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5화 (15/110)

015. 백고

White Larva

정원에는 영약, 음식에는 향신료, 옷에는 야명주, 하늘에는 일월성신, 그리고 언어에는 구결이 있다.

-히브리 속담-

* * *

“뭐든 말해 보게. 우린 친구가 아닌가.”

“다름이 아니라, 내 무공 수련을 도와주었으면 한다네.”

“자네는 이미 육군 제식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내 성취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네. 저번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짐이 되는 건 사양이야.”

나는 고민했다.

바리츠는 일인전승의 비전무공,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함부로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기존에 익힌 초식을 보강하는 정도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조수인 왓슨이 강해지면 내게 도움이 될망정 나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게다가 곧 있을 용봉지회에서 최고 답례품으로 주어지는 영약은 모두 두 개.

내단이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 남녀에게 하나씩 주어지니까, 왓슨이 무도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해준다면 충분한 실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도 내가 하나는 확보할 수 있을 테지만 영약은 많을수록 좋은 법.

무엇보다 이러한 실리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왓슨이 적극적으로 날 돕길 원한다는 사실이 실로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알겠네. 탄지공을 즐겨 쓰진 않지만 몇 가지 유용한 조언 정도는 가능할 것 같군.”

“그럼 당장 오늘부터 부탁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고맙네, 홈즈!”

왓슨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처음엔 그녀가 구음절맥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의 길을 걷게 된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왓슨은 순수하게 무공 수련 그 자체를 즐기는 유형의 인간.

천상 무인이었다.

* * *

무골상학武骨相學과 유형무학類型武學 지식을 근거로 몇 가지 검사를 마친 결과 나는 왓슨이 훌륭한 무재武才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구음절맥이라는 불리한 체질을 지니고 있음에도 악착같이 쌓아 올린 그녀의 내공은 다른 군인과 비교해도 전혀 꿀릴 게 없었다.

고로, 내가 다듬어 주어야 하는 건 탄지공의 위력이 아닌 응용.

저번에 마주친 강시가 강기를 뿜어 대는 괴물이었을 뿐, 왓슨의 초식은 급소만 맞춘다면 일류 무인에게도 통할 수준이었다.

탄지공에서 파생된 여러 상승 초식을 익힌다면 다리가 불편해 경공을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더욱 강한 상대와 맞설 수 있으리라.

“그렇군. 위력을 조금 낮추더라도 급소에 여러 발 정확하게 지풍을 박아넣을 수 있다면 상대 입장에선 더욱 타격이 크겠어.”

“바로 그거지. 연사만 가능하다면 역으로 다른 급소 두 곳을 거의 동시에 공격할 수도 있고.”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땐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람은 환경에 영향받기 마련이니까.”

영국군은 언덕에 숨어 제자일 검법으로 멀리서 목숨을 노리는 저격검수들의 게릴라 전법을 상대로 고전을 강요당했다.

초기엔 일제사격으로 응했으나 공력을 낭비할수록 불리한 상황에 처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영국군은 반격할 기회가 주어질 때만 공력을 사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런던무림에서 비무, 생사결, 무림공적 제압 등의 싸움은 9할 9푼이 지근거리나 중거리에서 이루어진다.

즉, 왓슨은 50야드 떨어진 목표를 일격에 침묵시키는 초식보단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적을 유린하는 방식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실내 혹은 길거리에서 싸워야 하니까 군에 있을 때와는 다른 접근법을 택해야 하는 거로군.”

다행히 왓슨은 빠르게 내 가르침을 흡수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관찰력이나 추리력 등은 레스트레이드와 비슷한 정도에 그쳤지만 전쟁터에서 구르다 와서 실전 감각이 살아있었고 배운 걸 정확하게 실천하는 데에 특출난 소질이 있었다.

“접근한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지풍을 흩뿌리다니.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기억하게나. 산탄은 조준을 포기하고 위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관건이라네.”

대략적인 개념만 알려 주었는데도 곧잘 위력을 조절해 허공에 출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뿌듯해졌다.

그녀보다 뛰어난 두뇌와 기량을 지닌 나를 가르쳤던 스승은 이보다 더한 만족감을 느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감탄을 참고 살아온 걸까.

나 같은 천하의 기재를 가르치면서 기쁘거나 즐거운 티를 조금도 내지 않을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초인적인 평정심이다.

