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증오의 용봉지회 (4)
Hateful U-35 Invitational (4)
소협께서도 아시겠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밤의 가면이 씌워져 있사와요. 그렇잖으면 소녀의 수줍음 때문에 사백혈과 관료혈이 붉어졌을 것이어요.
-윌리엄 셰익스피어, <불구대천양가정반합Romeo And Juliet>-
* * *
나는 링 위에 올라온 후기지수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 허리춤에 무기를 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경찰과 샤프롱이 지켜보는 앞이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만에 하나 내 추리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면 무력이라는 오래된 언어를 구사해 반박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물론 나는 애먼 사람을 잡을 생각 따위 추호도 없다.
이미 범인을 잡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지금 굳이 무고한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범인은 틀림없이 제 주위에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체를 밝히기에 앞서 여기 모인 후기지수 여러분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링의 각 모서리에는 비무를 기권한 양광공녀, 그리고 앞서 다른 링에서 고강한 무공을 선보인 남녀까지 모두 네 명이 서 있었다.
개중, 이미 내게 정체를 들킨 양광공녀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굳이 눈에 띄는 자리에 불러낸 건지 궁금해하는 표정.
금박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가면 안쪽에서 발하는 짜증 섞인 시선에 피부가 지져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녀의 왼쪽 코너에 있는 건 선명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작은 체구의 사내.
그는 여우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주무기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너클 더스터로 짐작되었다.
턱시도의 옷자락이 길고 조끼가 부풀어 올라 있는 걸 보니 암기 역시 다룰 줄 아는 듯했다.
비밀정보국 영창英廠의 신입 에이전트인가. 마이크로프트의 밑에서 일하는 자겠지.
세 번째 후기지수는 사내의 맞은편 코너에 선 할버드를 비스듬히 세워둔 붉은 옷의 여인.
뻣뻣한 기립 자세를 유지 중인 그녀는 얼굴 전체를 덮는 도금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곰 가죽 모자를 착용하고 있어 젊은 나이에 적의위Queen's Guard에 들어간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은 내 뒤에 선 녹색 의복과 부엉이 가면을 착용한 남자였다.
활과 화살통을 매고 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사파로 취급받다 런던무림맹과 왕립무학회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정파의 일원이 된 녹림도Merry Men.
벌써 용봉지회에 참가할 정도로 다른 문파나 세가와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드레이크 가문의 상속자는 상반신이 완전히 뜯겨 나갔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상승 무공을 익혔으며 이곳에 모인 후기지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고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강자의 몸뚱이를 한 번에 터뜨려 죽이기 위해선 폭발물 혹은 대량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나는 곰방대에서 한 모금 연기를 빨아들이고 말을 이었다.
“드레이크가 미친 게 아니고서야 폭탄을 삼켰을 리는 만무하니 조건을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2층 귀빈석에 계시던 여러분. 아니면 용봉지회에 참석한 후기지수 중 피해자보다 강한 이들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뜻이죠.”
내 주위에 있는 후기지수 중 이번 살인과 무관한 이들은 마술사가 관객석에서 뽑아온 조수와도 같은 역할을 맡게 된다.
범인을 모자 속 비둘기처럼 끄집어낼 마술사는 당연하지만 바로 나.
그리고 마술에 있어 조수의 역할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 법이다.
“만일 귀빈석에 계시던 분 중 누군가가 그만한 공력을 사용했다면 금방 주위에서 알아챘을 겁니다. 사람 하나를 터뜨려 죽일 수 있는 수준의 내력이니 티가 나지 않을 수 없죠. 귀빈석에 있던 전원이 한 패라면 가능하겠지만 굳이 햇병아리 하나 죽이겠다고 왕립무학회와 샤프롱 여러분이 손을 잡을 리는 없습니다. 고로, 범인은 2층이 아닌 아래층에 있었다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내가 거기까지 말하자 링의 모서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던 후기지수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아까 내가 지팡이로 원을 그리며 범인이 이 안에 있다고 선언한 걸 비유로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살인자가 내 반경 5 야드 안에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틈틈이 비무를 지켜본 제 분석에 따르면, 여기 계신 네 분의 무위는 사망한 드레이크 가문의 상속자보다 뛰어납니다. 피해자가 방심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일격에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할 수 있겠죠.”
내가 말을 마치자 조심스럽게 적의위Queen’s Guard 소속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궤변입니다. 고작 그런 빈약한 논리로 누명을 씌울 생각이라면 적의위의 명예를 걸고 생사결을 청하겠습니다.”
“아직 범인을 지목한 것도 아닌데 반응이 과하시군요.”
-쿵!
그녀는 창 자루로 바닥을 두드려 내 말을 끊었다.
“애초에 저 놈팡이가 무엇에 당했는지 목격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평소부터 비무 전에 영약을 복용하는 등 비겁한 짓을 일삼던 녀석입니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약의 힘에 의지하다 부작용을 일으킨 게 분명합니다.”
“피해자와 면식이 있던 모양이군요.”
내가 묻자 적의위의 여고수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드레이크는 작년 영약의 힘으로 저를 꺾은 다음 구혼을 시도했습니다.”
“흥미롭군요.”
“놈의 콧대를 꺾기 위해 일 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모자에 맹세코 살인을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가면을 벗지 않은 이유, 역시나 피해자와 면식이 있어 그랬던 모양이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도 됐는데,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먼저 나선 거겠지.
하지만, 내 말을 끊어먹은 것 치곤 아무 영양가도 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범인으로 몰릴까 봐 불안한 건 알겠는데 날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는 삼류 탐정으로 생각한 건 용납할 수 없다.
