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가면무도회 (4)
Who Knows Who (4)
첫 비무가 신비로운 것은 우리가 그것이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벤자민 디즈레일리-
* * *
“그아아아!”
검기를 두르는 대신 천근추의 묘리를 검 자체에 적용해 적을 뭉개는 내려치기.
하지만 가면의 여인은 쥐고 있던 길쭉한 철선鐵扇을 접어 검격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쩡!
자로 잰 듯 정확히 검을 받아내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내력만을 부채에 담은 그녀는 하이랜더와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턱 밑을 후려쳤다.
-털썩
무릎을 꿇은 사내의 손에서 힘없이 칼자루가 미끄러졌다.
귀빈석에선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종북파 장정의 거구가 여인의 움직임을 가리고 있던 탓에 대다수는 결정타가 들어간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아마 처음부터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최적의 위치를 계산한 것이라.
“맥마한 가의 천재가 1차전에서 패배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
2층을 올려다보니 귀빈석에 모인 무리 중 묘한 낌새를 보이는 이가 둘 있었다.
첫 번째는 유독 차분하게 비무를 마친 레이디와 시선을 교환하는 여인.
다른 샤프롱에 비해 무위가 떨어져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 수상한 여인과 전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듯했다.
두 번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쪼가리를 삼매진화로 불태우고 자리를 뜬 백발의 노고수.
재에 섞여 타다 남은 종잇조각이 1층으로 떨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왓슨. 바늘.”
“음?”
나는 곁에 있던 왓슨이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가 허리춤에 숨긴 쿠션에 꽂아 둔 장침을 몰래 하나 낚아챈 다음 공력을 담아 던졌다.
-팅!
일직선으로 날아간 바늘은 떨어지고 있던 종잇조각을 관통 후 그대로 무도회장의 벽을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거울에 못처럼 박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강렬한 풍압에 의해 종이를 태우던 불꽃이 꺼졌다.
전부 계산했던 대로다.
“바늘은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점심을 급하게 먹어 체한 모양이네.”
“그건 큰일이군.”
바늘의 개수가 줄어든 걸 확인한 왓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맥을 짚고 가느다란 바늘로 십선혈을 찔렀다.
“멀쩡한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고맙네. 자네와 함께 와서 다행이야.”
“이, 이 정도는 의사라면 당연히 도울 수 있네!”
내가 고맙다고 말하자 왓슨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내 손을 팽개쳤다.
“……체한 게 나아졌다면 어서 다음 상대나 찾아보세.”
“나는 이미 정했는데, 자네는 아직인가?”
무도회장에 있는 후기지수들도, 귀빈석의 사람들도, 심지어는 왓슨조차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 뭐가 적혀 있는지 몹시 궁금하긴 하나 타다 남은 종잇조각을 가지러 갔다간 쓸데없이 이목을 끌 가능성이 있으니 잠시 미뤄 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왓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7번 링에서 비무를 마친 사내가 계속 날 보고 있는데, 어째 낌새가 좋지 않아 자네에게 조언을 구하려 하던 참이야.”
나는 왓슨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7번 링으로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가 끈적하고 음침한 시선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혀로 전신을 핥으며 맛을 확인하는 것만 같은 눈빛.
그곳에는 아까 벽의 꽃이 된 종북파의 고원검수보다 더욱 큰 7피트의 신장을 지닌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이런.”
사내의 가면도 실루엣도 낯설었지만 그의 귀를 확인한 나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실력은 최소 일류와 절정 사이.
단련된 전신에선 맹금류를 방불케 하는 자신감이 흘러넘치고 있다.
놈은 먹잇감을 찾고 있었고 다음 목표로 왓슨을 점찍었다.
다만,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발하는 기운은 무림초출의 후기지수가 보이는 호승심이나 투쟁심 따위가 아니었다.
녀석이 용봉지회에 참가한 목적은 아마도―
“귀찮은 놈의 눈에 띄고 만 모양이야.”
“……아는 사람인가?”
“아니. 하지만 저 귀의 모양만 봐도 필요한 정보는 얻을 수 있을 듯하네.”
이 거리에서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특유의 거구.