“훌륭하군. 이젠 익숙해지기만 하면 되겠어.”

“전부 자네 덕이야, 홈즈. 밤에 당직을 서는 동안에도 계속 연습하겠네!”

왓슨은 새로 익힌 무리武理가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병원으로 출근했다.

옥상에서 밤을 꼬박 새운 구음절맥 환자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미소였다.

“저런 구석은 또 닮았군.”

이쪽 세상의 왓슨이 무에 대해 품은 열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전 세계에서 함께 지내던 왓슨의 왕성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왓슨, 오늘 응급실 당직을 맡는다는데 피곤하진 않을까 걱정이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누누이 말하지만 런던무림은 미지의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대처하려면 나도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

“홈즈 씨, 1층에 손님이 오셨는데요?”

“올려보내 주시죠.”

때마침 도착한 모양이다.

왓슨이 있을 땐 부르기 껄끄러운 그 남자가.

* *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 앉은 건 언言이었다.

“조수 양반은 어디 갔나 보군.”

“출근했다네.”

“약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역시 의원이었나.”

아침에 호프의 시체와 그 안에 남은 시독의 잔여물을 정리한 그는 내가 부탁한 물건을 가져온 참이었다.

“간단히 요기라도 하면서 얘기 나누시죠.”

허드슨 부인이 갓 구운 마라샹궈 파이Si-Chuan Cottage Pie를 잘라서 한 조각씩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턱

포크와 나이프를 잡아야 하기에 양손을 비워야 했던 언은 들고 있던 합금 용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원통 모양의 용기는 주기적으로 달그락대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저 내용물을 식사를 마치자마자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만일 왓슨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혐오감에 몸서리쳤을 것 같다.

“이놈이 어지간히 식탐이 많아서 말이야. 어미를 닮아서인지 독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군.”

언은 멋쩍게 웃으며 길게 땋은 머리를 매만졌다.

“어떤 생물이든 성장기엔 대량의 영양이 필요해지는 법이지.”

그렇다. 언이 가져온 건 당분간 하숙집에서 함께 지내게 될 새로운 룸메이트.

보아하니 파이의 마라맛 소스에 든 캡사이신과 산초에 포함된 다가 불포화 지방산 아마이드류 화합물의 향기에 취해 용기 안에서 몸을 비벼대는 모양이다.

물론, 사람이 먹는 음식을 줄 생각은 없다.

우린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라샹궈 파이 한 접시와 철혈관음Bloody Mary차가 담긴 티포트를 깔끔하게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어떤가, 허드슨 부인의 솜씨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니 가히 완벽한 외강내유Crispy Outside, Juicy Inside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군. 화자오花椒를 조금만 더 넣었다면 완벽했을 거야.”

“나는 아직도 혀가 얼얼한데. 자네는 허구한 날 독극물만 먹어 대서 그런지 입맛이 퍽 자극적이군.”

“독은 상관없어. 진주언가辰州言家의 실험체가 죄다 미각이 둔해서 그래.”

꽤 흥미로운 정보였다.

“활강시의 특징 같은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풍기는 느낌에 한해 이야기하자면 언은 고와 공생하며 살아가는 산송장처럼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정체를 숨긴 활강시에게 자극적인 메뉴를 먹이고 반응을 확인할 일이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다만.

이미 한 번 고독대선蠱毒大仙 프랑켄슈타인이 런던에 벌레를 풀어놓은 걸 확인한 이상 방심할 수는 없다.

다음엔 고가 조종하는 시체가 아니라 언처럼 벌레와 공생 중인 활강시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연관된 정보는 최대한 모아 두는 게 좋겠지.

물론, 정보도 정보지만 앞으론 놈들이 다루는 그 끔찍한 시독에 대처해야만 한다.

언을 집으로 부른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슬슬 선물을 확인해 보고 싶은데.”

“제일 팔팔한 놈을 골라왔으니 안심하라고.”

우린 길가 반대편을 향해 난 창가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다음 조심스럽게 용기를 열었다.

키우던 묘목 위에 씌운 유리돔을 벗기자 언이 합금 용기안에 들어있던 생물을 화분의 흙 위에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끼익

하찮은 소리를 발하며 인사하듯 몸뚱이의 절반을 들어 올린 건 한 마리의 고蠱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의 가슴팍에 달린 큼지막한 벌레가 무성생식으로 낳은 알에서 우화한 유충.

