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6화 (6/110)

006. 부러진 칼날 (2)

Broken Sword (2)

나는 신을 경애하는 자로 벗을 사랑했고 적들을 미워하는 일이 없었으나 성산파를 경멸하며 죽는다.

-볼테르-

* * *

경관이 전한 소식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번 사건의 범인은 미합중국 출신의 사냥꾼 제퍼슨 호프.

회귀 전 그는 드레버와 스탠거슨을 쫓아 런던으로 건너왔고 마부로 일하며 기회를 노리다 두 사람을 독살했다.

요크 대학의 실험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다 손에 넣은 알칼로이드를 사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가 시체로 발견되다니.

심지어 사망 추정 시각은 3일 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피해자보다 이틀이나 일찍 죽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걸까.

“어쩌면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구가 복수를 한 걸지도 모르겠군.”

“방금 자네도 듣지 않았나, 왓슨. 제퍼슨 호프가 죽은 건 사흘 전이라고.”

“듣고 보니 그래.”

나는 잠시 스코틀랜드 야드의 부검의가 상상 이상의 머저리일 가능성 역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게 아니면 스탠거슨이 시체를 빠르게 녹이는 화골산化骨酸을 소량 사용해 갓 죽은 시체를 사흘 지난 것으로 감쪽같이 위장한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로써 사건이 더욱 흥미로워진 건 사실.

“피해자의 주변인 중 같이 미국으로 건너온 자가 있지 않았나.”

“예. 조셉 스탠거슨이라는 비서가…… 잠깐, 그걸 대체 어떻게…….”

“어제 명함집을 확인했지. 그래서, 스탠거슨은 어디 있나.”

“어제부터 저희 쪽에서 보호 중입니다. 드레버가 죽은 걸 듣고 몹시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왓슨의 말마따나 호프가 드레버를 죽인 직후 친구인 스탠거슨이 복수를 했다면 얼추 앞뒤가 맞다.

다만, 평범한 몰몬교 무인이 부검의를 속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사특한 기예는 독을 다루는 당문唐門이나 강시술의 명문 진주언가辰州言家, 혹은 모산파Maoshan Clan의 진전을 이은 모던파近代派 수도사의 주특기였으니까.

게다가 경찰은 드레버가 죽은 걸 확인한 직후 스탠거슨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호프를 죽이고 시체에 장난을 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호프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 근처에서 스탠거슨을 목격했다는 증언은 있나.”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마부로 위장한 호프를 죽인 건 스탠거슨이 아닐 것이다.

“알겠네. 바로 출발할 테니 현장에서 보세.”

경관을 내보낸 나는 짐을 챙겼다.

“이보게 왓슨, 자네만 괜찮다면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도록 하지.”

“한 끼 사려고?”

“당연히 그럴 생각일세. 단,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도 비위가 상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내기에 지면 점심은 자네가 사게.”

“그게 도당체 무슨 억지인가!”

왓슨이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나는 곧바로 지팡이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참. 가장 좋은 외투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부촌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싫다면.”

출발하기 전 잠시 ‘녀석들’에게 시킬 심부름이 있다. 서두르는 게 낫겠지.

* * *

준비를 마친 우린 마차를 잡아 호프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로 출발했다.

하이드 파크의 담장을 따라 남하. 버킹엄 궁전 앞을 지나 서쪽으로 달린 마차가 첼시Chelsea에 들어서자 호사스러운 저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런던을 대표하는 부촌인 만큼 첼시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이런 곳에 토막 난 시체가 버려졌다는 얘기가 도는 날엔 정·재계에서 힘깨나 쓰는 사모님들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무능함에 관해 떠들고 다닐 터.

윗선에게 혼쭐이 나 시무룩해진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을 상상하니 유쾌할 따름이었다.

“홈즈, 자네 들떠 있군.”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왓슨은 아편쟁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자네가 범인으로 지목한 남자가 사건 발생 전에 죽어 시체로 발견되었네. 탐정, 아니, 수사 자문가로서 신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목소리를 깔고 점잖은 신사의 어조로 말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친구의 존엄을 위해 꾹 참았다.

“글쎄. 내가 틀렸는지는 끝까지 확인해 봐야 알겠지.”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새 친해졌다고 살살 내 자존심을 긁으려 드는 구석은 내가 아는 왓슨과 닮았다.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차차 알게 될 테니 상관은 없다만.

“나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야. 한두 번 틀리는 일이 있어도 범인을 잡아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오히려 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건을 맡게 되어 기쁠  따름일세.”

“이해할 수가 없군…….”

왓슨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차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붉은 벽돌 담장에 둘러싸인 아늑한 정원.

하지만 이곳에서 키우는 건 런던의 여타 정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가의 식물뿐이다.

첼시영약원Chelsea Physic Garden.

약사 협회 실습생들이 영약 재배를 위해 1673년 땅을 빌린 이후로 이곳은 영약의 품종 개량과 기타 실험의 중심이 되어 왔다.

기관진법의 힘으로 주위와 다른 미기후微氣候를 유지하는 영약원은 본래 런던에선 자랄 수 없는 타국의 식물과 영약을 재배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장이었던 고故 로버트 포춘 옹께선 동인도 회사 출신으로 청의 차 재배 기술을 훔쳐온 실력 좋은 산업 스파이였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대영제국이 인도에서 찻잎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처음으로 목화나 파인애플, 고무나무, 올리브를 재배하는 데에 성공한 것 역시 이곳, 첼시영약원이다.

예전부터 한 번은 오고 싶었는데 설마 사건 조사차 방문하게 될 줄이야.

