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4화 (14/110)

014. 초대장 (2)

Welcome To The Ballroom (2)

절맥은 세월을 거치지 않고 은발을 가져온다.

-영국 속담-

* * *

다음 순간 왓슨이 재빨리 나와 거리를 벌렸다.

바퀴벌레를 방불케 하는 속도.

당황한 건 알겠는데 타고난 기품이 저 동작 탓에 물거품이 되어 아까울 따름이었다.

“허억, 허억…….”

다리의 컨디션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움직임을 보인 탓에 왓슨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심하게. 하녀는 장을 보러 나갔고 허드슨 부인은 1층에서 축음기로 음악을 틀어놓고 뜨개질을 하거든. 문도 아까 잠가 두었네.”

“…….”

왓슨은 한동안 경계하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끝내 체념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처음 만난 날부터. 그보다 일단은 자리에 앉게. 많이 당황한 모양이야, 역용술까지 풀린 걸 보니.”

내가 말하자 왓슨이 근처에 있던 거울을 보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아…….”

왓슨은 다시 소파에 그 작은 몸을 파묻었다.

이미 자포자기한 듯 가짜 수염도 떼어 낸 그 얼굴은 누가 봐도 묘령의 여인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숙녀의 나이만큼이나 민감한 비밀을 까발린 입장에서 할 소린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같이 이 하숙집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서로 비밀을 두는 건 영 좋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이 문제에 관해 미리 같이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왓슨이 품고 있는 폭탄을 해제할 수 없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얼추 짐작은 가거든.”

왓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희소한 증상이긴 해도 그 나이에 두발의 절반이 은색으로 물들었으니 답은 하나뿐이지.”

굳이 이것까지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구음절맥Nine Yin-Qi Nails을 앓고 있군.”

구음절맥은 강한 음기가 굵은 대못처럼 응고되어 기경팔맥을 틀어막는 특이한 체질로 이를 타고난 자들은 대부분 제 명에 못 살고 요절한다.

“의술을 배운 건 단명하는 체질을 어떻게든 고쳐 보기 위해서일 테고. 군에 입대한 건, 역시 부모의 뜻인가?

양기가 충만한 사내들 사이에서 지내는 쪽이 절맥증의 진행을 완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였겠지.”

왓슨은 한동안 벙 쪄 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방법이 없었네. 구음절맥을 치료하기 위해선 강력한 양기를 지닌 영약이 필요한데, 우리 집안은 그런 걸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았으니까.”

과연, 왓슨이 영약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이거였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나에 관해 그리 속속들이 알아냈는지 모르겠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뒷조사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평소처럼 관찰과 추리로 알아냈을 뿐이야.”

왓슨은 진짜 성별이 들통났는데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영국신사다운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나 역시 그녀를 이성이 아닌 동료로 보고 있으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하…… 말한 사람이 자네가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걸세.”

“영광이군.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도 좋네.”

예상했던 대로, 왓슨은 더는 내가 그녀를 지붕에 하룻밤 동안 방치한 일에 관해 추궁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을 노리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다음 화제로 넘어가야 하겠지만.

“그래서, 굳이 그 얘길 꺼낸 이유가 뭔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계속 모른 척해 줘도 좋았을 텐데.”

원망과 민망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나는 그녀를 조롱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 걸 밝혀야 했다.

“이유야 당연히 있지.”

“……내게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말하게.”

“맙소사. 방금 자네 입으로 나를 믿는다 하지 않았나.”

“농담도 못 알아듣는 남자일 줄은 몰랐네.”

왓슨은 제법 능청스럽게 대꾸하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나를 남자로 생각하고 대해 주게. 전부 이 저주받은 절맥증을 호전시키기 위함이니.”

“당연히 그럴 생각이야. 그래서, 내가 오늘 자네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한 이유는 말이지―”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 봉투를 꺼내 왓슨에게 건넸다.

“다름 아닌 이 초대장 때문이네.”

“이건…….”

왓슨은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에 든 초대장을 꺼내 확인한 순간, 그 얼굴에 물음표가 드리워졌다.

“가면무도회?”

“바로 그걸세Exactly.”

왓슨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도회는 갑자기 왜.”

“인장을 보면 알겠지만 자네가 들고 있는 건 웨넘호 얼음 회사Wenham Lake Ice Company가 후원하는 가면무도회의 초대장이야.”

“나도 들어는 봤다네. 각 문파와 명문가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사교계에 첫발을 디디는 자리가 아닌가.”

웨넘사와 왕립무학회가 후원하는 이 무도회는 각 문파와 세가의 후기지수가 모여 교류하고 배우자를 찾는 유서 깊은 자리.

용봉지회Debutante Ball라는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모임이었다.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호들갑인가.”

“초대장을 끝까지 읽어 보게.”

나는 여전히 의문 가득한 왓슨의 손에서 초대장을 빼앗아 그녀의 코앞에 갖다 댔다.

“……무도회장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인 남녀를 선정해 독각화망Unicorn Salamander의 내단을―”

왓슨은 다시 내 손에서 초대장을 낚아채 몇 번이고 마지막 줄을 반복해 읽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극양지물Ultimate Steroid일세.”

