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증오의 용봉지회 (3)
Hateful U-35 Invitational (3)
022. 증오의 용봉지회 Hateful U-35 Invitational (3)
나는 화경의 검로를 계산할 수 있지만 강호의 광기를 계산할 순 없었다.
-아이작 뉴턴-
* * *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순한 기파가 전신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노고수들.
스승의 지인일까. 만일 그렇다 해도 지금은 딱히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최대한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가면을 벗어 달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는데 이 못난 후학의 부탁도 들어주지 못하시는 건가요.”
모두에게 가면을 벗어 달라 한 건 최대한 내가 헤매는 척 연기해 ‘그늘’에 숨은 범인을 방심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절대 범인일 리가 없는 귀빈석 사람들의 얼굴을 굳이 까발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공간이 나와 경찰청장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해 두어야 조사가 수월해지는 법.
“분명 자네 입으로 가면을 벗기 싫으면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말했네.”
“의심을 사도 된다는 뜻입니까.”
“진범이 따로 있다고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우릴 의심하는 척 행동하면 시간 낭비가 아닌가.”
의외였다.
네가 감히, 따위의 말로 짓누르려 할 줄 알았더니 여유롭게 이쪽의 명예를 인질로 잡다니.
“대인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해하고 넘어가겠네. 나도 젊었을 땐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했으니.”
셋 중 가장 배분이 높아 보이는 노인이 말하자 뒤에 있던 둘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모아 두신 돈 좀 많이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예끼, 이놈들아. 노부는 혼자 시장을 짊어졌을 뿐이야.”
노인은 헛기침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미 이곳은 충분히 혼란스러우니 우리 셋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소란을 통제하기 어려워질 게야. 그러니, 오늘은 자네만 이 두 놈의 얼굴을 확인하고 넘어가 주게.”
“알겠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뒤에서 웃고 있던 두 왕립무학회 회원이 번개 같은 속도로 가면을 벗었다가 다시 착용했다.
“……?!”
“거 보게. 놀라지 않았나.”
세 노인은 유쾌하다는 듯 껄껄대기 시작했다.
“출출해졌군.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주전부리라도 먹어 둬야겠어.”
“그렉슨. 왕립무학회에서 오신 여러분을 석식실로 안내해 드리게.”
그렉슨 경감은 왕립무학회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쏜살같이 튀어와서 세 노인과 그들의 일행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참, 어르신.”
나는 그들이 멀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불러 세웠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았나.”
“제가 세어 보니 아까 2층에 계시던 무학회 회원Fellow 여러분의 숫자가 하나 줄어 있더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겐가. 우리 중 하나가 어린 아해를 죽였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겠습니까. 다만,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 동료 되시는 분들이라면 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
그렉슨을 따라가던 이들 중 누구 하나 방심한 타이밍을 노려 내가 던진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중요한 질문이긴 한데, 정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괜찮습니다. 혼자 힘으로 알아낼 생각이라서. 즐거운 식사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저들이 입을 닫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이젠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으면 된다.
“……대체 저 둘이 누구길래 그리 놀라는 건가. 너무 빨라서 내 눈엔 가면을 벗은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네.”
왓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중에 말해줌세. 일단은 사건부터 해결하자고.”
고개를 들자 아까 던진 바늘이 거울에 못처럼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그리 높은 위치에 꽂혀 있던 것도 아닌지라 가볍게 도약해 바늘에 꿰인 종이만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과연.”
타다 남은 종잇조각의 재질과 모퉁이에 남은 잉크를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이 무도회에는 작은 비밀이 하나 숨어 있었다.
범인이 드레이크를 살해할 때 사용한 방법도 그 비밀과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한편, 드레이크를 상대하던 후기지수는 여전히 7번 링 위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비무 상대의 상반신이 터져 나간 걸 목격한 충격으로 인해 반쯤 실신하려는 중이었다.