“시독을 먹인 다음 일다경 정도 기다렸는데 크기가 세 배는 불어 있더군.”

“굉장한 성장 속도가 아닌가. 그보다, 내가 백고White Larva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어.”

“양질의 독을 구해 준 보답이야. 그리고 자네 덕에 그 빌어먹을 악마 자식의 단초를 얻었으니까.”

백고白蠱는 진주언가의 비보라 불리는 영물로 역사상 단 한 번도 외부인이 손에 넣은 적이 없었다.

앞으로 프랑켄슈타인과 싸우게 될 경우를 대비해 언에게 한 마리 얻어갈 수 있을지 물었는데 정말로 갖다 줄 줄이야.

순종적인 실험체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 언이었기에 내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 풀려서 다행이다.

“이번 사건을 본가에 보고할 생각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 본가에 더해 모던파에게도 알릴 생각이야. 고독대선을 혐오해 마지않는 자들이니 분명 쌍심지를 켜고 추적을 시작하겠지.”

아무리 자신의 출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해도 그는 언가의 일원.

그가 가문을 향해 품은 감정은 증오가 아닌 애증이었고, 그 뿌리는 강렬한 자부심이었다.

스스로 실험체가 되어서까지 가문 비전의 개량에 이바지하려 한 언으로선 강시술을 범죄에 악용하는 프랑켄슈타인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첼름스퍼드辰州에는 전서구를 보냈네. 조만간 본가의 어르신이 자네를 찾아올지도 몰라.”

과거 강시가 광산과 염전 등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되던 시절엔 언의 집안과 모던파 모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놈이 유럽 각지에서 몇 번인가 혈겁을 일으킨 이후로 강시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강시술을 특기로 삼는 세가와 문파가 프랑켄슈타인을 증오해 마지않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언가의 장로가 여기서 백고를 키우는 걸 보면 자네가 곤란해질 텐데.”

“이미 수십 번은 죽었다 살아난 몸인데 그런 걸 두려워하겠나.”

“혹시 모르니 잘 감춰 두겠네.”

“……나야 자네가 협조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지.”

불사에 가까운 몸이지만 가문의 장로Elder는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집안의 비보를 여러 마리 새끼 친 것도 모자라 남에게 나눠줬으니 걸리면 무사하지 못할 테지.

“지속적으로 독을 구해 먹이면 조만간 자네가 원하는 걸 뱉어낼 거야.”

백고는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대체 심장으로 사용해 활강시를 만드는 외에도 다양한 용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같은 종류의 독극물을 여러 번 먹이면 그 독에 내성을 갖게 해 주는 맞춤형 해독단을 빚어 토해 낸다든지.

“시독도 해독할 수 있다고 했지?”

“고와 하나가 된 내가 시독을 먹고 금방 살아난 걸 보니 문제는 없을 걸세.”

“다행이군.”

“헌데, 그 녀석은 갓 태어난 놈이라 해독단을 만드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거다. 워낙에 끔찍한 독이어야지.”

“어느 정도로 예상하나.”

“그건 나도 모르겠군. 기다리는 동안 다른 독을 먹여도 문제는 없어. 백고는 해독단 여러 개를 동시에 만들 수 있거든. 잘 활용해 보라고.”

나는 고에게 어떤 독부터 먹일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협조는 잊지 않겠네.”

“그래. 또 내게 줄 특이한 독을 찾으면 알려 달라고. 새끼한테만 먹일 생각일랑 말고.”

용무를 마친 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독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남자, 인가…….”

당가唐家의 여인을 반려로 삼는다면 백년해로Happily Ever After하겠군.

어쨌든, 이로서 독공 사용자와 싸우는 데 필요한 물건이 손에 들어왔다.

백고의 도움이 있다면 언젠가 고독대선과 마주치더라도 시독에 당해 빌빌대는 일은 없겠지.

“기왕 구해 온 거, 이것저것 먹여 봐야겠군.”

이 기회에 백고를 활용해 여러 까다롭고 치명적인 독극물에 내성을 길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철컥

나는 곧바로 약물을 보관해둔 상자를 열어 백고에게 먹일 독극물을 엄선하기 시작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왓슨이 보면 기겁할 테니 일단은 내 침실에서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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