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1화 (21/110)

021. 증오의 용봉지회 (2)

Hateful U-35 Invitational (2)

아버지의 협행은 최고의 유산이다.

-영국 속담-

* * *

“그렉슨과 레스트레이드에게 자네 얘길 들어봤네. 저번 사건을 해결할 때도 ‘아마추어치고는’ 큰 도움을 주었다지 않나.”

아마추어라는 단어로 폄하 당했지만 내 단단한 자존감은 남의 평가로 인해 상처받지 않는다.

나는 그런 데에 심력을 낭비하는 대신, 당장 이 남자를 어떻게 써먹을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아마추어의 도움 없인 시체 하나 치우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을 이끄시는 분께서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일 따름입니다.”

“말조심하게. 나는 이 자리에서 당장 자네를 용의자로 체포할 수도 있어. 아까 드레이크 경의 아들과 다툰 걸 모두가 보았으니 동기도 충분하군.”

눈빛을 보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자는 퇴역한 대령. 군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권위를 내세워 협박하고 있을 뿐이다.

좋게좋게 부탁하려 했더니 이렇게 되면 나도 강경책을 구사하는 수밖에.

“그건 어려워 보이는군요. 만에 하나 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뒤집어썼다간 억울한 마음에 저번 강시 사건의 전말이 담긴 편지가 런던의 모든 신문사에 배송될 테니까요.”

“……감히 그런 짓을 했다간 대가를 치르게 해 주지.”

나는 으르렁대는 치안총감 나리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가 돌면 내무장관 하커트 경께서 필히 근심에 밤잠을 설치시겠지요. 수면 부족은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장관대인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과연 그 분노를 누가 받아 낼지 걱정이군요.”

결정타를 얻어맞은 헨더슨 청장은 바닥이 꺼지라고 한숨을 쉰 다음에야 항복을 선언했다.

“……이자벨은 이번이 첫 용봉지회라네. 내 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을 키우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게.”

“런던의 수호자로서 여러 귀빈과 따님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 대대로 프랜시스 드레이크라는 이름과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야만스러운 해적의 본성은 끝내 버리지 못한 프랜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남작과 달리 헨더슨 경은 협행이야말로 아버지가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런 자에겐 합당한 명예가 주어져야 하는 법.

나는 이 자리에 누가 와 있는지 청장에게 몰래 귀띔해주었다.

“……놀랍군.”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말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절 입이 싸고 경박한 사내로 만들 생각입니까.”

“……조심하겠네.”

나는 이제야 협Chivalry을 논할 마음이 생긴 헨더슨 경찰청장에게 협조를 부탁하기로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건물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감시하는 겁니다. 지상이든, 공중이든, 지하든, 전부요.”

“……왜 나를 불렀는지 알 것 같군.”

그렇다. 내가 헨더슨을 부른 건 단순히 경찰청장인 그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에겐 실제로 여기 윌리스 룸에 있는 최소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좋아.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모양이니 어울려주겠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자기 재질 가면을 벗어 한 손으로 으깬 경찰청장은 한 바퀴 제자리에서 돌아 주위를 살폈다.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사람들의 눈에 새기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에드먼드 헨더슨입니다. 후학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런던 광역 경찰청장의 권한으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수사 협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럼, 부끄러운 재주지만 어디 한 번…….”

-쿵!

웅후한 내력이 담긴 진각Stomping.

공력을 끌어올린 치안총감은 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물고는 양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삐이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헨더슨의 주위로 대량의 내력이 가느다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백팔경감…… 집합Inspectors Assemble!”

그것은 파괴를 위한 초식이 아니었다.

호루라기 소리는 헨더슨의 사자후와 합쳐져 실내에서 메아리치다 지향성을 지닌 공력을 타고 벽을 돌파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기가 없는 곳에서 이 정도 음공을……!”

청장의 절기에 감탄한 후기지수들이 탄성을 발했다.

헨더슨이 사용한 초식은 치안총감 계급의 경찰관에게만 구전으로 전승되는 비급, 천리전음Police Telegraphy.

런던광역경찰청장은 상대가 경관이라면 누구든 런던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이 절세음공絶世音功을 통해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고고고고……!

정확히 10초 후,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이 일어났다.

-콰아앙!

철포삼Iron Vest을 펼친 레스트레이드가 무도회장 문을 부수고 실내로 돌입.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레스트레이드 경감, 청장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쨍그랑!!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그렉슨 경감, 청장님의 명을 따라 저달抵達하였습니다!!”

이어서 2층 창문을 깨고 들어온 그렉슨이 나한신법Buddhist Movement을 펼치며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런던광역경찰청 소속―”

.

.

.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

맥도널드, 브래드스트릿, 그레고리 등등. 모두 내가 알고 지내던 얼굴이었다.

“백팔경감진을 펼치게.”

“존명Yes Sir!!”

그들은 청장의 명령에 따라 윌리스 건물의 안팎, 심지어 지하의 하수도까지 내려가 감시를 시작했다.

