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참수
Beheading
천년빙잠의 독으로 망고주합의 독을 극복하는 것처럼,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된다.
-존 드라이든-
* * *
다른 누군가가 조각난 시체를 이곳으로 옮긴 흔적은 없다.
바닥에 남은 발자국 역시 어지럽고 다양하게 찍혀있긴 해도 호프가 신은 부츠와 크기가 일치하는 것 말곤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 전에 어제 부러진 칼이 어쩌다 사흘 전에 죽은 시체에 꽂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왓슨. 드레버가 죽기 전 누군가를 벤 흔적이 남아 있던 걸 기억하나.”
“어제 들른 사건 현장의 바닥에 튄 핏물 얘기라면 나도 보았네.”
“그 피가 여기 누워 있는 호프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믿겠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가.”
왓슨은 예수나 왕실을 모욕하는 발언이라도 들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의 말을 정리한다면, 범인은 빈집으로 성산파 고수를 유인한 다음 아무 상처도 내지 않고 독살했다는 거로군.”
“정확하네.”
“어디 그뿐인가. 피해자에게 반격당해 온몸이 베였는데도 멀쩡히 영약원까지 와서 진법을 돌파하기까지 했지.”
“바로 그거지.”
왓슨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사흘 전에 죽은 시체가 성산파 고수를 독살한 다음 마차로 수십 분 걸리는 첼시까지 걸어와 저절로 토막이 나는 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네는 생각보다 훨씬 총명하군. 점심은 역시 내가 사도록 하지.”
“우리 주께 맹세코 점잖게 사양하겠네!”
어쨌든 사건의 전모는 밝혀졌다.
남은 건, 가설을 증명하고 해결하는 것뿐.
-스릉
기문병기 천마장의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예리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년한철로 만든 이 보검은 강기마저도 베어 내는 나의 애병이었다.
“……잠깐. 지금 뭘 하려는 건가, 홈즈.”
“들른 김에 표본을 채취하려는 참이네.”
-서걱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검을 내리쳐 시체의 목을 잘랐다.
날이 예리한 탓도 있겠지만 죽은 지 오래된 시체여서 그런지 피가 많이 튀지 않았다.
“흐음.”
베어도 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다만, 이쪽은 아직 내 가설이 옳다는 확증을 얻지 못했으니 굳이 지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슨 짓입니까 지금!!”
기겁한 레스트레이드가 내게 달려들어 금나수Submission를 시도했지만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다음 다리를 걸었다.
“허억!”
그대로 흙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질 줄 알았는데 경감은 나려타곤Lazy Donkey Roll을 펼친 다음 곧바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실례. 무심코 정당방위를 하고 말았네.”
예전보다 조금은 실력이 늘었군.
“블랙 마리아黑聖母馬車에 타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머리를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군. 이건 귀중한 표본이라서 말이지.”
“표본?”
나는 들고 있던 호프의 머리를 왓슨에게 던졌다.
“꺄아아!”
반사적으로 그것을 붙잡은 왓슨이 평소 위장을 위해 낮게 깔고 있던 목소리가 아닌 아녀자의 비명을 발했지만 금방 입을 다물었다.
“홈즈 자네란 사람은 정말…….”
“중요한 표본이니 조심해서 다루게. 혹시라도 입과 코에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는 게 좋을 걸세. 점막에 손이 닿았다간 영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꼭 내가 아니라 자네가 의사인 것 같군.”
“그럴 리가. 짚이는 구석이 있을 뿐이야.”
왓슨은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호프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었다.
걸쭉하게 응고된 피가 떨어지고 있어도 고인의 머리를 바닥에 떨어지게 두는 건 의사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표본은 수사에 필요하니 잠시 빌려 가겠네. 금방 제자리에 돌려놓을 테니 안심하게.”
“꼭 책이라도 빌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레스트레이드가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참. 영약원 관계자들에게 하나만 물어봐 주면 고맙겠어.”
“이번엔 또 뭡니까.”
“재배하던 영약 중 간밤에 없어진 걸 모조리 적어 주게. 확인이 끝나는 대로 여기 적힌 주소로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말고.”
나는 주머니를 뒤져 펜과 수첩을 찾았다. 아쉽게도 수첩은 없었지만.
“레스트레이드.”
“……네?”
“수첩을 두 장만 찢어주지 않겠나.”
“본인 걸 쓰시지요.”
“내가 어지간한 메모는 전부 소매에 적는 걸 알고 있지 않나.”
레스트레이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수첩을 찢어 내게 건넸다.
나는 한 장에 주소를, 나머지 한 장에는 몇 줄의 지시 사항을 적었다.
“사라진 영약의 목록을 가져온 다음 두 번째 메모에 적은 대로 움직이게. 하나라도 빠뜨려선 아니 되네.”
나는 두 장의 메모를 각각 반으로 접어 경감의 양손에 쥐여 준 다음 영약원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기다리게! 홈즈!!”
잘린 머리통을 든 왓슨이 어정쩡한 자세로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 * *
악취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시체의 머리를 적당한 주머니에 담아 주둥이를 묶은 우린 근처의 다루茶樓로 향했다.
평소라면 점심을 거르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은 저녁까지 바쁘게 움직일 예정인지라 샌드위치와 다과, 그리고 홍차까지 배부르게 먹어두기로 했다.
“부촌의 음식은 달라도 뭐가 다르군. 값이 나가긴 하지만 맛이 나쁘지 않아.”
“…….”
