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7화 (17/110)

017. 가면무도회 (2)

Who Knows Who (2)

희망으로 사는 자는 음악이 없어도 검무를 춘다.

-영국 속담-

* * *

“셜록 홈즈 님과 파트너인 제인 왓슨 님이시군요. 초대장을 확인하였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응접실에서 초대장을 제시한 우린 외투를 맡긴 다음 급사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이동했다.

무도회장으로 이어진 복도에 들어서기 전, 왓슨과 나는 각각 반으로 접힌 카드를 하나씩 받았다.

카드에는 손목에 걸 수 있도록 실과 작은 펜이 달려 있었다.

회귀 전에 살던 세상에선 무도회에 참석한 레이디에게만 지급되던 ‘댄스 카드’와 흡사한 물건.

그날 연주될 곡목 옆에 춤을 약속한 파트너의 이름을 적는 칸이 있는 댄스 카드처럼 다른 참석자의 이름을 적는 용도였다.

물론, 오늘 같은 가면무도회에선 이름을 밝힐 수 없으니 별호를 적어야 하지만.

[1881 춘계 용봉지회]

[U-35 Spring Invitational 1881]

“디자인에 상당히 공을 들였군그래.”

왓슨은 불새의 날개를 본뜬 카드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계속 그 말투로 얘기할 생각인가, 자네는.”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라네.”

왓슨은 헛기침하더니 허리를 쭉 펴고 고아한 숙녀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평소 내게 보이는 신사의 모습이 연기고 이쪽이 진짜 왓슨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별개로 확실히 이 카드는 자네 말대로 아름답군. 공예품이라고 불러도 되겠어.”

조금 전에 왓슨이 말한 대로 카드는 상당히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었다.

테두리에 두른 금박부터 시작해 줄의 재질, 그리고 종이에서 나는 향기까지.

초대장과 카드에서 주최자의 지위와 재력을 판단할 수 있는 건 이쪽 세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쿵

짧은 복도 끝에 있던 문이 열리자 나는 무도회를 연 두 집단의 위엄을 본격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전성기엔 수백 명의 상류층 남녀가 자리를 빛냈을 윌리스의 무도회장 내부는 실로 경이로웠다.

아름다운 천장화와 샹들리에, 금박과 예술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벽.

무도회장 곳곳에는 거대한 거울이 설치되어 있어 가뜩이나 거대한 공간의 면적을 더욱 부풀려 보이게 만들고 있었고, 바닥 역시 거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닦여 있었다.

미리 도착해 가면을 쓰고 담소를 나누는 젊은 신사숙녀武林人들 사이에는 웨넘사가 준비한 조각상이 받침대와 함께 세워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맑고 투명한 얼음을 정교한 솜씨로 가공해 만든 물건이라 감탄이 나왔다.

“무도회의 답례품이 저기 보이는군.”

내가 단상을 가리키자 왓슨이 재빨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리 케이스에 담긴 독각화망의 내단 두 개를 비롯해 다양한 답례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억만펜스Pence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물건들로 참석자들에게 차등지급될 예정이다.

“용봉지회,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치의 끝을 달리는 사교장을 둘러본 왓슨이 짧게 소감을 늘어놓았다.

북해빙궁에게 지위를 위협받곤 있다 해도 웨넘은 런던의 상류층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얼음 판매 회사다.

그리고 공동으로 무도회를 개최한 왕립무학회Royal Combat Society 역시 대영제국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두 집단 중 하나.

웨넘사는 사치품인 얼음을 사줄 고객들에게 브랜드 이름을 각인하기 위해 무도회를 후원했지만 왕립무학회의 고수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용봉지회는 표면상으론 젊은 무인들과 그들이 속한 문파나 세가가 교류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버킹엄에서 열릴 궁정 무도회에 참석할 인재를 뽑는 시험대이기도 했기에.

“……귀빈석에 모여 있는 건 죄다 고수뿐이군.”

나는 무심코 2층에서 툭 튀어나온 발코니에 앉아 있는 이들을 올려다보았는데 그들이 두른 기세가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저중 상당수가 왕립무학회의 정회원.

오늘 모인 후기지수 중 성취가 뛰어난 이들을 골라내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한편, 그들보다 무공의 성취가 낮아 보이는 이들은 각 문파와 명문가에서 파견된 샤프롱Chaperon으로 짐작되었다.

샤프롱은 각 문파와 명문가가 보낸 감시자로 각자가 지도를 맡은 후기지수를 주시하며 상황에 따라 조언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왕립무학회 정회원보다 공력이야 낮을진 몰라도 모두가 문파나 세가의 호법이나 장로로 절대 얕보아도 될 위인이 아니었다.

지금도 저들은 무도회장에 입장하는 사람들을 뛰어난 안법으로 지켜보며 끊임없이 무림초출의 후학Debutante들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런. 벌써 알아본 사람이 있군.”

그때였다.

나의 기감이 다수의 날카로운 살기를 포착한 건.

-찌릿

바늘이 턱시도를 뚫고 피부에 박히는 것만 같은 감각.

2층의 귀빈 몇몇이 내게 과할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자네가 쓴 가면, 상당히 시선을 끌고 있군.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

“무시하게. 굳이 반응할 필요는 없어.”

보아하니 2층에 있는 이들 중에 과거 스승에게 얻어맞은 사람의 수가 꽤 되는 모양이다.

