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4화 (24/110)

024. 골육상잔

Domestic Violence

진실은 비무대와 술병 바닥에 있다.

-영국 속담-

* * *

“대, 대체 어떻게…….”

낭패한 목소리로 중얼대는 자가 하나.

그 뒤에는 아까 하이랜더가 양광공녀에게 패했을 때 종이를 태우고 모습을 감춘 왕립무학회 회원이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호라. 그런 거였군.”

-탕탕탕!!!

내 의도를 짐작한 왓슨이 곧바로 다른 방향에 대고 탄지공을 발사했다.

사방에 설치되어있던 거울이 거의 동시에 깨져나가자 이번에도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설명이 필요하겠군. 어떻게 알아낸 건가.”

“아까 재밌는 걸 주워서 말입니다.”

나는 헨더슨 경에게 아까 회수한 종잇조각을 들어 올렸다.

“경마장의 마권과 유사한 종이를 누군가가 불태우던 걸 발견했습니다. 전성기 때보다 이용객이 줄어든 올맥이 새로운 돈벌이를 시작한 게 아닐까 싶더군요.”

“설마……?!”

“예. 도박장입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후기지수의 비무는 화제성이 뛰어납니다. 베팅하려는 사람이야 넘쳐났겠죠.”

태우다 남은 종이가 베팅권의 모서리라는 걸 확인한 나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 없이 비무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딘가에 존재할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정답은 가까운 곳에 숨겨져 있었다.

벽에 설치된 거울이 한쪽에서 반대쪽을 일방적으로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단방향 거울One Way Mirror이고 그 너머에 비밀 관중석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돈이 오가는 도박장에는 대부분 승부 조작을 위한 속임수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멀리서 파티의 주최자인 웨넘사 대표가 뒷걸음질 치는 게 보였다.

“움직이지 마!”

“커흑!!”

하지만 그가 도망치기 전에 제때 그렉슨 경감이 다리를 걸어 고꾸라뜨렸다.

“너무 험하게 다루진 말게, 그렉슨. 그가 살인을 저지른 건 아니니까.”

나는 앞서 많은 이들을 용의선상에 세운 다음 2층의 귀빈석부터 1층의 네 후기지수까지 차례대로 배제했다.

이는 전부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을 범인이 내가 헛다리를 짚었다고 착각해 무리해서 탈출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속임수.

그리고, 승부 조작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장치를 언급한 지금.

놈은 마침내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후기지수와 샤프롱을 모두 매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올맥 관계자들에겐 굳이 정보가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 없이 승부를 조작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나는 부서진 얼음덩이 중 하나를 집은 다음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빠르게 녹아내리는 얼음을 들고 시체가 있던 자리로 걸어가자 발밑에 고인 피 웅덩이에 맑고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찾았다.”

투명한 얼음물이 혈액을 밀어내며 그 너머로 링 바닥이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음을 녹인 물은 금세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끈적이는 핏물만 있을 땐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물을 사용해 확인하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시체를 치울 때 확인했는데, 양쪽 발바닥에 가느다란 날붙이로 찔린 상흔이 남아 있더군요. 승부 조작을 위해 바닥에 작은 구멍이라도 만들어 둔 게 아닐까 의심이 갔습니다. 미량의 산공독을 바늘에 발라 찌르기만 해도 당한 쪽이 패배할 확률이 오를 테니까요.”

범인은 피해자의 스멜링 솔트에 통각을 잃게 만드는 독을 타고 감각이 없는 양 발바닥을 바늘로 찔렀다.

그다음은 곧바로 내가중수법을 사용. 대량의 공력을 흘려보내 체내에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살수는 처음부터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 발밑에 말이죠.”

링을 들어 올리는 기관장치가 존재하는 이상, 그 아래에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기관장치를 관리하는 자는 현재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이 붙잡아 두고 있으며 지하 또한 봉쇄되었다.

이제 범인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마저 두더지를 사냥해 볼까요.”

나는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단전의 공력이 전신의 기경팔맥을 빠르게 순환하기 시작했다.

집중된 내력은 단단한 기의 덩어리로 변해 용천혈에 깃들었고, 새까만 소용돌이가 그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소천마의 별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초식은 가르쳐줄 수 없다.’

‘천마天魔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냐고? 알고 싶다면 먼저 날 이겨 보던가.’

‘장담컨대 이 절초만 익힌다면 용봉지회에서 네놈이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을 거다.’

머릿속에 되살아나는 스승의 목소리.

이것은 망할 노인네가 알려 준 바리츠의 오의 중 지금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절초.

스승은 이 불완전한 초식의 위력만으로도 용봉지회를 평정할 수 있다고 내게 장담했다.

“결국은 당신 뜻대로 이곳에서 선보이게 되었군.”

나는 어지간한 충격엔 꿈쩍도 하지 않는 비무대의 바닥을 향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천마군림보Diablo Step.”

-콰아앙!!!!

비무대가 무너져 내리며 지하에 숨겨진 비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매년 용봉지회를 비롯해 런던의 신사 숙녀들이 참석하는 대형 무도회가 진행되는 윌리스 룸의 뇌대Ring는 견고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나무가 깔린 건 어디까지나 겉면뿐.