직업 특성상 경감들은 동 수준의 무인들과 비교했을 때 훨씬 날카로운 기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내공을 사용한 탐지 능력을 최대 범위로 펼쳐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으니 제아무리 범인이 고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도망칠 순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경감들이 무도회장까지 오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은 걸 보니 딸바보 경찰청장께서 귀빈들을 경호한다는 이유로 경찰력을 근처에 대기시켜 뒀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저릿

조금 전 비무 중 기권한 양광공녀Lady Sunshine와 눈이 맞았다.

아마 저 집안을 섬기는 이들이 주인의 일탈을 보고 불안해져 미리 내무장관을 통해 압력을 가한 걸지도.

“……일리 있군.”

그렇다면 헨더슨 경이 양광공녀의 정체를 듣고 금방 납득한 것도 자연스러웠다.

내무장관에게서 이 지역의 치안 강화를 명령받고 짚이는 구석이 있던 거겠지.

“그럼, 무도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작은 부탁을 드릴 차례군요.”

어느 쪽이든 이로써 조사를 시작할 환경이 완성되었다.

“2층에 계신 여러분께선 가면을 벗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주시길 바랍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1층의 후기지수 분들도 지금 서로의 얼굴을 확인해 두시죠. 흔한 자리가 아니니 안면은 트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되긴 합니다만, 저와 경관들이 혹여라도 쓸데없는 의심을 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나는 경찰들이 발하는 위압감을 이용해 사람들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청장이 협력해준 김에 경찰들을 부려 먹지 않으면 아까우니까.

“홈즈……!”

링 아래로 내려가자 왓슨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경찰청장이 온 걸 알아낸 건가. 자네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관찰한 정보를 적시 적소에 활용할 수 있다면 어려울 건 없지.”

“처음 만나는 후기지수의 말대로 움직여 준 걸 보니 헨더슨 치안총감도 자네의 지혜에 감탄한 게 틀림없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야. 그럼, 나는 남아 있는 증거를 확인하러 가보겠네.”

혼자 시체가 남은 7번 링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왓슨이 내 턱시도 소매를 붙잡았다.

“기다리게.”

“음?”

내가 돌아보자 왓슨은 머뭇대다 마저 말했다.

“……이래 봬도 의술로 밥 먹는 사람이라 실력에는 자신이 있다네. 자네처럼 범인을 찾아낼 순 없을진 몰라도 부검 정도라면 도울 수 있어.”

“왓슨…….”

그 순간 나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범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존 왓슨이 아닌 제인 왓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무의식적으로 왓슨을 조수의 역할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허나 성별이 다르다 해도 왓슨이 뛰어난 의술과 강인한 정신, 거기에 상당한 무력까지 두루 갖춘 나의 파트너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또한 살리는 두 가지 면모를 지닌 나의 붕우.

‘존 왓슨’이란 이름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홀로 움직이는 건 내 등을 지켜 주는 이 여인에게 크나큰 결례를 범하는 짓이다.

“……실은 자네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던 참이었네. 다만, 자네가 한 명의 숙녀로서 꾸미고 나온 날 드레스에 피가 묻을까 두려웠을 뿐이야.”

“그렇다면 나를 혼자 두지 말고 성의껏 에스코트하게. 그런 사소한 배려 역시 신사의 의무가 아닌가. 홀로 남아 자네를 기다리는 건 이젠 사양하고 싶다네.”

“하여튼 왓슨, 자네란 사람은…….”

살인 현장을 향해 돌아선 나는 팔꿈치를 내밀었고, 왓슨의 가느다란 팔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럼, 가실까요. 나의 친구My lady.”

“네. 함께라면 어디든지.”

우린 운집한 강호인들을 가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피바다가 펼쳐진 7번 링을 향해 걸었다.

사건의 윤곽은 이미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보게, 레스트레이드.”

왓슨과 살인이 일어난 7번 링으로 향한 나는 근처에 있던 레스트레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홈즈 씨, 또 당신입니까. 이번엔 청장님까지 꼬드기다니, 벌써 골치가 아파지는군요.”

저번에 강시의 돌진을 받아 내다 입은 내상은 진즉에 치유된 듯 멀쩡해 보였다.

하여튼 맷집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친구다.

“꼬드겼다니 무슨 소린가. 평소처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최적의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네.”

“그래서, 오늘은 또 뭡니까.”

“비무에 사용된 링을 움직이는 기관장치를 관리하는 자를 불러 주게. 웨넘사 대표도. 참. 피해자의 샤프롱도 찾아오게나. 해군 제복을 입고 있어 알기 쉬울 거야.”

레스트레이드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느라 찢어진 이마를 손수건으로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 세 명만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이번에도 우리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잡일만 시킬 생각이군요.”

나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번 사건이 해결되면 신문은 스코틀랜드 야드 경감들의 활약을 대서특필할 게 분명해.”

“……됐습니다. 그쪽하고 오래 떠들어봤자 저만 지치니.”

레스트레이드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말했다.

“왜 나한테만 저리 까칠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걸.”

왓슨이 아리송한 말을 하길래 고개를 저었더니 둘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뭐지, 틀린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허. ‘고놈’의 제자인가.”

그때였다. 등 뒤에서 말라비틀어진 장작에서 쥐어 짜낸 듯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

접근한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가면 쓴 노인 셋이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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