 준 스승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생각났다. 힘을 얻게 된다는 말에 당시에는 왜 스승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에 있던 세계에서 영운은 그 말속에 숨을 참뜻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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