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증오의 용봉지회 (1)
Hateful U-35 Invitational (1)
무재武才처럼 살생 역시 핏줄을 타고 흐른다.
-조지 헨리 루이스-
* * *
그녀의 안면근육의 움직임과 세부 동작 하나하나는 내게 진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꾸며댄 음성. 감탄보단 재밌는 장난감을 찾았을 때나 지을 법한 표정.
그녀는 마치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조금 전 비무에서 보인 고강한 무력만 보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기파.
반박귀진Social Facade을 이룬 고수가 틀림없다.
나는 아까 옷에 묻은 동물의 털만 보고도 그 정체를 추리해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신사다운 모습으로 대답하기로 했다.
“레이디가 불편함이 없도록 에스코트하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분께 거친 말을 들려드리게 된 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외람되지만, 저 자신만이 아닌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남성을 변호하기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뢰배를 품위 있게 다루는 데 필요한 건 세 치 혀가 아닌 지팡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영제국의 모든 신사가 무공을 연마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상대의 신분을 알고 있는 나로선 평소의 갑절은 예를 갖춰야만 했고, 왓슨은 그런 내가 괴이한 종류의 해파리의 일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분께서 미래를 약조한 사이신지, 아니면 같은 사문에서 무학을 익히는 사형제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소녀의 눈에 소협은 더없이 응연凝然하고 늠름하게 비출 따름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오나 소녀는 얼마 전 장문인으로부터 양광공녀陽光公女라는 과분한 별호를 받았습니다. 소녀가 감히 소협과 무공을 견주는 건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함과 같사오나 한 수 가르침을 청할 수 있다면 필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누가 옛날 사람 아니랄까 봐 무지막지하게 말을 돌려서 한다.
양광공녀Miss Sunshine라니, 정말로 정체를 숨길 생각이 있긴 한 건가.
하긴, 최근 큰일을 겪었으니 이런 주책맞은 일을 벌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장단Rhythm에 맞춰 주는 수밖에.
“좋습니다. 2번 링에서 뵙도록 하지요.”
“소협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우린 서로의 카드에 별호를 적었다.
이 여인이 얼마나 강한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굳이 정면에서 싸울 필요는 없다.
내겐 기력을 허비하는 일 없이 간단히 이길 수 있는 묘수가 있으니까.
“그럼 왓슨, 이쪽으로 오게.”
나는 왓슨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법한 상대를 골라준 다음 링으로 향했다.
“동쪽 코너, 소천마. 서쪽 코너, 양광공녀.”
1차전을 뚫고 올라온 후기지수의 숫자는 서른둘.
결승까지 포함해 다섯 번은 더 싸워야 한다.
빠르게 승부를 마친 다음 왓슨을 응원하러 가야지.
“비무 준비, 개시!”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지만 치고 들어올 기색이 보이지 않는 양광공녀.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력을 실은 검지로 천마장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허락한 상대에게만 기파를 날려 소통하는 전음이 아니더라도 저 정도 고수라면 알아볼 것이다.
[동물을 무척이나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내가 보낸 모스 부호를.
“……?!”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양광공녀는 토끼같이 눈을 둥글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일단 확인할 수 있는 건 보더콜리 두 마리에 앙고라 고양이군요. 저도 동물은 무척 좋아합니다.]
실험용으로 쥐나 초파리를 키워봤다거나(죽이거나 해치는 일 없이 멀쩡히 방생했다) 진주언가의 고를 키운다는 얘긴 심기를 거스를 수 있으니 하지 않기로 했다.
[일반적인 개체와 달리 무척 영양 상태가 좋더군요.]
[……소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사와요.]
망설이던 양광공녀는 결국 철선을 두드려 모스 부호로 답했다.
[아까 쿼드릴 검무를 출 때 잠시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떼어드리는 겸 확인했습니다.]
[제가 감사를 표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그럴 필요까지야. 그보다, 요즘 명문가는 영약이 남아도나 봅니다?]
영약이라는 단어에 양광공녀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평범한 강아지와 고양이의 털에 내력을 불어넣으면 바스러져야 하는데, 오히려 제 공력을 튕겨 내더군요.]
가면으로 가린 눈가와 볼이야 알 수 없지만 그 아래로 보이는 하관과 목의 피부가 점점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이런 현상은 영물의 털가죽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려 보더콜리와 고양이를 영물이 되도록 키워 낼 수 있는 환경은 대영제국에 그리 많지 않겠죠.]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샤프, 노블, 화이트 헤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양광공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 협박은 확실히 먹혀든 모양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희 모자란 것들의 비무가 장난만도 못하게 보일 거란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놀이터에 어른이 끼어드는 건 곤란합니다.]
내 마지막 모스 부호를 해석한 양광공녀가 말없이 손을 올려 급사를 불렀다.
“이번 비무, 기권하도록 하겠습니다.”
“……기권은 번복할 수 없습니다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이디?”
“네.”
나는 의기소침해진 양광공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약간의 불안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잘못 건드린 건 아니려나.
뒤끝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을 텐데.
괜히 놀러 나온 사람 기분만 망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적당히 어울려 줬다면 실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아서 즐기다 기권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내공이 대량으로 소모되었겠지.
곧 드레이크 가문의 망나니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필요 없는 리스크를 지고 싶진 않다.
왓슨이 요절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독각화망의 내단을 차지해야만 하니까.
그나저나, 그 자식이 다시 왓슨에게 비무를 청하면 어떻게 할까.
솔직히 말해서 왓슨에게 기권을 권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왓슨이 다치는 건 그 이상으로 싫다.
무언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한다.
