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가면무도회 (1)
Who Knows Who (1)
무림인에게 가면을 주어라. 진실을 말할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
* * *
내 지도를 받고 실력이 빠르게 늘어난 사실에 만족한 걸까.
이틀에 걸친 집요한 설득 끝에 왓슨은 무도회 참석을 결심했다.
“자네가 내 수명을 그렇게까지 걱정해 주는데 당사자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승낙해 주어 고맙네. 그리고, 몇 번인가 말했지만 나 역시 자네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이해해 주게.”
“그건 또 무슨 뜻인가.”
“…….”
부끄러운 과거를 밝혀야 했기에 내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초대장은 내가 어딨든 매년 봄마다 배송되고 있다네. 벌써 올해가 6년째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한 왓슨의 눈썹이 한껏 위로 올라갔다.
“스물두 살엔 이미 후기지수로 꼽히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뭐, 그런 셈이지. 초대장이 오는 건 스승의 명성 때문이었지만.”
용봉지회Debutante Ball의 또 다른 이름은 U-35 인비테이셔널.
즉, 35세 이하의 후기지수에게만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 무도회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무도회장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연령의 상한선.
런던의 호사가들은 무도회에 처음으로 참석한 이들의 나이를 보고 그 잠재력에 관해 떠드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왕실 어용 문파 인가증Royal Warrant을 보유한 거대 문파의 진인이나 속가제자, 혹은 세가의 기린아들은 보통 스물넷이 되기 전에 용봉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올해로 스물여덟이 되는 나는 무도회에서 나이를 들킨 순간 무시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홈즈. 자네 설마 여태껏 용봉지회에 참가하지 않은 건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나?”
“믿을 수 없군. 날 그런 놈으로 생각하다니. 그동안 초대에 응하지 않은 건 단순히 내가 모임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일세.”
거짓말은 아니었다.
최소한 3년차까진, 난 계속해서 불참의사를 표했으니까.
다만, 4년차부턴 참가하고 싶어도 파트너를 구할 수 없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스승을 껄끄러워했기 때문이고.
둘째, 같은 문파에서 파트너를 찾으려 해도 몇 없는 스승의 제자 중 나와 신분이 비슷한 숙녀가 없었고.
셋째, 내가 먼저 레이디에게 용봉지회에 같이 가자고 청하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큼은 입이 찢어져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왓슨이 알았다간 두고두고 놀려 먹을 테니까.
이번만큼은 왓슨의 건강을 고려해 이타심 하나로 참석을 결심했으니 왓슨은 내게 그래선 안 된다. 그래. 안 되고말고.
“그래도 이미 대여섯 번 결석한 사람에게 꾸준히 초대장이 오는 걸 보면 사부 되시는 분께서 영향력이 대단하신 모양이야.”
“글쎄. 큰 영향력은 없는 거로 아네. 옛날에 사부에게 패한 문파 장문인들이 자신들의 제자를 나와 겨루게 할 생각이겠지.”
물론, 그들의 제자는 스승이 옛날에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진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그러고 보니 자네의 사부가 누군지 아직 듣지 못했군. 분명 강호에 명성이 널리 알려진 고수일 텐데.”
왓슨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에 관한 일이라곤 떠올리기도 싫군. 아직도 나와 마이크로프트가 그자의 수련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마이크로프트?”
“나의 친형이라네.”
“처음이군. 자네가 형제 얘길 하는 건.”
“피가 이어졌을 뿐이지 안 본 지 오래일세. 노파심에 말해두는 건데 그 양반하곤 어떤 방식으로든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쪽 세상에서도 마이크로프트는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그 남자가 왓슨과 마주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과연 내 마음대로 될까.
“그래도 형제와 함께 어릴 적부터 무공을 익히는 건 좋은 추억이 틀림없어. 나도 같은 경험이 있거든.”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을 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왓슨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네도 형제가 있나?”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럼. 무척 사이가 좋았지.”
“…….”
무언가가 이상하다.
내가 기억하기로 회귀하기 전 왓슨은 그의 형 헨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가 술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곤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쪽 세상에서도 처음 왓슨을 만난 날 그녀의 회중시계 뒷면에 헨리의 이름이 적혀 있던 걸 본 기억이 있다.
정확히는 전당포 주인이 물건을 맡긴 사람의 이니셜을 새긴 흔적이었다.
원래 살던 세계에서 봤던 것과 달리 ‘존 왓슨’의 이름도 새겨져 있던 게 의외였긴 했다만.
이쪽 세상에서도 성별만 바뀌었을 뿐 같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왓슨이 어릴 적 형제와 같이 무공을 수련한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다니.
내가 아는 왓슨과 헨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 직감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내게 오라버니가 둘이나 있다는 걸 아직 말하지 않았군.”
“……오라버니가 둘?”
어떻게 된 일일까.
왓슨에겐 형제가 한 명밖에 없었을 텐데.
“자네와 나는 조금 닮았을지도 몰라. 특히나 둘 다 장남을 혐오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왓슨은 얕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맏이인 헨리는 나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어.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는 달라. 내게 무척이나 상냥했거든.”
“잠시만, 왓슨.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나.”
“응?”
“자네의 이름, 존 왓슨이 아니었나?”