심지어 그들이 노골적으로 내게 시선을 던지는 통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마저 호기심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겠나, 다 스승의 업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실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짓궂은 우리 스승께서 용봉지회에 참가할 때 꼭 이 가면을 쓰라고 강요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중압감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수년 전 바리츠의 새로운 초식을 하나 배우는 것을 대가로 용봉지회에서 가면을 쓰겠노라고 스승에게 약조한 게 실수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피곤해지겠군.”

나는 머지않아 다가올 미래에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스마트하게 왓슨을 에스코트해 벽 쪽의 소파로 안내했다.

“칵테일은 어떠십니까.”

“사양하겠네.”

급사가 역시나 웨넘사의 얼음을 사용한 칵테일을 가져왔지만 나도, 왓슨도 그것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상황에서 알코올을 몸에 들이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시계가 8시 반을 가리킬 무렵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주최자인 웨넘사 대표가 벽 한쪽에 마련된 강단에 서자 용봉지회 참석자의 숫자에 비해 과도하게 넓은 홀을 채우고 있던 소음이 멎었다.

“사해동도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께 인사 올립니다! 소생은 웨넘 레이크 아이스 컴퍼니의 대표인 아무개이올시다! 수련에 매진하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귀한 시간을 쪼개 왕림하신 것을 진심으로―”

사자후의 묘리가 깃든 미국인의 요란한 인사에 순식간에 청중의 이목이 쏠렸다.

이 자리가 가면무도회인 만큼 사내는 직접 자신과 귀빈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후기지수들은 용봉지회 참석에 앞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을 테니 굳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개회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최자의 인사는 짧게 끝났고 곧바로 장식 뒤에 숨은 악단이 지휘자의 지시로 튜닝을 시작했다.

“어떤가, 왓슨. 한 곡 추지 않겠나.”

“……첫 곡은 에스코트한 사람과 함께하는 게 강호의 도리Etiquette니 어쩔 수 없군.”

우린 다른 소파에서 일어나 플로어로 향하는 참석자의 무리에 합류했다.

제각기 둘씩 짝을 이룬 후기지수들이 자리를 잡은 직후, 무도회장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급사가 들이닥쳤다.

“첫 곡이 끝나면 다시 회수하러 오겠습니다.”

우리가 나눠 받은 건 짧은 목검이었다.

“준비됐나, 왓슨?”

“물론이네, 홈즈.”

검이 분배된 걸 확인한 주최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첫 곡은 유행하는 오페라의 아리아를 이어붙인 메들리.

우리는 네 박자의 음악에 맞춰 쿼드릴 검무Quadrille를 추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말게.”

“자네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단순히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 둘을 포함해 플로어에 있는 모두가 매의 눈으로 서로를 관찰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용봉지회의 첫 검무는 어디까지나 다른 후기지수의 신법과 보법 등을 확인하는 탐색전.

본격적인 승부는 첫 곡이 끝난 다음부터 시작된다.

“12시 방향, 보이는가. 보법Step이 엉망이야. 영약으로 내공만 쌓았지 실전경험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오른손잡이로 보이니 시작 직후 왼발 발등을 노리게. 충분히 탄지공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걸세. 기동력을 잃으면 자유롭게 요리할 수 있겠지.”

“대단한 안법이군. 참고하겠네.”

왓슨은 불편한 쪽의 다리에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움직이며 대답했다.

“이따 곡이 끝나면 평소보다 과하게 다리를 절어 약점을 드러내 보게. 분명히 덤벼들 거야.”

“그건 신사로서 해선 안 되는 비겁한 행동이 아닌가.”

“벌써 잊었는가, 왓슨. 자네는 오늘 신사가 아닌 숙녀로서 참석했다네.”

“하긴. 내단이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군.”

나는 왓슨에게 조언하는 틈틈이 플로어를 누비며 가면 쓴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과연, 어릴 적부터 영약을 복용하며 훈련을 쌓아 온 이들이라 그런지 외모가 빼어난 건 물론 단순한 동작에서도 수련의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호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유행이 지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 느껴지는 기도는 그리 고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평범해 보일 정도다.

나는 왓슨과 검무를 추며 다가가 여인의 드레스를 관찰하다 사각에서 목검을 뻗어 옷에 묻은 먼지를 낚아채는 데에 성공했다.

‘하얀 앙고라 고양이가 하나. 각각 털의 색이 다른 보더콜리가 둘…….’

칼끝으로 건져온 건 여인이 기르는 동물의 털.

목검에 가볍게 공력을 흘려보내자 검과 닿은 털이 희미하게 빛나며 예상했던 반응이 나타났다.

“그래. 귀하신 분이 누추한 곳에 오셨군.”

“뭐가 그리 즐거운 건가, 홈즈.”

“별거 아닐세.”

여인의 정체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굳이 이걸 왓슨에게 알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재밌어지는걸.”

플로어를 돌며 64명에 이르는 참석자들의 실력을 얼추 파악한 즈음 음악이 멈췄고 나와 왓슨은 박자에 맞춰 정중히 서로에게 검례를 취했다.

“그럼, 건투를 비네.”

“마지막 곡,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군.”

격려가 오간 직후, 우린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왓슨은 이미 다리를 질질 끌며 첫 번째 희생양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연기력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상대가 멍청해 보이니 미끼를 물겠지.

“이쪽도 슬슬 시작해 볼까.”

굳이 왓슨처럼 상대를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내가 원래 살던 세상에선 남성이 여성을 찾아가 댄스 카드에 이름을 적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쪽 세상의 규칙은 조금 달랐으니까.

예상대로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무도회의 진행 순서가 적힌 카드를 읽는 척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한 무리의 숙녀들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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