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9화 (9/110)

009. 핏빛 실험체 (2)

A Subject In Scarlet (2)

강시는 말이 없다Dead Men Tell No Tales.

-영국 격언-

* * *

“프랑켄슈타인의 흑고黑蠱에 기생당한 자는 단전의 내공을 모두 빨아 먹히고 그다음엔 뇌를 먹이로 내놓게 된다는군. 그때부턴 활시라고조차  부를 수 없게 돼. 사람의 마음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괴물로 변하게 되는 거지.”

이젠 알 것 같다.

어제 살인 현장에서 백합 향기에 섞여 있던 기이한 향은 활강시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방부제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말한 시독은?”

“이 녀석의 시독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특수해. 숙주가 생전에 품었던 깊은 증오, 그러니까 뇌가 만들어낸 신경전달물질을 벌레가 가공해서 완성되거든. 흔히 심독心毒이라고들 하지.”

언의 시선은 공허했고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기울어져가는 언가를 위해 당문의 인체 실험에 협조했던 시절의 기억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걸까.

“몸뚱이를 차지한 벌레는 숙주를 대신해 복수를 마치겠지만, 그다음부터는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게 죽음을  흩뿌리기 시작할 거다.”

단언컨대 사람의 손으로 만든 독고毒蠱 중 가장 악질.

강시술의 명문 진주언가辰州言家 태생의 실험체는 호프의 두개골을 점령한 벌레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나저나 저런 속도로 상처를 회복하려면 대량의 내력이 필요할 텐데, 대체 어디서 그만한 기운을 수급한 건지 모르겠군.”

언의 말을 들은 왓슨이 무언가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군. 시체가 영약원에서 발견된 건…….”

“맞아. 자네가 생각한 대로일 거야.”

벌레가 숨어 있던 건 비단 머리만이 아닐 것이다.

토막 난 몸의 각 부위에도 똑같이 생긴 놈들이 숨어 있을 터.

“조각난 시체를 이어붙이는 데에 어마어마한 공력을 쏟아부었을 거야. 그만큼 배가 고파졌을 테고.”

굶주린 벌레들은 방금 쪼개진 머리통을 합친 것처럼 백합검법에 당한 시체를 이어붙인 다음 영약원으로 향한 게 틀림없다.

놈들의 본능이 강렬한 영약의 기운을 따라가면 배부르게 식사를 마칠 수 있다고 속삭인 결과겠지.

살아있는 인간을 미혹하는 진법 갖고는 놈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쾅쾅쾅!!

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가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계십니까!! 홈즈 씨를 찾아왔습니다!”

언이 문을 열자 점심 때 본 경찰관이 집안으로 걸어 들어와 내게 두꺼운 서류 다발을 내놓았다.

“말씀하신 대로 영약을 조사해 기록한 목록입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 차례대로 페이지를 넘겼다.

분명 사라진 영약만 추려서 적어달라 했는데 어째서인지 목록에 적힌 영약의 갯수는 족히 기백幾百은 되어 보였다.

피해 액수를 허위로 신고해 보험금을 부정수령할 생각인 걸까.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사라진 영약만 추려서 적어 달라고 말했네.”

“네. 여기 적힌 건 틀림없이 시키신 대로 없어진 영약의 종류와 숫자입니다.”

경찰관의 대답을 듣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 추리는 대부분 들어맞았지만 고의 식욕만큼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왓슨! 당장 호프의 구강 내 점막을 살펴보게! 영약을 섭취한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아무것도 없어. 이빨 사이에 낀 뿌리 조각이 전부일세.”

“식도를 통해 흘러간 흔적은?”

“전혀. 영약의 성분은 식도 점막에 닿지도 않았어. 죄다 구강 내에 머물다 사라졌다네.”

“맙소사.”

놈이 먹어치운 영약의 기운의 삼분지일밖에 흡수하지 못했을 거라고 가정해 그 내력의 총량은 어림잡아 초절정의 고수와 동급……, 혹은 그 이상.

밤이 되어 고가 잠에서 깨어나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게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책은 세워두었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에게 또 다른 일을 부탁한 거로 기억하네만.”