이상한 건, 왓슨이 영 입맛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왓슨. 자네, 군인 출신치곤 생각보다 소식하는군―”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왓슨이 대뜸 소리를 지른 탓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자네가 그리 비위가 약할 줄은 몰랐지. 그래서 사죄의 의미도 겸해 이렇게 점심을 사는 게 아닌가.”
왓슨은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 쏘아보다 잽싸게 내가 쥐고 있던 음식을 빼앗아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3단 트레이에 쌓인 나머지 샌드위치와 다과를 차례대로 입에 물고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게. 그러다 체하겠어.”
“감히 의사에게 조언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기 같은 건 하지 말 걸 그랬다.
“온종일 자네의 기행 탓에 고통받느라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이 다 갈려 나갈 지경이라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전부 수사에 필요한 과정이었는 걸.”
“아까 영약원에서 나올 때도 멋대로 경비보다 앞서가다 진법에 현혹되지 않았나. 길을 잃은 자네를 찾느라 10분은 족히 돌아다녔다고.”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길을 헤맨 적이 없어. 이럴 때가 아니면 들를 기회가 없는 장소라 잠시 볼일을 봤을 뿐이지.”
“하. 이젠 거짓말까지!!”
“사람이 말을 하면 믿어 줬으면 좋겠네만.”
내가 알고 지내던 왓슨보다 사람을 덜 의심하나 싶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성별이 바뀌었을 뿐,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겠지.
나는 식사를 마친 다음 곧바로 마차를 잡았다.
“그래서 이번엔 어딜 갈 생각인가, 홈즈.”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조금 전까지 잔뜩 짜증을 내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왓슨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혈중 포도당 농도가 적정치까지 올라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밖으로 데려갈 때 굶기면 안 되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다음 단초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지.”
“그게 어딘지 묻고 있네만.”
“하이게이트 공동묘지Highgate Cemetery 근처에 지인이 살고 있어.”
“공동묘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자인가?”
나는 그의 특징적인 외모와 성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어 가지 분야의 전문가로 다양한 수입원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도 반드시 도움을 줄 걸세.”
“토막 난 시체를 구경한 다음 머리를 잘라 공동묘지로 가다니. 설마 장의사라도 찾아가 이걸 파묻을 생각인 건 아니겠지.”
“……놀랍군. 대체 어떻게 추리한 건가.”
왓슨은 벙 찐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 그야 당연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좋네.”
아무래도 숙녀의 직감은 아직 내 지식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우리가 탄 마차는 첼시에서 북상, 다시 베이커가를 지나 런던 북부로 향했다.
하이게이트는 매그니피센트 세븐Magnificent 7이라 불리는 런던 외곽의 일곱 공동묘지 중 하나로 헴스테드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양한 양식의 묘비 사이로 녹음이 우거진 이곳은 부자와 유명인들의 매장지로 인기를 끌고 있어 우리가 들렀던 첼시와는 반대로 망자의 부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도착했네.”
마차는 언덕길의 아담한 저택 앞에서 멈췄다.
런던의 하늘이 아까보다 한층 더 우중충한 색깔을 띠고 있는 탓일까, 아니면 근처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어서일까.
주위를 둘러보는 왓슨의 표정엔 노골적인 경계심과 두려움이 엿보였다.
“그래서, 자네의 지인은 어디 사는 건가.”
“저기 새까맣게 칠해 둔 집일세.”
나는 언덕길에 세워진 아담한 2층집 앞으로 걸어갔다.
지붕 가장자리에는 햇빛에 말린 고기가 실에 매달려 있어 집 주인의 식성과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에 있는가. 나일세, 홈즈.”
가볍게 두 번 노크하고 소리치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끼이익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건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청년이었다.
“일찍 왔군. 안으로 들어오게.”
아녀자 못지않게 긴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사내는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우릴 맞이했다.
어두운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자극은 강렬한 약품의 냄새였다.
왓슨 역시 그 냄새를 맡고 내가 미리 언급한 사내의 직업을 금방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쪽은 초면인데, 누구신지.”
“내 새로운 동거인이자 조수인 왓슨이라고 하네. 본업은 의사. 자네와 전문 분야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존 왓슨입니다.”
“언言이라고 하오. 이 시간대엔 보통 장의사로 일하고 있지. 차와 음식을 낼 테니 앉아서 기다리시게.”
시체를 염습할 때 사용하는 약품의 냄새에 머리가 아파 왔지만 손님으로서 내주는 다과를 마다할 순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라도 미리 식사를 마쳐 둬서 다행이군. 덕분에 토하고 싶어졌어.”
왓슨은 언이 소리 없이 돌아서서 주방으로 걸어간 걸 확인하고 속삭였다.
집에 감도는 진한 죽음의 향기가 영 몸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집은 언의 집이자 작업실.
약품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실은 나도 조금씩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빈속에 이 냄새를 맡는 쪽이 오히려 건강에 해로웠을 걸세.”
“그래서, 자네는 뭣 하러 장의사를 찾아온 건가.”
“말했지 않나. 언은 낮에 장의사의 신분으로 일하지만 밤에는 다른 일을 한다고.”
응접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왓슨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밤의 직업이 법에 저촉되는 게 아니길 바라네. 그나저나 언이라는 남자, 자네가 오는 걸 미리 알고 있던 듯한데 대체 언제 연락한 건가.”
“그야 첼시로 출발하기 직전에 일찌감치 연락했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어떻게?”
“이렇게.”
-쿵
내가 발을 구르자 테이블 아래에서 찰랑찰랑한 금발을 늘어뜨린 소년의 상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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