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가면무도회 (3)
Who Knows Who (3)
사람은 비무대를 세우고 신은 승패를 가른다.
-오래된 금언-
* * *
“거기 계신 소협, 다음 곡은 저와 함께 해주시겠어요?”
“아니됩니다. 소녀가 먼저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레이디께서 별 볼 일 없는 한량에게 관심을 베푸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2층 귀빈석을 올려다보았다.
예상대로 샤프롱 중 여럿이 날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과거 저들의 문파에게 치욕을 안긴 괴인의 제자다.
그들이 후기지수를 보내 날 짓밟으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레이디가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주위를 에워싼 열댓 명의 숙녀 중 가장 강렬한 투지를 감춘 이를 상대로 골랐다.
“그럼, ‘몇 번’에서 뵐까요?”
“4번 연무대가 좋겠군요. 가장 가깝잖아요.”
우린 서로의 카드에 별호를 적었다.
날 찾아온 금발의 숙녀는 펜을 놀리는 동안 상당히 들떠 있었다. 아무래도 갓 얻은 별호를 남에게 처음 선보이느라 신이 난 모양이었다.
5분의 유예시간이 끝나자 주최자가 신호를 보냈다.
급사들이 얼음 조각상을 치우자 기관이 작동하며 텅 빈 플로어 곳곳에서 정사각형의 비무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고고고고!
드러나기 시작한 가면무도회假面武道會의 진면모.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진정한 목적은 단순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문파와 가문의 이성과 무를 견주며 경험을 쌓고 친목을 다지는 것.
평소 비슷한 수준의 동성 무인과의 비무가 권장되는 대영제국에서 남녀가 생사결 외의 방식으로 대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리가 바로 이 모임이었다.
첫 곡에 맞춰 추는 검무는 아까도 말했듯이 탐색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승부가 시작되는 건 두 번째 곡부터.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비무.
결승에 진출한 두 사람만이 독각화망의 내단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시작인가.”
용봉지회의 규칙은 두 가지.
첫째. 자신이 패배할 때까지 시합에서 승리한 이들 중 이성을 선택해 비무를 청하는 것.
성별이 같은 이와 대결하는 건 싸울 수 있는 이성이 모두 탈락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둘째. 생사결이 아니므로 비무 상대를 죽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가면으로 서로의 얼굴과 신분을 감추고,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는 남녀의 대결.
“4번 링擂台을 선택한 후기지수는 앞으로 나오시오.”
나는 주최자의 지시에 따라 벽에 세워 둔 천마장을 들고 연무대에 올랐다.
맞은편에선 조금 전 내 카드에 이름을 적은 여인이 검을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소협에게 원한은 없으나, 스승님께서 반드시 대를 끊어 놓으라 하시더군요. 목숨을 취할 생각은 없으니 원망하지 마시길.”
“……사부가 예전에 실례를 범한 모양이군요. 여협께선 부디 손속에 자비를 두셨으면 합니다.”
저기 숙녀분의 스승이 여자라면 사부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테고, 남자라면 비무 중에 급소를 걷어차인 게 분명하다.
다만, 왜 그 원한이 내게 향하는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좌제는 사양인데.
“소녀는 최선을 다해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부디 각오하시길.”
“강호의 은원엔 끝이 없다더니…….”
가면무도회인 만큼 일반적인 비무처럼 자신의 이름과 사용하는 무공을 밝힐 필요는 없다.
우린 심판을 맡은 급사에게 카드를 건네고 장갑을 벗었다.
모든 참석자가 기수식을 취하자 1번 링부터 차례차례 후기지수Debutante들의 별호가 호명되기 시작했다.
“4번 링! 동쪽 코너 사살금두Killer Blonde!! 서쪽 코너 소천마小天魔!”
……물론 내 경우는 싫다는 걸 스승이 억지로 지어준 거지만.
“비무 준비Duel Stanby!!”
어쨌든 이 이름을 등에 짊어진 이상, 내게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개시Duel!!!”
“타아아압!!!”
주최자가 신호를 내리기 무섭게 연주가 시작되었고, 여인은 트럼펫 연주자의 트릴보다 빠른 속도로 돌진했다.
오소독스한 무당파Wu-Tang Clan의 태극검.
나는 검을 뽑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바리츠, 베어 너클裸拳式―”
사선 방향으로 운신. 검로는 나를 비껴간다.
반응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간격을 속임으로써 적을 제압하는 후의 선.
예정된 위치에서 정지한 채 기다린 주먹에 상대의 몸이 다가와 닿은 순간, 예비 동작 없이 전신의 협응을 통해 촌경을 쏘아 냈다.
“정권Straight.”
-콰아앙!!
상대의 출수를 방해하는 일 없이 정중히 초식으로 응하는 신사적인 일격Counter.
족히 수십 야드는 날아가 무도회장 기둥에 처박힌 사살금두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왓슨이 잘하고 있는지 보러 가야겠군.”
무도회Tournament 본선 1차 탈락자에게 주어지는 멸칭.
벽의 꽃Wallflower 한 송이가 활짝 핀 순간이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왓슨은 두 번째 곡이 시작되고 채 40초가 지나지 않아 상대를 꺾는 데에 성공했다.
상대는 다리가 불편한 왓슨이 지팡이를 짚고 링擂台에 오르자 삼초三招를 양보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반적으로 후기지수 간에 이뤄지는 비무Duel에서 이 정도로 여유를 부리는 건 광오하다는 소릴 들을 법도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상대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니 오히려 삼초를 양보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욕을 먹을 상황.
결과, 왓슨은 며칠 동안 내 지도편달을 받아 완성한 초식을 곧바로 써먹을 수 있었다.
