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가면을 벗다 (1)
Unmasked (1)
천륜을 거스르고 강호의 도리를 저버린 죄로 오라를 받아라. 저놈을 잡아라. 대들거든 사정 볼 것 없다. 요절을 내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의처도륙기Othello>-
* * *
“아……!”
“차남이 자신보다 돋보이는 걸 두려워한 피해자가 참석을 막은 모양이야.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형제를 살해하다니, 과연 피는 속이지 못하는군.”
사실 난 죽은 드레이크의 몸에 남은 상처를 보자마자 앱섬 더비에서 그 부친의 손에 죽은 경주마의 사체를 떠올렸다.
같은 내가중수법을 사용하더라도 문파에 따라 남기는 흔적은 천차만별이다.
나는 비슷한 상처가 남은 시체를 보고 처음부터 드레이크 가문의 누군가가 범인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 예상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드레이크 가문의 샤프롱은 어디 계신지.”
“……여기 있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아까 본 해군 제복을 입은 장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저기 누워 있는 자는 프랜시스 조나선 드레이크가 맞습니까?”
“그렇소. 내 작은 조카요…….”
그는 금방이라도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젊은 인재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인범으로 잡혀가게 생겼으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만.
“제기랄……!”
한편 후드가 벗겨진 채 힘없이 누워 있던 범인은 수갑을 든 레스트레이드가 다가가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허튼짓하지 말고 순순히 죄를 인정해라.”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몰려드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아직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나를 체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놈은 예고 없이 품에서 오래된 구식 머스킷 총을 한 자루 꺼내 들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봤다면 당장 무릎을 꿇어라!! 스코틀랜드 야드의 천한 개자식들아!!”
“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신물信物의 등장에 나를 포함해 지켜보던 모두가 제자리에서 굳었다.
도금된 총기에는 튜더 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역사에 그리 조예가 깊지 않은 나조차 저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엘리자베스 선왕先王 폐하께서 내리신 면사금총免死金銃이 아닌가?!”
대항해시대 시절 대영제국이 누리는 황금기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여왕께선 충직한 신하들의 가문에 봉토와 함께 면사품免死品을 내렸다.
사략함대를 이끌던 드레이크 가문의 시조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의 면사금총Golden Gun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물건이었다.
면사품의 소유자는 반역죄가 아닌 이상 그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1회에 한해 사면받는 궁극의 특권을 얻게 된다.
“어쩐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 싶었는데 마지막 수를 숨겨 두고 있었나.”
이로써 런던 광역 경찰청은 조너선 드레이크를 체포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 셜록 홈즈인가 뭔가 하는 삼류 탐정 나부랭이도 꼴좋게 되었군!! 네놈은 나중에 단단히 손 봐주도록 하지!!”
조너선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집을 나설 때 몰래 저 머스킷 총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하하하!! 빅토리아 여왕 폐하께서 직접 나서지 않으시는 한은 그 누구도 날 심판할 수 없다!!”
다만,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다리까지 절뚝이며 승리를 선언하는 녀석의 모습이 내 눈에는 한없이 가엾어 보였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놈을 저버리고 말았다.
“자네, 방금 금상폐하今上陛下가 명하신다면 얌전히 잡히겠다고 말한 건가?”
“그래! 네놈 따위가 폐하를 모셔 올 수 있다면 모셔 와 보던가!”
나는 고개를 돌려 양광공녀Lady Sunshine를 쳐다보았다.
“충고 고맙네. 참으로 좋은 생각이야.”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잠시 굳어 있었지만 금방 내 의도를 알아챘다.
“읍읍!! 읍읍읍……!!!”
숙녀분께선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열심히 양손 검지로 작은 X자를 만들고 계셨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알 수 없었다.
“스으으읍―”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남은 내력을 폐와 목에 순환시켰다.
정확한 발음과 억양을 지킴과 동시에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선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내밀히 용봉지회를 찾으신 특별한 귀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양광공녀가 다급히 팔을 바동대며 입술을 달싹였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말을 마저 마칠 생각이었다.
-찡긋
양광공녀에게 짧은 윙크를 마치고 사자후를 펼쳤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의 대공녀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비이자 작센의 공비, 인도의 여황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 그리고! 남해 지브롤터암의 검후 되시는 빅토리아 여왕 폐하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신민들은 최대 최상의 예우를 갖춰 폐하를 맞이하십시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폐하에게 예를 갖추었다.
-쿵!
“런던 광역 경찰청장 에드먼드 헨더슨이 금상폐하를 뵙습니다!!”
“적의위의 블라이드 워커 중위가 지존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
.
.
“대영제국의 적법하고 영광스러운 통치자 되시는 빅토리아 여왕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Long Live The Queen, God Save The Queen!!!”