“알고 있으니 안심하고 밑에서 기다리게.”
나는 그녀의 가면을 벗긴 다음 링 아래로 내려보냈다.
손을 잡는 척 맥을 짚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드레이크의 상체를 일격에 날려 버릴 정도의 무력은 그녀에게 없다.
무엇보다 이 여인이 든 장창 갖곤 시체에 저런 형태의 손상을 입히는 건 불가능하다.
“그 와중에 얼추 나눠 두었군. 아주 좋아.”
아래를 내려다보자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이 후기지수들과 샤프롱을 통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대부분은 내가 시킨 대로 가면을 벗고 있었지만 아까 대련한 양광공녀Lady Sunshine를 비롯해 몇몇 후기지수는 여전히 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양광공녀야 가면 벗는 순간 난리가 날 테니 이해하지만 나머지는 의심할 거면 의심해 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듯했다.
이유는 둘 중 하나겠지.
퍽이나 무공의 성취에 자신이 있거나.
죽은 드레이크와 다툰 적이 있어 함부로 가면을 벗었다간 꼼짝없이 범인으로 의심받게 되는 사람이거나.
사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꼼짝없이 용의자에 포함될 테지만 지금은 런던광역경찰청장께서 내 신원을 보장해 주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어쨌든 준비는 끝났으니 슬슬 검증을 시작해 볼까.
“끔찍하군.”
사건 현장은 몇 번을 봐도 처참했다.
여전히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서 있지만 허리부터 위가 완전히 사라진 시체. 그 발밑에는 흘러내린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뱃속에 들어 있던 폭탄이라도 터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지만, 하반신이 제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건 정답이 아닐 터.
“자네 눈엔 어떻게 보이나, 왓슨.”
“무언가가 내부에서 팽창하며 상반신을 날려 버린 거로 보이네.”
“그런데도 다리는 멀쩡히 서 있군.”
“지향성의 폭발물을 사용해도 저건 설명이 되지 않아. 충격으로 넘어지는 게 정상이니까.”
우린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화약 냄새는 나지 않는군.”
지독한 피 냄새에 덮여 있지만 조각난 시체의 옷에선 다양한 종류의 향기가 났다.
개중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암모니아와 알코올, 거기에 서너 종류의 풀냄새 정도.
“스멜링 솔트?”
먼저 반응한 건 왓슨이었다.
“정확히 알아보았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시체의 바지 주머니를 뒤져 조그마한 향수병을 꺼냈다.
냄새의 근원은 이것이었다.
“의사들도 자주 들고 다니지?”
왓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멜링 솔트는 암모니아를 향수와 알코올 등과 혼합한 물건으로 기절한 환자를 정신 차리게 할 때 사용되고 있었다.
왓슨이 냄새의 정체를 맞춘 것도 평소 자주 접하던 향이어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나 역시 회귀 전에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쓰러질 때를 대비해 방에 한 병 챙겨 두곤 했다.
당시 나는 재밌는 사건이 없는 날엔 기절할 때까지 모르핀에 절여져 있는 일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야식을 가져온 허드슨 부인이나 하녀, 혹은 늦게 귀가한 왓슨이 스멜링 솔트로 날 깨워 주곤 했다.
다만, 이쪽 세상에서 스멜링 솔트는 조금 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암모니아 가스는 호흡기의 점막을 자극해 흡입 반사를 유도한다.
결과, 사용자는 특정 근육이 자극을 받아 짧은 시간 내에 근력이 향상된다. 뇌의 혈류량 또한 늘어나고.
이런 연고로 후기지수 중엔 호흡기에 화학적 화상을 입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무 전에 스멜링 솔트를 사용해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는 위법이 아니었고 런던 무림맹The League of Gentlemen이나 왕립무학회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물론, ‘첨가물’이 과다하게 들어간 스멜링 솔트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우리 의사들이 휴대하는 건 이 정도로 독하진 않아.”