“공자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왓슨은 한쪽 무릎을 꿇는 기사서임세騎士敍任勢Position Of Appointment를 취했다.
흔히 슬사세膝射勢나 무릎 쏴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며 특정 초식을 준비할 때만 취하는 자세였다.
하지만 왓슨이 몸을 낮추고 지팡이를 견착肩着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가 출신 소공자께선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앞서 왓슨에게 말했듯이, 그가 기초 훈련을 게을리 한 데에다 실전 경험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 제식 무공Army’s Drill―”
삼초를 양보하겠다 말해 버린 탓에 사내는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내력을 끌어올려 급소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허나 왓슨이 노린 건 그가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한 부위였다.
“탄환지彈丸指, 연사소총Martini-Henry.”
손가락에 집중된 공력은 지팡이 손잡이를 통과해 막대에 뚫린 구멍 안에서 압축되었다.
완성된 지공指功은 앞으로 나아가며 지팡이 안에 파인 나선형 홈을 따라 고속으로 회전, 이내 소리의 벽을 부수며 사출되었다.
-타탕!
왓슨이 사용한 건 아미파E-mei Clan의 탄금지彈琴指에 뿌리를 둔 육군 제식 무공으로 여러 발의 탄지공을 연달아 쏘아 내는 초식이었다.
“흐아악!”
사내의 비명과 지공이 발사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려 퍼졌다.
왼발 발등과 엄지발가락의 뼈가 동시에 골절.
힘없이 쓰러진 상대에게 다가간 왓슨은 재빨리 은침으로 혈도를 찔러 움직임을 봉했다.
“승자, 군필의희軍畢醫姬!!”
한순간에 정해진 승부. 심판을 맡은 급사가 비무의 승자를 발표했다.
“이번 무도회는 정말로 자네 덕을 크게 보는군.”
씩씩하게 경례까지 마치고 링에서 내려오는 왓슨은 기분 좋게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근데, 꼭 별호가 이랬어야 했나. 군필의희는 조금…….”
“군필의희가 어때서.”
“아무리 미혼이라 해도 이 나이에 ‘희’자가 붙는 별호로 불리는 건 부끄러워서 말이지. 군필여의생Discharged Lady Doctor으로 바꾸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세.”
“원래 별호는 남이 지어 주는 대로 만족해야 하는 법이지. 불만이 있으면 비무Duel로 정하면 어떤가. 왼손만 쓰겠다고 약조하겠네.”
왓슨은 벽에 처박힌 채 늘어진 사살금두Killer Blonde와 나를 번갈아 본 다음 고개를 저었다.
“됐네. 자네는 양손잡이지 않나.”
“관찰력이 늘었군.”
“…….”
“안심하게. 자네를 시험해봤을 뿐이니.”
왓슨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애꿎은 바닥을 지팡이로 두드렸다.
사실 군필여의생軍畢女醫生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굳이 왓슨의 별호를 군필의희로 등록한 건 부끄러워하는 왓슨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나도 스승이 처음 별호를 지어줬을 때 비슷한 기분을 맛보았다.
무릇 친구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경험해야 하는 법이니 왓슨도 겪어 봐야 마땅하다.
“기력을 아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 곡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비무 상대를 찾아야 하니까.”
“아직 멀쩡하니 걱정은 말게. 자네가 준 금룡과가 공력 증진에 적잖게 도움이 되어서 말일세.”
“그렇다면 다행이고…….”
육군 제식 무공은 살상에 특화된 것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왓슨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다리에 입은 부상 탓에 경공을 펼칠 수 없고 구음절맥Nine Yin-Qi Nails 탓에 싸움이 길어지면 대책이 없긴 하다만.
그녀의 주특기는 공력을 일점에 집중시켜 쏘아 내는 탄지공으로 육군 군의관 출신답게 접근전보다는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급소를 제대로 저격하는 것이 전제긴 하지만 왓슨이 최대 출력으로 쏘아 낸 지풍指風은 일류 무인에게도 충분히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제 서른두 명 남았나.’
이번에 영약원에서 가져온 과일을 몇 개 먹여 둔 덕에 운용할 수 있는 공력의 양이 늘어났으니 결승까지 남은 네 번의 시합도 대진운만 따라준다면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왓슨이 패배한다 해도 내가 결승에 진출하면 최고 등급 답례품인 독각화망의 내단을 하나 건질 수 있다.
물론,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치워야 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지만.
“저깄었군…….”
조금 전까지 내가 비무를 진행했던 4번 링으로 시선을 돌리자 비교적 단출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스코틀랜드 종북파Northern End Clan 출신 검객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오래전부터 묵직한 클레이모어를 다뤄 온 스코틀랜드인이 종남파Southern End Clan의 중검을 흡수해 새로운 검술 체계를 완성했다.
그렇게 태어난 종북파는 검격의 위력 하나만 따지면 다른 거대 문파 중 비할 곳이 없는 전투집단이다.
-부웅!
-콰앙!
높은 확률로 킬트 치마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을 듯한 거한은 자신의 몸뚱이만 한 클레이모어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가면의 여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다루는 바스켓힐트와 방패가 아닌 전통적인 형태의 양손검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고원검수Highlander 중에서도 용력을 타고나는 일족의 후예.
“과연.”
붉은 킬트 치마에 새겨진 혈족의 문양을 보니 맥마한 세가McMahan Family의 젊은 호걸이 틀림없다.
그와 별개로 발달한 하체의 근육이 뿜어내는 내력의 소용돌이에 킬트 치마가 요동치고 있어 실로 불편했다.
“흠…….”
하이랜더를 상대하는 레이디께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수세에 몰린 연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