경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직후, 멀리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양민들에게 긴급사태의 발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런던광역경찰청의 시체 안치소와 베이커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시민을 대피시켰습니다.”

“잘했네. 이따 ‘그 남자’를 데려오는 것도 잊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놈이 호프의 복수에 성공하는 날엔 런던 전체가 독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벌레가 무슨 수로 숙주가 지정한 원수를 찾아내는지는 이미 짐작이 갔다.

어떻게든 강시가 스탠거슨을 죽이기 전에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도로까지 막아가면서 대체 무엇을 할 생각인가, 자네는.”

한편, 왓슨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나와 경찰관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별거 아니야.”

나는 드레버의 시체에서 떨어진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이따 저녁에 손님이 이걸 찾으러 올 예정이라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구천을 떠도는 복수귀의 망령을 잠재우는 건 결국 내 역할이 될 듯하다.

* * *

경찰에게 마차를 얻어탄 우린 곧바로 베이커가 221B 번지의 아늑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회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쪽 세상의 나 역시 거실에 화학 실험에 필요한 도구와 약품을 갖추고 있었다.

예전엔 주로 독극물이나 기타 수사에 필요한 약품 등을 직접 만드는 데에 사용했지만, 이곳에 있는 물건은 주로 영약의 엑기스를 추출하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냄새가 남지 않도록 빨리 끝내야겠어. 허드슨 부인이 화를 낼지도 모르니.”

“뭘 할 생각인가, 홈즈.”

“기다려보게. 레시피를 떠올리는 중이니.”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제발 부탁이니 서둘러 주게나. 아까 끔찍한 강시가 우리와 스탠거슨 중 하나를 노리고 올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맞아. 조만간 놈이 찾아올 거야.”

고개를 돌리자 왓슨이 부랴부랴 가방에 귀중품을 챙기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왓슨.”

“보면 모르겠나, 짐을 챙기고 있지. 자네 말대로면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잖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면 서둘러야 하네.”

“호들갑은. 걱정 말게. 대처할 방법이 있으니.”

“……슬슬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자네가 직접 말했네. 내가 절정고수라고.”

왓슨은 그제야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정신 좀 봐. 계속 사건에 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자네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 지 잠시 잊고 말았지 뭔가!”

“쑥스러우니까 그쯤 해두게.”

사실 절정의 경지에 달했다 해도 나는 아직 이쪽 세상의 셜록 홈즈가 지닌 내공의 절반 정도밖에 다룰 수 없다.

익힌 초식 역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테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시 하나쯤은 상대할 자신이 있다.

제아무리 영약을 도핑해 봤자 시체를 움직이는 건 벌레다.

한낱 미물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어떻게 놈을 처리할 생각인가. 내가 도울 일은 있고?”

“흠. 어디 보자. 자네가 도울 만한 일은…….”

흑고는 야행성.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진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없어. 그냥 싸던 짐이나 다시 푼 다음 쉬고 있으면 되네.”

“정말로?”

“물론 실험을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험?”

“그래. 실험.”

나는 해가 지기 전까지 신비로운 불사의 생명체를 무력화시킬 준비를 마칠 생각이었다.

“일단은 그 전에, 차 한 잔 어떤가Fancy a cuppa?”

다름 아닌 화무학化武學의 힘을 빌려서.

* * *

잠시 후.

나는 찻잔을 비우자마자 곧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흠…….”

내가 약품이 든 병을 꺼내는 동안에도 왓슨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심정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소문으로도 듣기 힘든 고蠱니 강시彊屍니 하는 것들을 실제로 목격하니 정신이 혼미해진 게 분명하다.

적은 말도 안 되는 재생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시체를 멋대로 움직이는 궁극의 고충蠱蟲.

그런 괴물이 시체를 접붙여 우릴 찾아온다고 들었으니 의사인 그녀로선 여러모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벌레가 야행성이라고 했지 않았나. 그럼 지금 당장 시체가 보관되어있는 스코틀랜드 야드로 가서 직접 퇴치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건 아니 될 이야기야. 우린 오히려 놈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유효하게 활용해야만 하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미리 제거하는 건 현시점에선 불가능한 일일세. 무슨 짓을 하든 아까 봤던 것처럼 다시 몸을 복구시킬 테니까. 그러니까 관건은 놈의 기이할 정도로 강인한 재생능력을 봉인하는 것인데…….”