그 아래에는 통째로 가공된 거대한 청강석 바위가 숨겨져 있었다.

그 두께는 어림잡아 4피트.

암석을 일격에 부수고 아래에 숨은 범인을 기습하기 위해, 나는 지닌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야만 했다.

-쿠구궁!!

우리에겐 바닥이지만 범인에겐 천장이었던 비무대가 천마군림보에 의해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크흑…….”

뇌대 아래에 숨어 대화를 엿듣고 있던 범인은 부서진 파편 중 하나에 어깨를 얻어맞아 비틀대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살인자는 피해자만큼은 아니어도 꽤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는데 양손에 자신의 키만 한 기다란 철침을 들고 있었다.

“……역시 천마군림보를 제대로 사용하는 건 아직 무리군.”

다만, 내 관심은 잠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바리츠를 대표하는 보법이자 절기.

초식의 묘리Principia를 완벽하게 터득하면 발을 한 번 구르는 것만으로도 언덕을 평지로 만들 수 있으며 스승은 실제로 그걸 내 눈앞에서 해냈다.

그의 천마군림보가 내가 펼친 것과 위력이 전혀 다른 건 비단 단전의 내공 중 5할밖에 사용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천마는 동방의 이교가 섬기는 최강의 무인이 아니었습니까? 어째서 스승님이 천마를 자칭하시는지요.’

‘설마 마교 같은 게 실존한다고 믿은 건 아니겠지. 마교는 일월신교를 두려워한 권력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스승님의 별호Call Sign는 어째서 천마인 것입니까.’

‘평생에 걸쳐 맞서야 할 적. 나는 놈들을 벌하는 존재이기에 천마天魔인 게지.’

그 적이 대체 누굴 가리키는 건지, 때가 되면 알려 주겠다고 스승은 말했지만 나는 결국 그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스승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메이드를 데리고 세계 일주를 떠난 까닭이었다.

초식의 명칭에 천마가 포함된 만큼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위력을 낼 수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구결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사부가 어떤 의념을 담았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천마군림보만이 아니라 바리츠의 다른 절기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겠지.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알려 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정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그보다 천마군림보를 사용하느라 비효율적일 정도로 힘을 많이 사용하고 말았다.

초식만 완전했다면 바위를 부수고도 충분히 내공이 남아 있었을 텐데.

범인을 제압해야 하는 지금, 남은 내공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건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물론 대비책은 준비해 두었다.

“뭣들 하고 계십니까, 제압하지 않고. 여러분께 누명을 씌울 뻔한 자가 저기 있잖습니까.”

“…….”

“…….”

“…….”

내 곁에는 실력이 뛰어난 후기지수 셋과 정체를 숨긴 고수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그들에게 마술사의 조수와도 같은 역할을 맡겼다.

조수의 첫 번째 역할은 미스리딩誤導.

나는 그들을 링 위에 세워 둠으로써 범인을 방심하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역할은 바로 보조.

조수에겐 마술사를 도와 쇼를 진행할 책임이 있다.

“적은 어깨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넷이서 덤벼든다면 손쉽게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살인자는 단 한 방에 일류 고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쪽엔 양광공녀를 포함해 실력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왜…….”

“주위를 보십시오.”

무너진 링 주위에선 백여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숨을 죽이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넷은 불타는 의협심이 시키는 대로 강호의 도리를 어지럽히고 용봉지회에서 살인을 저지른 무뢰배를 제압해 줄 것이다.

“……이, 이야아압!!”

눈치를 보던 후기지수들은 적의위의 여인을 시작으로 범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린 살인자는 남아 있던 공력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채 15초도 지나기도 전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끝난 겁니까?”

근처에서 눈치를 보던 레스트레이드가 다가와 물었다.

“그렇다네. 이자를 체포하게. 기관장치의 비밀을 알려 주고 들여보낸 공범은 저기 거울 뒤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하나일 거야.”

“피해자의 패배에 큰돈을 건 사람을 찾으면 되겠군요.”

“놀랍군. 자네가 머리를 쓸 줄 안다곤 상상도 못 했네.”

“…….”

레스트레이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홈즈 씨. 범인은 대체 피해자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살인까지 저지른 걸까요?”

그런 것까지 굳이 설명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새 다가온 왓슨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탓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내가 무엇을 알아냈는지 말해 주기로 했다.

“나는 앞서 드레이크의 첫 번째 비무Duel를 지켜보았네. 그는 상대의 출수를 기다렸다가 대처하는 ‘후의 선’을 고집하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리 드레이크가 비무가 시작될 때 기준선 위에서 멈춰 있는 걸 알아도 그 아래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바늘로 족저足底를 찌르려면 그의 버릇을 자세히 알고 있어야만 하네. 무엇보다 범인은 피해자의 스멜링 솔트에 독을 탈 수 있는 사람이었을 테지. 즉, 평소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있었다는 뜻일세.”

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자네라 해도 용봉지회 참석자의 명단은 확보해 두었겠지?”

“여깄……습니다.”

나는 명단에 표시된 이름을 훑어보다 유일한 불참자를 찾아냈다.

“여깄군. 조너선 드레이크. 피해자의 친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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