3초도 지나지 않아 나를 제외한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환호성을 발했다.
“이, 이이익, 이잇…….”
이쪽을 바라보는 여왕 폐하의 존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존께서 감히 강호의 도리를 어지럽힌 무뢰배를 눈앞에 두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계신다는 증거였다.
아아, 이 얼마나 정의로운 성군의 모습인가.
여왕 폐하의 치세는 영원하리라.
“수사 자문가 셜록 홈즈가 금상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나 역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예를 취했다.
내가 양광공녀의 정체가 빅토리아 여왕 폐하라고 눈치챈 건 드레스에 묻은 애완동물의 털을 확인한 직후였다.
장시간 영약을 복용한 동물이 영물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흔하지만 영물로 변한 앙고라 고양이와 보더콜리 두 마리가 함께 지내는 곳은 전 유럽을 통틀어도 버킹엄 궁전 말곤 없다.
장화어묘長靴御猫 화이트 헤더와 개과천선犬科天仙 샤프&노블.
저 셋은 폐하께서 공식 석상에도 데리고 나올 정도로 충성심과 무공이 모두 증명된 고수로 영국 전역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폐하께서 착용하고 있던 드레스는 유행이 최소 수십 년은 지난 물건.
이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 나는 반로환동한 빅토리아 여왕 폐하가 유희를 나선 거라고 추리했다.
물론, 폐하께서 ‘일신의 즐거움을 위해’ ‘충동적으로’ 후기지수들의 모임에 발을 들이셨다는 불충한 생각을 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깊은 속내가 있으셨겠지.
“빅토리아 여왕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Long Live The Queen, God Save The Queen!!!”
몇 번이고 이어지는 우레 같은 인사에 여왕 폐하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났다.
“그만.”
폐하는 가면을 벗고 노기가 가득한 용안을 드러내셨다.
아무리 흔치 않은 폐현陛見의 기회라고 해도 범죄자를 속히 단죄해야 하는 상황에서 비효율적일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신민들이 어리석어 보인 까닭이리라.
“하아…….”
폐하께선 강호의 도리가 크게 어질러진 것을 보시고 통탄을 금치 못하셨다.
그런데,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은 이들 중 감히 겁도 없이 폐하의 깊은 심사心思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폐하께서 정체를 감추고 용봉지회에 참석하시다니.”
“그야 대영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인재들을 보러 오신 거겠지. 신분을 숨기신 건 젊은이들이 긴장하지 않도록 배려해주신 게 틀림없네.”
제법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지만 이만한 거리에서 내 귀에 들린다는 건 폐하 역시 듣고 계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는 가네만. 어째서 화경의 경지를 이룩하신 분께서 굳이 후기지수인 척 비무에 참가하신 거지? 2층에 계셔도 되었을 법한데…….”
“듣고 보니 묘하군.”
“설마, 반로환동하신 김에 유희 삼아 나들이 오신 건―”
-고고고고고
사내들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폐하의 발밑에 깔려있던 매끄러운 나무 바닥이 가루로 변하며 허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감히 함부로 지존Queen Of The British Empire의 깊은 뜻을 잘못 헤아리려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폐하께선 분노를 터뜨리시는 일이 없었다.
“아아, 이제 알겠어…….”
제때 여왕 폐하가 용봉지회를 찾으신 목적을 깨달은 후기지수가 있던 덕이었다.
“폐하께선 나 같은 미숙한 후기지수들에게 가르침을 내리시기 위해 오셨던 거야……!”
“……?!”
폐하와의 비무에서 패배한 맥마한 세가의 천재 소년은 자신이 화경의 고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췄다.
“폐하. 제가 좀, 울어도, 괜찮겠습니까.”
“허락하노라.”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여왕 폐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닭똥 같은 감루感淚를 흘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종북파 특유의 중후한 공력이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는데 전신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니 자신의 턱을 후려쳐 기절에 이르게 한 폐하의 일격을 떠올리고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한 대 얻어맞기만 해도 깨달음을 얻는 걸 보니 화경이 대단하긴 한가 보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왓슨이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위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와 조우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드물다 보니 일격을 선사 받은 것만으로도 대오각성Eureka할 수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리라.
“당연한 소리를.”
아마도 저들은 예수께서 침을 뱉기만 해도 소경이 나았다는 성서의 기록을 잊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기연이 따랐다 해도 고작 열일곱 살에 일류의 경지에 오르다니. 과연 역대 최연소 용봉지회 참가자답군. 장래가 기대될 따름이야.”
“홈즈,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앵거슨 맥마한의 나이가 17세라고 했네. 아까 참석자 명단을 보고 확인했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왓슨의 입에서 막말Rough Words이 새어나왔다.
“저게 어떻게 열일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