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간담상조
No One Else Like You
진정한 친구는 금강십팔나법으로 붙잡아라.
-프리드리히 니체-
* * *
본래였다면 왓슨과의 첫 만남은 이보다 훨씬 인상적인 것이었어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왓슨과 만난 그날을.
런던대학관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왓슨은 노섬버랜드 제5보병연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다리에 총을 맞아 제대했다.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타지에서 고생한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기라도 할 셈이었는지 고급 호텔에 묵으며 돈을 물처럼 썼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왓슨은 병원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전부 탕진했고 더는 호텔에 묵을 수 없게 되었다.
왓슨은 저렴한 하숙집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나는 같이 방세를 낼 동거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공통의 지인인 스탠포드가 베이커가 221b번지에 묵고 있던 날 왓슨에게 소개해주었고, 우리는 병원의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운명을 믿은 적은 없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고 서로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만남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걸 정확히 맞췄는데도 왓슨의 반응은 과거와 달랐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존 왓슨을 자칭하는 그. 아니, 그녀는 역용술로 모습을 바꾼 숙녀였고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 앞에 서 있는 파렴치한이었으니까.
심지어 손에는 내력을 잔뜩 머금은 지팡이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제3자가 보면 날 범죄자로 오해할지도 모르는 상황.
다행히도 허드슨 부인은 이미 내가 훌륭한 신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옷을 입고 오해를 풀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쾅쾅쾅!!
“괜찮습니까! 홈즈 씨! 갑자기 벽에서 폭발이!!”
쥐새끼를 닮은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부하 경찰관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오기 전까진.
“…….”
“…….”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도는 하숙집. 마침내 경감이 입을 열었다.
“녀석을 무공으로 구속해라!!”
“닥치게, 레스트레이드.”
* * *
근처를 지나가던 레스트레이드가 하숙집 벽이 검기에 썰린 걸 보고 쳐들어왔지만 나는 논리적인 해명으로 그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동안 레스트레이드를 비롯한 경찰 간부들이 자주 날 찾아와 도움을 청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허드슨 부인이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지 않았다면(자기 하숙집에서 범죄자가 나오는 꼴은 보기 싫었을 테니) 어려웠겠지만.
다행인 건, 경찰이 돌아간 다음 내가 재빨리 새로 옷을 꺼내 입었고 남은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할 기회가 남아 있었다는 거다.
“6일 내내 아무것도 안 먹고 틀어박혀 있길래 수련에 집중하고 있는 줄은 짐작했는데 대오각성하신 거였군요. 축하드려요.”
“바로 그겁니다. 고약한 우연 탓에 흉한 모습을 보이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허드슨 부인과 자칭 왓슨(솔직히 나는 아직 이 여인이 왓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은 찢어진 섬유 조각들을 확인하고 나서야 내 해명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군의관으로 복무했다는 주제에 아직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상자와 의사의 입장에서 이성의 맨몸을 마주한 게 아니라 민망했던 거겠지.
오랜만에 만난 친우의 외모와 성별이 완전히 뒤바뀐 건 나로서도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이게 현실인 걸 어쩌나.
“왓슨 씨라고 하셨죠.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함부로 오해했던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다행히도 매사에 진지하고 온화한 성격까진 변한 건 아니었는지 왓슨은 트집을 잡는 일 없이 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다만, 벽에 난 구멍을 못 본 척할 집주인은 없다.
나는 어제 바닥에 뚫은 구멍에 더해 벽을 부순 건에 관해서도 허드슨 부인에게 사죄한 다음 수리에 필요한 비용을 전액 지불하기로 약조해야만 했다.
“이만한 무재武才가 있으니 홈즈 씨도 빈둥대지 말고 왕립무학회The Royal Combat Society 준회원 가입을 노려 보면 좋을 텐데 말이예요.”
수리비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직후 허드슨 부인이 말했다.
월세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내는 데에다 엄연히 수사 자문가라는 직업을 지니고 있는데 빈둥댄다는 소릴 듣다니, 솔직히 말해서 뜻밖이었다.