귓불과 귓바퀴의 크기와 기타 특징, 그리고 연골의 모양.
눈동자의 색깔과 곱슬진 머리카락.
그 외에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단초가 내게 놈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해부학적 분석에 근거해 판단하건대, 나는 저 사내의 부친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로 저자의 아버지는 극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
“……레이디.”
연무대에서 내려온 사내는 상승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왓슨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까 보이신 신묘한 무공을 다시 한번 견식하고 싶습니다.”
“……네?”
당황한 왓슨의 목소리가 뒤집혀 있었다.
“한 수 가르침을 청해도 될까요?”
녀석은 뻔뻔스럽게도 왓슨에게 인사하며 비무첩Duel Card과 펜을 내밀었고.
“레이디께서 불편해하고 있으니 물러나시오.”
즉시 놈과 왓슨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년 전, 스승이 경마를 보여 주겠다고 날 엡섬 더비에 데려간 날의 일을.
그곳에서 저 사내의 부친으로 추측되는 인물은 소유한 말이 우승을 놓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장법掌法을 펼쳐 경주마를 일격에 죽였다.
그 후에도 나는 종종 저 집안 구성원에 관한 좋지 못한 소문을 접해왔다.
혼자 용봉지회에 참석한 걸 보니 저기 보이는 놈이 아랫세대의 두 형제 중 행실이 더욱 개차반이라는 얘기가 도는 장남일 터.
“내 파트너는 보다시피 다리에 입은 부상이 낫지 않았소.”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욕지거리가 올라올 뻔했다.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의 양만 따지면 지금 단전의 내공 중 5할밖에 다룰 수 없는 나보다 많아 보이는 사내.
그런 놈이 왓슨에게 가르침을 청하긴 무슨.
허리춤에 찬 상등품의 커틀러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녀석은 해군. 그것도 대대로 군에 복무해 온 골수 군인 가문 출신이다.
그가 왓슨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 뻔했다.
지난 며칠 동안 나의 지도를 거친 왓슨의 육군 제식 지공指功은 예전보다 훨씬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공력을 사출할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은 자신이 무시해 온 육군의 무공이 뜻밖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겼고, 결과 왓슨에게도 마음이 끌린 모양이었다.
“홈즈…….”
왓슨은 곤란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내게 도움을 청했고,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목적은 다양했다.
왕립무학회 회원의 눈에 들어 버킹엄의 무도회에 나가거나.
다른 가문의 젊은 무인들과 교류해 무학의 깊이를 더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혼 상대를 찾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곳에 참석한 강호인의 사분지 일은 자기 눈에 차는 신사 혹은 숙녀를 찾아 배필로 맞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유독 그런 유형 중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족속이 많다고 들었다.
왓슨을 데려온 파트너가 옆에 있는 걸 보고도 노골적으로 접근을 꾀하고 있는 걸 보니 이 녀석 역시 그쪽 부류였다.
우릴 인솔하는 샤프롱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귀족의 비무 신청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거겠지.
다만, 고작 이 정도의 촌극은 충분히 예상했던 범주에 속했다.
“공자께서 비무 상대를 찾는 거라면 본인과 무위를 견줄 만한 레이디를 찾으심이 어떠신가.”
“말을 삼가라. 네놈이 아닌 레이디에게 묻고 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귀족 중에서도 특히나 오만하고 흉포한 유형. 자기 아비를 닮은 게 틀림없다.
이 녀석의 가문이 내가 생각하는 곳이라면 대대로 물려받는 작위가 그리 높지 않을 터.
그런데도 이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는 건 우리가 귀족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는 데에다 런던에서 무공의 고하가 지위 이상의 발언권을 부여하는 까닭이리라.
이게 전부 가면무도회에서 생긴 앙금을 외부에서 해결하는 것을 금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탓이다.
“공자, 죄송하지만…….”
긴장을 푼 왓슨은 놈이 발하는 위압감에 저항하며 입을 열었다.
“선약이 있으니 거절하겠습니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점잖게 경멸을 담은 대답.
“…….”
놈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인제 와서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별호를 감춰야 하는 첫 비무가 끝났음에도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고 대뜸 다음 곡을 함께 하자고 청하는 건 심각한 결례에 해당한다.