독각화망은 머리에 뿔이 달린 파충류 영물로 그 내단은 강력한 양기를 품고 있다.

즉, 무도회에 참석하면 왓슨이 그토록 원하던 영약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이걸 손에 넣으려면…….”

희망에 가득 찬 얼굴.

이걸 알게 된 이상, 분명 어려운 부탁을 해도 받아 줄 게 틀림없다.

“자네를 신사로서 대하겠다고 약속하자마자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미안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해해 주게.”

나는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왓슨의 두 눈을 주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 파트너가 되어 무도회에 나가 주지 않겠나.”

왓슨은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보고 용봉지회에 참석하라고? 자네의 파트너가 되어서?”

“바로 그렇다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나, 홈즈.”

“얼마든지.”

왓슨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의 성별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에 적잖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무도회라니, 태어나서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네.”

그게 아니라 난생처음 무도회에 가볼 생각에 긴장한 거였군.

다행이다. 여자라는 걸 들켰다고 대뜸 하숙집을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지.”

“……자네 어째 즐거워 보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세.”

혹시 몰라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담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답례품인 내단을 얻는다면 자네의 절맥증을 부분적으로나마 고칠 수 있을 거야.”

“그게…… 정말인가?”

왓슨은 아직도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무슨 심정인지는 이해가 갔다. 구음절맥의 치료는 단순히 양의 기운을 품은 영약만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절맥의 치료는 일반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운기를 필요로 하다보니 진기도인을 주도하는 자가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환자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왓슨은 의사다.

전문 분야가 의술이 아닌 내가 구음절맥에 관해 자신보다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해 봤자 믿기 힘들어할 테지.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Seeing Is Believing인 법.

직접 치료를 받으면 결국은 날 믿게 될 것이다.

“내가 자네의 목숨 갖고 농을 칠 사람으로 보이나.”

“음…….”

“맙소사. 여태껏 날 뭘로 생각한 건가.”

“안심하게,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니. 새삼스럽게도 자네의 지식이 깊고 폭이 넓다는 사실에 감탄했을 뿐이야.”

왓슨은 병원과 야전에서 의술을 갈고 닦은 뛰어난 의사지만 절맥증에 관한 지식이라면 런던에서 나와 견줄 자가 없다.

나는 140종에 달하는 담뱃재의 종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해에 절맥증에 관한 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초엔 절맥증의 발작으로 위장된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도 했고.

스승의 장서를 통해 얻은 지식에 실제로 왓슨을 치료한 경험이 더해진다면 절맥증이 완치될 즈음엔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네를 그리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려 주지 않겠나.”

“…민망한 이야기지만 군문에 든 이후로 드레스는 물론 여성복이라는 걸 입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일세.”

“아하. 거듭된 단련으로 인해 신체 치수가 변했을까 걱정하는 거로군.”

다분히 정상적인 고민거리였다.

신사 된 자로서 왓슨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키와 체구는 평균적인 런던의 숙녀들보다 작고 마른 축에 속하니 옷이 맞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쿵!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얼 그리 걱정하는 건가.”

“됐네. 자네에게 설명하느니 차라리 앓다 죽지.”

“앓다 죽다니, 그게 절맥증 환자가 할 소리인가.”

“그건…….”

왓슨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시리도록 흰 목덜미가 홍조를 띠고 있는 걸 보니 본인도 방금 한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린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치면 당분간 저 정도 되는 영약을 구할 방법은 없을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

왓슨의 절맥증 치료를 이유로 들긴 했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경우 용봉지회에서 얻을 수 있는 내단은 두 개.

그중 일부를 내가 복용하면 기억의 궁전魔腦宮에 잠든 힘을 되찾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회귀 전 해결한 사건이 런던무림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해 나와 왓슨을 위협하는지는 이미 겪어 본 바 있다.

이쪽 세상의 범죄자들이 무공을 사용하는 이상 놈들을 잡아 들이는 내가 더욱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여태껏 관찰한 바로는 이쪽 세상에선 사회적 지위와 무공의 고하가 비례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여왕 폐하가 화경의 고수인 것처럼.

물론, 이는 추측이고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지위가 낮아도 강인한 힘을 지닌 이가 있을 것이고, 반대로 신분이 높아도 무공을 다룰 수 없는 이 역시 존재할 터.

다만, 나는 런던의 치안 유지에 기여하는 자로서,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로서 최악의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만일 유럽 범죄계의 최고 거물이자 나의 숙적 제임스 모리어티 교수가 영향력에 걸맞은 힘을 지닌 절세고수라면.

과연 나는 지금 지닌 반쪽짜리 힘으로 그를 꺾을 수 있을까?

“귀한 기회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하지 않겠나. 내가 무도회에 참가하다니…….”

“무슨 심정인지는 이해가 가네.”

너무 강하게 권하면 왓슨에게 부담감을 줄지도 모른다.

며칠 기다리면 어련히 바른 판단을 내릴 거다.

만일 아니라면, 내가 이쪽 세상의 왓슨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홈즈, 무도회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네.”

왓슨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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