“여협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럼, 마저 이야기를 마쳐도 될까요?”
“큭……!”
대놓고 망신을 주자 적의위 출신의 여인은 이 가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보아하니 평소 피해자에게 개인적인 은원을 품고 계신 분이 한두 명이 아닐 듯합니다. 혹시 다른 세 분도 비슷하신지요?”
해당 사항이 없는 양광공녀는 가만히 있었지만 남은 두 사내가 반응을 보였다.
영창Secret Intelligence Service 요원은 재밌다는 듯이 킬킬댔고, 녹림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의위의 여인이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은 걸 보고 사정을 감추는 쪽이 수상해 보일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범인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솔직하게 악의를 인정하는 걸 보니 고인이 된 드레이크가 생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고인의 명예를 위해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지간히 망나니였던 모양이군요.”
내가 말을 마치자 해군 군복을 입은 노인이 분노와 수치심에 고개를 떨구는 게 보였다.
그 곁에 서 있는 건 레스트레이드.
아까 내가 시킨 대로 드레이크의 샤프롱을 데리고 온 것이다.
“피해자를 미워하던 사람이 많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중 누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아내려면 몇 가지 더 고려해 볼 사항이 있겠죠. 조금 전 여협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중 누구도 드레이크가 무엇에 당해 죽었는지 보지 못했으니까요.”
다음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살인에 사용된 수단이다.
“저는 제자리에 남은 피해자의 하반신을 살펴보았습니다. 허리 부근에서 일어난 폭발이 상반신 전체를 고깃덩이로 만들어 놓았지만 화약의 냄새는 나지 않았습니다. 체내에 주입된 영약이 강력한 화학반응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고려했으나 잔류물 역시 확인하지 못했고요.”
화약이나 약물이 폭발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누군가가 그의 몸에 공력을 주입해 체내에서 터뜨렸다는 겁니다.”
나는 경찰들이 링 위로 옮겨 둔 커다란 곰 인형 모양의 얼음 조각상을 향해 돌아섰다.
조각상은 바닥에 앉은 자세 그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눈에 공이 많이 든 물건인 걸 알아볼 수 있었지만 사해동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선 교보재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팡이에서 검을 뽑아 그 끝을 곰의 발에 찔러 넣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퍼엉!
다음 순간, 검을 꽂은 위치보다 족히 2야드는 위에 있던 조각상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고개를 돌리자 방금 펼친 기예가 무엇인지 알아본 양광공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내가중수법.
상대의 체외를 타격함과 동시에 공력을 흘려보내 체내를 훼손하는 절기로, 나를 포함해 일류에서 절정에 달한 무인이라면 상당수가 익히고 있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정확도에 차이는 있더라도 이 정도는 가뿐히 해내실 테죠. 다만, 여기서 중요한 건, 공력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매개체입니다.”
나는 이번엔 조각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다음 몸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곧게 뻗은 주먹과 조각상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그 표면에는 내 주먹과 똑같은 모양의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공기를 매개체 삼아 권기를 쏘아 내도 대상을 안쪽부터 터뜨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듣자하니 왕림Kingswood을 지키는 숲지기들의 초식 백보신권1200 Inch Punch조차 체표를 타격하는 데에 그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백보신권의 기본적인 원리는 스승에게 배웠지만 아직 본질적인 깨달음을 체화하지 못해 흉내를 내는 게 고작이다.
백 걸음은커녕 아직 10피트가 한계라 이런 곳에서 선보이기 부끄럽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리하면 손이든 발이든, 아니면 다른 병장기든. 직접 피해자의 몸에 닿지 않는 한 저런 방식으로 폭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째서인지 링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맙소사.”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저 홈즈라는 사내, 왕림의 비기마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
백보신권이 워낙 알려진 정보가 적은 초식이어서 그런지 왕림의 고수들이 들었다간 코웃음 칠 소리를 하고 있다.
오해를 정정할 시간은 없으니 일단은 마저 이야기를 끝내야겠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우리 중 그 누구도 피해자의 몸에 무기가 닿는 것을 보지 못했죠. 피해자를 일격에 터뜨려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 다섯이나 있었으나 모두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무 중이었거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하자, 링 위에 있던 후기지수들을 포함해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건 녹림도였다.
“형씨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중 누구도 드레이크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그럼 아까 이 안에 범인이 있다고 한 건 대체 무슨 뜻이지?”
“말씀드린 것처럼 범인은 여전히 이곳에 있습니다. 일단은 그 전에 밝혀야 하는 비밀이 하나 더 있긴 합니다만.”
-쿵
나는 검을 지팡이에 되돌린 다음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왓슨.”
“여기 있네.”
“미안하지만 자네 도움을 빌려야겠군. 지공指功을 두세 발 정도 부탁하네. 한 발당 남은 공력의 2할 정도를 담으면 충분하겠군.”
“지공을 대체 어디에 대고 쏘란 말인가.”
“잘 보게.”
나는 지팡이를 던졌다.
정면에 보이는 무도회장의 벽, 그중 삼분지 일에 달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거울을 향해서.
-콰앙!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진 거울.
야명주와 가스등이 달린 샹들리에의 불빛을 반사하며 비처럼 쏟아지는 파편 너머에서 수십 명의 신사 숙녀가 모여 앉은 그늘진 계단식 좌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머지 두 곳을 부탁하네. 왓슨.”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선 먼저 도박꾼들이 우릴 두고 베팅하던 비밀 관중석을 공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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