용봉지회에서 레이디의 거절은 절대적이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걸 보니 머지않아 이 자에 관한 영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 거라고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놈에게 있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실명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거겠지.
“……잘도 창피를 주었군.”
놈은 왓슨에게 정중한 척 인사하고는 내게 다가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놈하곤 비무로 결판을 짓도록 하지. 기권하거나 도망치면 가면을 벗겨 주마.”
“기대하고 있겠네.”
이 녀석이 내게 비무를 신청하면 짓밟아 버릴 생각이었던지라 반가울 따름이었다.
나보다 내공이 조금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같은 남자끼리 붙는 일은 여성이 모두 탈락한 다음에야 벌어지겠지만.
“도망? 내가 왜 운 좋게 해적 신분에서 남작까지 기어오른 집안의 핏줄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 거지? 게다가 그쪽은 나보다 약하지 않은가.”
“……?!”
녀석이 노골적으로 동요한 틈을 타 나는 말을 이어 갔다.
“프랜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경의 아들이지? 버클랜드 애비가 자네 집이고. 이런 자리에서 결례를 범해 놓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군.”
“그걸 어떻게…….”
“애초에 그쪽이 감춘 적이 없는데 모른 척 넘어가기도 힘들었다네. 새로 맞춘 해군 군복과 커틀러스, 거기에 더해 유전적인 특성 몇 가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춘부장의 성격까지 물려받은 걸 보니 피는 속일 순 없는 모양이야.”
“…….”
드레이크는 한 마디도 받아치지 못했다.
내 말을 인정하자니 가문에 폐를 끼친 머저리가 되고, 부정한다면 나중에 참석자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일신의 체면을 위해 출신을 부정한 패륜아가 된다.
어느 쪽이든 상처 없이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럼, 이쯤에서 결정타를 날려 볼까.
“듣자 하니 두 살 터울의 동생 쪽이 무공의 성취가 뛰어나다던데. 자네보다는 동생과 겨루는 쪽이 차라리 재미가 있어 보이는군. 그러고 보니 군복을 입은 건 자네뿐인 것 같네만 동생은 어디에 있나.”
“그 녀석은―”
“설마, 아우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게 싫어 수를 부리기라도 한 건가?”
공력을 담은 나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무도회장을 울렸다.
모든 이의 이목이 이쪽에 쏠려 있었지만 정곡을 찔린 드레이크 가문의 장남은 분노에 몸을 떨 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낱 젠트리Gentry에게 비무를 신청해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충동에 맡겨 어리석은 발언을 했고, 그에 더해 아버지와 가문의 이름까지 까발려졌다.
강호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콧대가 꺾인 상황.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지 않는 이상은 이만한 수치를 만회할 수 없을 것이다.
2층 귀빈석에서 놈과 비슷한 차림을 한 샤프롱이 노골적으로 낭패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는 지금쯤 타자기 같은 속도로 전음을 날리고 있을 것이다.
내용은 대충 상상이 간다.
비무만 이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그러니까 더는 도발에 넘어가 추한 꼴을 보여선 안 된다.
대충 그런 얘길 하고 있겠지.
“……흥분해서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게.”
“내 오늘만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겠네. 그럼, 귀하의 건투를 빌지.”
예상했던 대로 놈은 입술을 짓씹으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늘어놓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해결되었네. 왓슨. 그럼 좀 더 쉬운 상대를 찾아보자고.”
“……꽤 강해 보이는 사내였는데, 그렇게 도발해도 괜찮은 건가?”
“자네가 말했지 않았나. 내가 절정고수라고. 아직 일류에 머문 애송이 정도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네.”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만.”
요 며칠 동안 내가 지공 계통 초식을 다듬어 준 게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왓슨은 저번 강시 사건 때보다 나를 더욱 신뢰하고 있었다.
“자네 상대는 내가 골라주지. 문제는 내가 누구랑 싸우느냐인데…….”
굳이 번거롭게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만나고 싶던 사람은 어느샌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소협께서 보여 주신 협기와 지혜, 정말로 탄복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종북파의 고원검수를 일격에 쓰러뜨린 여인이 다소곳한 자세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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