“여긴 정말…… 별천지로군.”

정문을 통과하자 앞서가던 왓슨이 작게 탄성을 발했다.

영약원 안에선 형형색색의 화초와 이국적인 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의 식물이 뿜어내는 향기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하고 화사했다.

“쉽게 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진귀한 약초나 열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왓슨은 무공 이상으로 영약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 자신의 체질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이쪽 방면의 연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을 터.

무엇보다 직업이 의사니까 이런 곳에 오면 눈이 돌아가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제는 나였다.

-꿀꺽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내 손은 멋대로 꽃을 꺾으려 들었다.

사자심법의 공능으로 영혼에 새겨진 모르핀과 코카인의 금단증상을 퇴치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 심법 또한 부작용이 덜할 뿐이지 마공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사자심법의 부작용 중 하나가 바로 심각한 영약 중독이었다.

“홈즈,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나. 잠시 이리 와 보게.”

왓슨은 가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깨금발로 서서 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 주었다.

“칠칠맞지 못하게 이게 뭔가. 침이나 흘리고.”

“……걱정 말게나. 별일 없으니.”

“눈이 풀려 있어 무슨 일인가 했네.”

“이곳의 경치가 수려해 잠시 넋을 놓았을 뿐이야.”

나는 애써 영약의 금단증상을 억누르며 답했다.

“자네가 그런 감수성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어.”

“미리 놀려 두게. 내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 다신 그런 소릴 할 수 없을 테니.”

“나중에 시간 날 때 한 곡 탄주해주지 않겠나.”

“부탁이니까 제발 듣고 나서 놀라 자빠지지나 말게.”

뜻하기 않게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다.

나는 다시 정신을 다잡고 정문에서 대기하던  경관을 불렀다.

“시체는 어딨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나를 알아보고는 근처에 있던 영약원의 경비원을 내 앞으로 데려왔다.

“제가 안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영약원 내에는 방범진식防犯陣式이 펼쳐져 있어 출입자를 미혹하고 있거든요.”

“흥미롭군.”

“그 점은 동의합니다만, 이 진식은 생자生者를 현혹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길을 잃기 싫으시다면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경비원은 나와 왓슨을 데리고 정원 안쪽으로 향했다.

몇 걸음마다 멈춰 서고, 방향을 틀고, 눈을 감았다 뜨는 등 복잡한 파훼법을 거치고 나서야 우린 영약원의 최심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원래 살던 세상에선 여길 약초원이라 불렀고 점유 면적 역시 그리 넓지 않았는데.

이쪽 런던에선 중요 시설로 취급되는 듯 쓸데없이 넓어서 시체가 있는 곳까지 장장 30분은 걸어야만 했다.

“수준이 나쁘지 않군.”

그 와중에도 나는 정문과 내부에서 경비를 서는 장정들을 관찰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한 티를 내는 일이 없었다.

그저, 출입하는 이들이 정원의 영약에 손을 대지 않나 신경질적으로 감시할 뿐.

뭐, 여기서 키우는 영약의 가치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뭔가 알아낸 건 있는가. 레스트레이드.”

나는 어깨가 넓은 경감의 등에 대고 말을 걸었다.

이쪽을 향해 돌아선 레스트레이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아무것도요. 그저 끔찍할 따름입니다.”

천천히 레스트레이드가 있는 자리까지 걸어간 우린 마침내 시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우욱…….”

“이겼군. 오늘 점심은 왓슨, 자네가 사게.”

“이런 걸 보고도 자네는 농담이 나오우에엑―”

나는 헛구역질을 하는 왓슨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확실히 식사하기 전에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군.”

발밑에 널브러진 시체의 꼴은 처참했다.

아니,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시체의 얼굴은 분명 내가 기억하는 범인, 제퍼슨 호프의 것이었다.

다만 그의 몸은, 아까 경관이 말했던 대로 토막이 나 있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꺼려지지만, 조각을 세는 데에 열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도 모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어디 보자…….”

나는 지팡이를 가져다 대 시체를 뜯어 먹는 구더기의 크기를 살폈다.

“죽고 나서 사흘 정도 지났다는 건 사실이군.”

천마장에 새겨진 눈금으로 확인한 결과 구더기는 틀림없이 3일 전에 부화한 개체였다.

“레스트레이드 자네가 당장 템스강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가.”

내가 주목한 건 시체가 토막 나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정원 안을 가득 채운 갖은 영약의 향기와 시체가 발하는 악취.

그 속에서도 진한 백합향은 그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검향劍香의 출처는 시체의 절단면.

성산파가 자랑하는 환검幻劍, 백합검법의 초식에 난도질당한 흔적이 틀림없었다.

“최소한 누구에게 당한 건진 알 것 같군.”

날카로운 검에 총 열여섯 번 잘려나간 몸뚱아리는 모든 조각이 흩어지는 일 없이 반경 2야드 안에 전부 모여 있었다.

시체의 가슴 한복판에 꽂혀 있는 건 부러진 칼날.

검의 나머지 반절이 어디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레스트레이드. 드레버의 검을 가져오게. 당장.”

얼마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야드의 증거물 보관실에 있던 부러진 지팡이검이 영약원에 도착했다.

어제 죽은 몰몬교도 이녹 J. 드레버가 범인과 맞설 때 사용한 무기.

나는 드레버보다 이틀 먼저 죽은 호프의 시체에 꽂힌 칼날을 뽑아 그 옆에 두었다.

“맙소사.”

혼란에 빠진 왓슨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점점 흥미로워지는군.”

영약원에서 찾은 칼날은 드레버가 쥐고 있던 검의 부러진 반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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