“홈즈 씨 동년배 중에 절정 초입에 도달한 사람, 거의 없잖아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주로 스승을 잘 만났다는 점에서.
물론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내 재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아무튼 꼭 생각해 보세요.”
“고민해보겠습니다.”
왕립무학회 준회원이라, 사실 구미가 당기는 호칭은 아니다.
매년 예산이 지급되긴 해도 남이 보는 앞에서 자주 무공을 선보이는 건 일인전승의 비전인 바리츠의 전인으로서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레샴 칼리지에서 진행되는 정기비무Regular Duel에 참석하는 것도 귀찮았고.
차후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왕립무학회 가입이 도움이 된다면 또 모를까.
“홈즈 대협께선 절정의 고수셨군요. 이 왓슨, 진심으로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허드슨 부인에게 대답하자마자 연신 얼굴에 부채질만 하던 왓슨이 이쪽을 보고 포권지례를 취했다.
“아니…….”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손사래를 쳤다.
“당치도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스물여덟에 그만한 경지를 이룬 후기지수는 대영大英이 넓다 하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왓슨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호칭이 대협으로 바뀐 걸 보니 아까 남긴 나쁜 인상은 절정고수라는 단어로 인해 한 번에 불식된 모양이었다.
방금 일어난 불상사 탓에 왓슨이 다른 하숙집을 찾진 않을지 걱정했는데, 영국이 내공의 고하로 평가받는 연공서열練功序列 사회여서 다행이다.
물론 왓슨 개인의 무학에 대한 흥미가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해도 풀렸겠다, 슬슬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 볼까.
“그러고 보니 왓슨 씨께선 무슨 일로 오신 건지요.”
나는 왓슨이 하숙집을 구하러 온 걸 알고 있지만 이를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여길 찾은 목적을 물어보는 게 아무래도 자연스럽겠지.
“어머, 내 정신 좀 봐. 소개한다 해놓고 깜빡했네.”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린 허드슨 부인.
“소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며 그녀에게 물었다.
“홈즈 씨가 하도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스탠포드 씨가 직접 만나러 가라 했나 봐요.”
“아하. 그럼 왓슨 씨가 바로 하숙집을 찾고 계신다는 그―”
“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할게요. 홈즈 씨, 이분이 존 왓슨 박사님. 왓슨 박사님, 이분이 셜록 홈즈 씨에요.”
나와 왓슨은 마침내 제대로 악수를 나눴다.
‘과연, 예상대로군.’
처음 만져 본 왓슨의 손은 나보다 훨씬 작고 매끄러웠는데 그 외에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그녀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매끄러운 은발의 새치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떠올린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두 분은 잠시 담소라도 나누고 계시죠. 저는 가벼운 요깃거리를 준비해 올게요.”
허드슨 부인은 동거를 고려하는 우릴 위해 자리를 비워 주었다.
꼼꼼한 성격의 그녀는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메이드를 보내 찢어진 옷가지를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늑한 방이군요. 찾아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둘만 남은 하숙집 2층, 먼저 대화를 시작한 건 왓슨이었다.
“그럼요. 아늑한 건 물론이고 집주인인 허드슨 부인의 요리 역시 수준급입니다. 보시다시피 거실도 널찍한 데에다 침실도 두 개나 있죠. 방세가 조금 비싼 게 흠이긴 하지만―”
악수를 통해 확인한 그녀의 체질을 배려하기로 한 나는 삼매진화Buddha Fire를 일으켜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선생님과 제가 절반씩 낸다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한 의견이었다.
런던에서 이만한 조건의 하숙집을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왓슨 역시 그걸 알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지 않나.
“듣던 중 솔깃해지는 이야기군요.”
왓슨이 반색하며 답했다.
성별을 숨긴 채 남자와 동거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아무래도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번 친해지면 병원에 재취업 한 다음에도 계속 이곳에 머물러 주겠지.