일시적으로 육체의 잠재력을 해방하는 유형의 영약이 들어간 스멜링 솔트를 공식 비무에서 사용하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사용이 적발될 경우 예외 없이 수개월 동안 무도회를 비롯한 모든 비무와 논검 체스 매치에 참가할 수 없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드레이크가 향수병에 담아 휴대하던 스멜링 솔트는―
“그래. 자네 말대로야. 이건 좀 심하군.”
스멜링 솔트라고 부르기보단 갖은 영약의 엑기스를 추출해 섞은 도핑제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그것도, 마약 성분은 물론 더욱 끔찍한 약품까지 들어있는.
물론 저걸 한두 번 사용한다고 목숨에 지장이 가진 않는다.
나처럼 백고가 빚은 맞춤형 해독단을 복용해 몇 가지 치명적인 독에 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더더욱 문제없고.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금단증상이.”
하여, 나는 사리사욕이 아닌 오직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실험대로 삼기로 했다.
금단증상이라는 피치 못할 사정도 겹쳤으니 이건 불가항력이다.
이건 전부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니 헨더슨 경도 불문에 부쳐줄 것이다.
-치익
향수병의 내용물을 얼굴에 뿌리자 단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맥이 단번에 두 배는 확장되는 듯한 감각.
기분이 대담해지고 짜릿한 전능감이 가슴을 채웠다.
자신보다 무공의 성취가 낮은 레이디閨秀를 상대로 이런 약물까지 사용하다니.
드레이크 가문의 망나니가 얼마나 비겁했던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괘, 괜찮은 건가, 홈즈. 그런 독한 약을 사용해도.”
“소량이니까 괜찮네. 그보다 왓슨, 내 뺨을 세게 후려주지 않겠나.”
“……뭐라고?”
“꼬집어도 괜찮네. 통각을 확인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어. 전부 범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네.”
“자네가 정 그렇다면야…….”
왓슨은 장갑을 벗더니 가냘픈 손바닥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짜아악!
메아리치는 타격음.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날아온 일장一掌에 놀라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자네 방금 공력을 싣진 않았나.”
“그, 그럴 리가.”
조금만 더 망설이다 때렸다면 이만큼 섭섭하진 않았을 텐데.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네. 왜냐면 하나도 아프지 않거든.”
“……그게 정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이 향수병에 담긴 혼합 약물의 성분 중엔 사람의 통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독이 들어있었다.
목숨에 지장이 가는 성분이 아니라 아직 백고를 사용해 해독제를 만들지 않았기에 나는 그 효능을 시험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방금 그 일격은 내 일성 공력이 담긴―”
-주륵
코에서 무언가 흐르길래 손수건으로 닦았더니 피가 한 줄기 흐르고 있었다.
“……홈즈. 자네 조금 피곤한가 보군.”
“…….”
보아하니 저번에 지붕 위에 두고 혼자 돌아간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로써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네.”
그래도, 사건은 이미 해결된 거나 진배없다.
마지막 실마리를 확인했으니, 남은 건 범인을 특정해 경찰에게 넘기는 것뿐.
나는 공력을 목소리에 싣고 소리쳤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침내 여러분께 살인범을 소개할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경찰관들을 시켜 시체를 치우고 웨넘사의 얼음 조각상을 하나 링 위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아직 가면을 쓰고 계신 후기지수는 한 분도 빠짐없이 7번 링으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양광공녀를 포함해 지시를 따르지 않고 가면을 쓴 후기지수들이 차례차례 링 위에 올랐다.
경찰청장 앞이라 불평은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추리를 마무리 지으면 모든 것이 끝날 테니까.
나는 링 한가운데로 걸어간 다음 지팡이 끝으로 원을 그리듯 가면을 쓴 후기지수들을 차례대로 가리키고 말했다.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
살인자는 나를 중심으로 반경 5야드 이내에 숨어 있고, 5분 내로 박살이 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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