“뭔가 좋은 술수라도 있는 건가, 홈즈.”

“당연한 소릴. 방법은 언제나 있다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창가를 가리켰다.

“일단은 거기 보이는 화분에서 열매를 따서 갖다주게. 장갑 끼는 걸 잊지 말고. 최대한 많이.”

“이건…….”

녹색 잎사귀 사이로 조그마한 붉은 열매가 산딸기처럼 뭉쳐 있는 식물의 외관을 본 왓슨이 작게 탄식을 발했다.

“천남성天南星이 아닌가.”

“바로 알아보았군.”

참고로 말하자면 천남성은 신비로운 영약 같은 게 아니다.

“이기거풍산理氣祛風散을 만들 때 사용해 봤네.”

왓슨은 조심스럽게 장갑 낀 손으로 열매를 뭉텅이로 따서 내게 건넸다.

천남성의 열매는 꽤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공하면 탕약의 재료가 된다.

왓슨이 언급한 이기거풍산은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理氣 하고 풍을 제하는祛風 효과가 있어 구안와사 등의 증상을 앓는 환자에게 사용되는 특효약이었다.

“대학관 시절 겁도 없이 이걸 먹은 동기가 있었지. 일주일은 맛을 못 느끼더군.”

“그 친구 아직 살아 있는가?”

“다행히도 제때 뱉어내서 별일 없었다네.”

동양에선 죄인에게 내리는 사약의 재료로도 사용된다고 하는데, 보아하니 모든 런던대학관 생도가 왓슨만큼 똑똑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천남성을 사용하는 거면 탕약을 달이는 건 아닐 테고…… 사약을 만들어 먹일 생각인가.”

“고작 그 정도로 죽일 수 있다면 고생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만드는 건 놈에게 먹일 미끼일세.”

“설마 그걸 길들일 생각은 아니겠지?!”

왓슨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대체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해야 하나.”

왓슨에게 대꾸하며 호프의 머리통을 꺼냈는데 마침 은쟁반에 요깃거리를 담은 허드슨 부인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왔다.

“간단하게 차라도 드시면서 하시으아아―”

부인은 잘린 머리를 보자마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그녀가 바닥에 머리를 찧지 않은 건 왓슨이 제때 몸을 부축한 덕이었다.

“대피한 줄 알았는데 집에 있었나. 하여튼 부인도 배려심이 너무 깊어서 탈이야. 그나저나 좋은 받침대가 생겼군그래.”

나는 부인이 가져온 간식을 적당히 치운 다음 은쟁반을 실험대 위에 놓았다.

딱, 벌레가 기생한 머리통을 얹어 두기 적합한 크기였다.

“은쟁반에 잘린 머리의 조합이라. 세례 요한이 따로 없군.”

나는 왓슨의 감상을 무시하고 손을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쟁반 위에 올려놓고 약물 제조를 재개.

먼저 천남성의 열매를 빻고, 다음으로 아까 가져온 영약을 잘게 다져서―

“잠깐, 그건 뇌공등雷公藤이 아닌가! 그런 귀한 물건을 대체 어디서!”

“어디긴, 아까 영약원에 들렀지 않았나.”

“훔쳐 왔다고?!”

“길을 헤맨 적 없다고 말했을 텐데.”

영약원의 기관진식은 스승이 날 가둬 놓았던 것보다 훨씬 파훼하기 쉬워서 헤매는 쪽이 더 어려웠다.

아까 내가 경비원보다 앞서가다 왓슨의 시야에서 사라진 건 필요한 영약을 챙기기 위함이었지 길을 잃은 게 아니었다.

시체를 확인했을 때 이미 어느 영약을 가져갈지 정해두었던지라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럼, 사라진 영약의 목록을 만들라고 말한 건…….”

“상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목록을 달라 한 사람이 영약을 가져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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