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년제국-137화 (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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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의 공간 허허로운 공간이었다. 연한 어둠에 겹겹이 둘러싸인 공간은 마초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제법 넓은 공간이로군.'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느낌만으로 짐작하건데 상상을 할 수 없는 넓이이리라.

'황제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기스플랜은 당황했다. 황제가 만들어 놓은 진언의 공간이 이렇게 넓은줄은 기스플랜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곧 기스플랜은 황제의 위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흠! 저곳인가?'

저 멀리 어둠속에서 고고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한 점 불빛, 마치 망망대해를 밝히고 있는 등대의 모습과 비슷했다. 빛이 있다는 것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 공간은 황제가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 있는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존재는 오직 황제뿐이리라.

기스플랜은 불빛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마음에 드셨습니까?"

비릿한 음성이 기스플랜의 귓전을 때렸다. 물론 기스플랜이 잘 알고 있는 음성이었다. 진언의 공간의 특성상 음색이 많이 탁해졌지만 확실하게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스플랜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

"그렇습니다. 잔멸의 군주시여!"

"...역시 내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군요."

"물론입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모를 리가 없지요."

"바보라?"

기스플랜의 얼굴에는 냉소가 그려졌다. 말을 바꿔 듣는다면 황제의 말은 명백하게 기스플랜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냉정해 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자신은 호랑이 굴에 단신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 황제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시고 있는 것이오이까? 그리고 이 늙은이를 이런 곳까지 유인해 오신 것은 무슨 까닭이오이까?"

"저런 유인이라니요. 이것은 초대입니다. 제국을 지탱하는 존장에 대한 예의를 담은 초대입니다."

"초대라고요?"

"그렇습니다. 초대지요. 아주 정중한 초대."

"......"

황제의 두 눈에는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다만 아쉽게도 아주 순간적이었기에 기스플랜은 황제의 광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이 늙은이를 이곳에 초대를 했으니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 같군요."

"물론. 일단 대화를 위해 자리에 앉으시지요."

-슈우우욱 황제의 손끝이 가리키는 빈 공간에 빛이 모여 의자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형질화 마법인가? 아니면 창조마법인가?'

기스플랜의 두 눈에서는 이체를 띄었다. 형질화 마법. 대단한 고 서클의 마법중의 하나이다. 물체를 분자단위로 분해시켜 필요한 때에 다시 조립을 하듯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 최소한 7서클 이상의 마법력을 동원해야 시행할 수 있는 마법이다.

아마 이 정도 마법이라면 기스플랜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마법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창조마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물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마법,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이다.

오직 신급 존재들에게만 허락된 권능인 것이다. 여기서 조금 발전하게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생명체까지도 창조가 가능해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신의 반열에 낄 수 있는 마법이다.

'혀...형질화 마법이겠지. 창조마법은 결코 아닐 것이야.'

기스플랜은 황제의 능력을 애써 부인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기스플랜의 속마음을 읽고라도 있는 것 처럼 말했다.

"창조마법입니다."

"......"

"잔멸의 군주께서 앉아 있는 의자는 창조마법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

"믿겨지지 않으십니까?"

황제의 얼굴에는 냉소가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가면 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원로원에 대한 냉소가 여과 없이 황제의 얼굴에 투영되고 있었다.

"화...황제...... 설마?"

기스플랜은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는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코 손을 데지 말아야 할 금기의 마법. 아니 결코 마법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군요. 원로원의 대원로 쯤 되시는 분이시니 그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요."

"그것에 손을 데었단 말입니까? 황제!"

기스플랜은 음성을 쥐어짜듯이 토해냈다. 제발 자신의 가정이 틀렸기만을 빌면서...... 하지만 그에게 있어 현실은 냉혹했다.

"그렇습니다. 전 그 힘을 손에 넣을 것입니다."

"미쳤소? 황제.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요. 무엇이 모자라서 제국의 황제씩이나 된 그대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이요."

"큭큭큭! 제국의 황제?"

황제의 입에서는 냉소 어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냉소라는 감정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감정이 섞여 있는 음성이었다.

"기스플랜님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소리군요."

"황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마음을 돌리시오. 금기의 그 힘을 봉인해야 합니다."

"왜요? 무엇 때문에..... 내가 그 힘을 봉인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힘은 너무 위험하오. 자칫 이 세상은 물론 차원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힘이오."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난 힘이 필요하오.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을 힘이......"

"힘이라면 지금도 충분치 않소? 황제 그대에게는 제국의 힘이 있고 그대가 가진 본신의 힘도 있소이다. 세상 그 누구도 황제의 힘을 가벼이 보지 않소이다."

황제는 헝클어진 머리를 두 손으로 단정히 뒤로 넘겼다. 평상시의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약에 취해, 술에 취해, 여자에 취해 있는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광기에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두 눈에는 도저히 사람의 눈빛이라고 할 수 없는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큭큭큭! 힘! 힘이라...힘......"

"그렇소. 황제. 그대는 제국의 황제, 그리고 우리 일족의 황제. 마음만 먹는다면 대륙을 제패할 수 있는 우리 트리온의 일족의 수장이오."

"큭큭큭! 그렇지. 난 위대한 신족 트리온의 수장이었지."

"그...그렇소 황제. 그대는 위대한 우리 일족의 수장이오. 이 세상의 지배자이오."

"그런데 왜 그대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잔멸의 군주 기스플랜이여. 일족 트리온의 대원로여! 그대에게 묻겠다. 정말 날 한순간이라도 황제로 인정한 적이 있었는가?"

황제의 질문에 기스플랜의 가슴은 덜꺽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제국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 나라이다. 표면적으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가장 많이 행사하는 이들은 제국의 세 기둥이라는 삼후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암중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원로원이라는 존재이다.

실제적으로 황제의 권한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황제란 제국을 상징하는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측면이 강했다. 때문에 은연중에 제국의 관료들과 귀족들은 황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진했다.

"난 황제이고 싶다.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황제이고 싶다. 제국의 관료들에게 휘둘리고 귀족들에게 휘둘리고 원로원에 휘둘리는 허수아비는 되고 싶지 않다."

"화...황제......"

기스플랜에게로의 향한 경어 따위는 이미 황제의 입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과거의 기스플랜이라면 황제의 이런 태도는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황제에게는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없었다. 아니 황제가 자신을 향해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 없었다.

"난 절대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으...으음! 그렇다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황제!"

"원하는 것이라?"

황제는 잠시 빈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스플랜으로써는 조금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허공에 머물던 황제의 시선은 기스플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곳이 마음에 드나?"

기스플랜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엉뚱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

기스플랜으로써는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황제의 질문에 대한 기스플랜의 답은 '싫다.'였다. 이곳은 진언의 공간. 황제가 창조한 공간이다. 기스플랜은 황제가 창조한 창조물이 아닌 황제와 동차원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당연히 이 이질적인 공간이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다.

"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는 않군."

"......"

답을 하지 않았지만 기스플랜의 얼굴에는 황제의 질문에 대한 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일그러진 기스플랜의 얼굴은 결코 황제가 창조한 진언의 공간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그런 기스플랜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는 듯 얼굴에 기묘한 미소를 떠 올렸다. 일종의 살기 어린 미소라고나 할까?

"그런데 난 마음에 들거든! 네놈의 묘지로써 말이야."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 이질적인 공간이 기묘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기스플랜의 얼굴색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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