드레이크나 다른 후기지수가 준우승을 꿰차면 우리가 가져갈 내단 중 하나가 줄어들게 될 텐데, 어떻게든 두 개 다 가져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승자, 소천마. 다음 후기지수는 2번 링으로 올라오시오.”
“……한 수 배웠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나와 양광공녀는 서로를 등지고 뇌대 아래로 내려갔다.
방법은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은 왓슨이나 응원하러 가야겠다.
-퍼엉
그런데 비무 중인 왓슨이 있는 곳으로 돌아선 순간, 반대쪽에 있던 7번 링에서 폭음이 울렸다.
-투둑
무언가 따뜻한 게 날아와 볼에 묻었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는데 뜻밖의 것이 묻어 있었다.
“…….”
살점과 붉은 핏물.
다시 고개를 들자 7번 링에 우두커니 선 두 후기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하나는 창을 들고 있지만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데에다 겁에 질려 있는 여인.
나머지 하나가 바로 아까 내게 시비를 걸었던 드레이크 가문의 장남이었다.
해군 명가 망나니는 무엇이 잘났는지 어깨너비로 두 발을 벌리고 링 위에 당당히 서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저런 살수를 펼치다니. 손속이 조금 과하군.”
문제는 상체를 잃고 제자리에 남은 그의 하반신이 끊임없이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꺄아아아!!!!”
참상을 목격하고 비명을 지르는 숙녀들.
고강한 무위를 지닌 왕립무학회의 회원들조차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감히, 런던의 유일무이한 자문 탐정이 지켜보는 앞에서 겁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나는 가면을 벗고 외쳤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범인이 누구든 무도회를 망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 * *
살인 사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간결하고 충격적인 어휘가 무도회장에 모인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홈즈…….”
링 아래에 선 왓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안심하게. 금방 해결할 테니.”
눈앞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예와 협기를 두루 갖췄다는 강호인들이 모인 용봉지회U-35 Invitational에서.
사망자는 튜더 왕조 시절부터 우수한 해군 장교를 수도 없이 배출해 낸 명문 드레이크 가문의 장남.
그는 신진기예의 후기지수만이 아니라 왕립무학회의 강자와 안력이 뛰어난 샤프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었고.
어떻게 된 건지 살인에 사용된 수단이나 범인을 목격한 자가 없어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다.
한눈에 봐도 만만치 않은 사건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내가 가장 원해 마지않는 유형의 일감이라는 뜻이다.
-화륵
나는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뱃잎에 섞인 영약의 성분이 향긋한 연기가 되어 폐로 빨려 들어갔다.
웅성대는 강호인들. 모든 시선이 내게 쏟아지고 있었지만 나는 말 없이 그들을 주시했다.
세 모금 들이켠 즈음엔 실내의 소란도 조금이지만 잠잠해져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해동도Ladies And Gentlemen께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만성적으로 이어지던 영약 금단증상이 말끔하게 사라지자 깨어난 대뇌피질이 기수식Warming Up을 펼치는 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셜록 홈즈. 베이커가에서 자문 탐정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방금 보셨겠지만 해군의 자랑, 드레이크 가문의 자제가 살해당했습니다. 저는 용봉지회의 규율을 어기고 런던 무림의 명예를 실추시킨 간악한 흉수를 잡아내고자 합니다. 반드시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약조하오니 여러분께서도 부디 조사에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이 누구의 것인지 아는 이들은 침묵을 일관했고, 가면의 주인을 모르는 이들과 다른 후기지수들은 코웃음을 쳤다.
전자는 아까 내 별호가 소천마小天魔인 것까지 들었을 테니 지금 하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거다.
후자가 저렇게 나올 수 있는 건 아마, 이쪽 세상에선 왓슨이 내 활약을 글로 엮지 않은 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이 일에 관해 얼마 전부터 계속 왓슨이 내 허락을 구하려 들었지만 매번 단호하게 거절하는 중이었다.
회귀 전처럼 왓슨이 잡지에 내 활약상을 기고하도록 허락하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었다.
이쪽 세상에도 멀쩡히 살아 있을 모리어티가 내 존재를 최대한 늦게 눈치채게 하여 선수 칠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놈을 처단하기 위해서라면 식은 포리지冷飯 취급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탐정 나부랭이가 무슨 자격으로 조사를…….”
“허허. 너무 뭐라 하지 말게. 그냥 탐정도 아니고 ‘자문 탐정’이라지 않나.”
“…….”
그래도 저런 헛소리는 짜증 나서 못 들어주겠군.
하는 수 없다. 지명도가 부족하니 권위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에드먼드 헨더슨 런던광역경찰청장님! 2층에 계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소리치자 2층 귀빈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이윽고, 난간에 모여 이쪽을 내려 보던 사람들을 비집고 가면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바밧!
그는 곧바로 능숙한 허공답보Air Walk를 펼쳐 1층으로 내려왔다.
깃털처럼 소리 없이 링 위에 착륙한 그의 태도에선 노골적인 짜증이 느껴졌다.
“……어떻게 알았나.”
사내와 나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저번 강시 사건 탓에 그는 분명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터.
“따님께서 6번 링에서 비무 중이신 걸 봤거든요.”
한편 나는, 에드먼드 헨더슨 청장이 나에 관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그에 관해 파악하고 있었다.
“고작 스무 살芳年의 젊은 나이에 용봉지회에 참가하다니. 재능이 참으로 출중하십니다.”
런던 광역경찰청을 책임지는 치안총감인 그는 딸만 넷 있는 유명한 딸 부자이자.
“그야 날 닮았으니 당연히…….”
“…….”
“아니, 그게 아니라, 으음…….”
딸바보Princess Mak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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