“저는 자주 담배를 피웁니다. 가끔은 독한 영약도 섞어 태우죠. 집에 연기가 들어차도 괜찮으신지요.”
“상관없습니다. 여긴 큰 창문이 두 개나 있지 않습니까. 환기하는 데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이따금 영약과 약품으로 실험을 하기도 합니다만.”
“실은 저도 영약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르침을 구해도 될까요?”
다행히도 이쪽 세상의 왓슨 역시 나와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무학을 탐구하려는 열정이 예상보다 강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당연하죠. 그 외에 제 단점은…… 아까 보신 것처럼 며칠 내내 운기조식으로 시간을 보내거나 무언가에 몰두해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무리武理를 추구하는 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르침을 청하더라도 번거로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서로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내 왓슨은 웃고 있었다.
남장한 여인이 되어 버린 친우의 모습을 보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어느샌가 나는 자연스럽게 왓슨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 혼자 스스로의 결점을 주절대는 것도 부끄럽군요. 박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기 전에 최대한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 두는 게 나을 테니까요.”
“동의합니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왓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선천적으로 혈압이 낮은지라 기상 시간마다 고생하고 있습니다. 소음에도 예민하죠.”
“이런. 맹세컨대 앞으로는 벽을 베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건 괜찮을까요?”
“듣기 좋은 연주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우린 한동안 서로의 취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의미 없는 잡담이었지만 친우와 그리운 대화를 반복하는 건 내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다만, 동시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방금 나눈 대화를 통해 왓슨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그녀가 내 친구와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홈즈 씨, 어딘가 아픈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모양이네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 여인이 이쪽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존 왓슨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줄 생각이다.
그것이 친구에게 작별 인사 한 줄 남기지 않고 멋대로 자살을 택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일 테니까.
“참, 그러고 보니 아까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왔다고 하셨죠. 스탠포드가 말해 주던가요?”
한편, 왓슨은 마침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그리운 질문을 내게 던지는 중이다.
“그럴 리가요. 제게 있어 타인을 관찰하는 건 일상입니다. 저는 약간의 단초를 토대로 몇 가지 사실을 추리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니까요.”
왓슨은 사뭇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는 내게 다시 물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아프가니스탄에 있다 돌아온 참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단계를 밟아 그 결론에 도달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왓슨의 호기심과 감탄으로 가득 찬 표정을 계속 즐기고 싶었던 나는 곧바로 질문에 대답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과거 존이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내가 제시한 답변의 일부가 마음에 걸린 까닭이었다.
당시 나는 왓슨의 얼굴이 햇볕에 그을렸지만 손목 안쪽이 여전히 하얀 것을 근거로 그가 더운 지방에 있다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왓슨은 그녀의 특이한 체질 탓인지 얼굴을 포함해 전신의 피부가 백옥처럼 희고 결이 고왔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근거를 들어 추리 과정을 왓슨에게 들려주려 한 그때, 무심코 그녀가 주머니에서 꺼낸 회중시계의 뒷면을 보았다.
나는 저 시계를 기억하고 있었다. 뒷면에 왓슨의 형 헨리의 이니셜인 ‘H. W.’가 새겨져 있던 물건이다.
저 시계는 왓슨의 아버지가 같은 이름을 쓰던 장남에게 물려준 것으로, 술에 빠져 살던 그가 죽고 다시 동생인 왓슨의 손에 건너온 것이었는데―
[H. W.]
[J. W.]
안법을 펼쳐 확인한 시계의 뒷면에는 이니셜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회귀하기 전 왓슨은 자기 이름을 굳이 뒷면에 새기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우연일까?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왓슨 씨에겐 형제가 몇 분 계시는지요―”
그때였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젊은 형사가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인가. 그렉슨 경감.”
내가 묻자 아까 들이닥친 레스트레이드의 라이벌이자 그보다 조금 더 똑똑한 스코틀랜드 야드의 실력파, 토비어스 그렉슨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살인 사건입니다. 홈즈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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