내가 묻자, 그녀는 토끼처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가명이지. 내 이름은 제인. 제인 왓슨일세.”
“그럼 존은 대체―”
“방금 말한 둘째 오라버니가 존 왓슨일세. 우린 이란성 쌍둥이거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존은…… 존은 어디에 있나!”
“오래전 홀연히 사라진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네. 헨리의 유품에 자기 이름을 새긴 것 말곤 아무 단초도 남기지 않았어.”
“……?!”
나는 그제야 회중시계 뒷면에 새겨진 두 이니셜의 필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처음엔 단순히 전당포 주인과 여기 있는 왓슨 본인이 새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괜찮다면 그 유품, 잠시 살펴봐도 되겠나.”
“자네가 원한다면야.”
왓슨은 테이블 서랍을 열어 회중시계를 꺼내 내게 건넸다.
[J. W.]
저번에 보았던대로 존 왓슨의 이니셜은 내가 아는 사내의 필적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나는 이쪽 세상의 왓슨, 그러니까 제인 왓슨의 필체를 몰랐기에 계속 그 머릿글자를 제인이 새긴 것인 줄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고맙네. 왓슨. 나는 진심으로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다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나중에…… 언젠가 반드시 자네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겠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복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두운 바다에 한 줄기 불빛을 발견한 인간이 느끼는 감격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찾아내겠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왓슨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이쪽 세상에서도 존 왓슨은, 나의 유일한 벗은 존재했으며.
나는 단 하나의 흔적을 실마리 삼아 그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 * *
2주 후.
베이커가에 저녁노을이 드리운 즈음, 우린 지정된 복장과 가면을 착용하고 무도회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번 무도회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나의 친구 존 왓슨이 여자로 변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쪽 세상에서도 무사히 살아있었다니.
그를 찾아내기 위해선 단초가 필요하다.
여동생인 제인 왓슨의 절맥증을 고치고 함께 지내다 보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왓슨의 소중한 쌍둥이 동생을 죽게 내버려 두는 선택지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이번 무도회에서 독각화망의 내단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각오는 되었나, 왓슨.”
“내단이 걸려 있는데 방법이 있나. 최대한 노력해 보겠네.”
나는 하얀 셔츠와 조끼에 보타이와 연미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낀 흰 장갑의 감촉이 낯설었다.
한편 왓슨은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어깨를 가린 숄을 굳게 움켜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뭘 그리 긴장하고 있나.”
“이런 옷을 입는 건 처음이라서…….”
역용술을 해제한 왓슨은 평소보다 한층 가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수줍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안심하게. 잘 어울리고 있으니.”
그녀가 의상실에서 빌려온 건 밑단에 가까워질수록 넓어지는 종 모양의 고어드 스커트였다.
평소 밑단이 바닥에 끌리더라도 고리를 사용해 고정하면 움직일 때 걸리적거리지 않는 실용적인 옷.
상체를 감싼 화사한 색의 이브닝 드레스는 소매가 짧고 로우컷 넥라인으로 재단된 것으로 몸의 라인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발과 은발이 섞인 머리카락은 리본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의사답게 손재주가 좋아 실루엣이 인상적이었다.
마무리는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과 부채였는데, 이것 또한 왓슨의 차분한 분위기와 근사하게 어울렸다.
“역용술을 풀고 다니도록 권할 생각은 없네만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것도 멋스럽군그래.”
“그렇게 말하는 자네야말로 평소에도 연미복을 입고 다니는 게 어떤가. 깔끔하고 신사답게.”
우린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허드슨 부인과 하녀에게 왓슨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들킬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제 미리 부인에게 노리치Norwich 행 2등석 열차표를 두 장 선물한 까닭이었다.
지금쯤 그녀는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33 리그 떨어진 도시의 호텔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1층 문 앞에는 약속대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가 문을 열자 나는 익살스럽게 손으로 내부 좌석을 가리켰다.
“레이디 퍼스트.”
“……오늘만이네.”
내가 자꾸 놀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왓슨이 콧김을 내뿜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세인트 제임스 스퀘어로 가주게.”
“알겠습니다, 나으리.”
마차는 채 15분도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킹 스트리트에 우릴 데려다주었다.
이 거리는 한때 일등 신랑감으로 취급되던 동인도 회사 관계자들의 전용 클럽과 크리스티 경매장 등이 있어 런던의 상류층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유명했다.
물론 동인도 회사가 망한 이후론 그 위상도 예전과는 달라졌지만.
“여기가 바로 올맥의 그…….”
마차에서 내린 왓슨은 무도회장이 열리는 건물을 보자마자 짤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베네치아 건축가의 설계에서 영감을 얻은 팔라디안 양식의 건물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올해 용봉지회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이곳, 윌리스 룸Willis’s Room.
런던 최고의 사교 클럽 올맥Almack’s의 무도회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각오하게. 이 앞은, 말 그대로 사교장을 가장한 전쟁터니까.”
“운이 따라주면 좋겠군…….”
“요행에 의지하는 도박꾼이 살아남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게.”
저 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화려하게 치장된 무림인들의 전쟁터.
출입문으로 향하기 전 왓슨에게 경고를 마친 나는 곧바로 가면을 뒤집어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호출도Brexit를 시작한 시절의 스승이 착용했던, 천마天魔의 가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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