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6화 (26/110)

026. 가면을 벗다 (2)

Unmasked (2)

강호의 모든 것이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비망록이었다.

-신필삼자매 에밀리 브론테, <장풍의 언덕>-

* * *

폐하께선 앵거슨이 제때 하해River Thames와 같은 성의聖意를 이해한 걸 보시고 노기를 거두셨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헛소리를 지껄인 이들은 화경의 고수에게서 직접 기연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턱이 돌아가는 걸 감수해야겠지만.

“과연 여왕 폐하께선 귀족과 젠트리를 가리지 않고 돌보시는군!”

“위대하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 만세!!”

“흠흠…….”

한층 유해진 표정으로 돌아온 폐하께선 헛기침 두어 번으로 소란스러운 무도회장을 정리하셨다.

석식실에서 돌아온 왕립무학회의 고수들은 물론 샤프롱과 후기지수, 그리고 단방향 거울 뒤에 숨어 있던 도박꾼과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까지 모두가 그 옥음Queen's Speech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런던 광역 경찰청장 에드먼드 헨더슨은 고개를 들라.”

“폐하의 충직한 종, 에드먼드 헨더슨이 여기 있사옵니다.”

폐하가 경찰청장을 부르자 아까부터 새파랗게 질려있던 살인범 조너선 드레이크의 얼굴이 아예 블루베리를 방불케 하는 색깔로 변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독당한 줄 알 것이다.

“조너선 드레이크는 대영大英의 지엄한 법도와 런던무림의 규율을 어긴 것도 모자라 잔학무도한 방식으로 혈육을 살해해 천륜을 거스른 죄인이니, 에드먼드 헨더슨과 휘하 경감들은 속히 그를 구속해 연행, 엄히 징치하여라.”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As Your Wish, Your Majesty.”

면사금총Golden Gun 앞에서 잠시 두려움을 보였던 경감들은 폐하의 명에 힘입어 기세등등하게 살인범을 에워쌌다.

“폐, 폐하!! 면사금총에 깃든 엘리자베스 선왕 폐하의 유지를 무시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튜더 왕조 시절부터 대영제국을 섬겨 온 충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조너선 드레이크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 입으로 금상폐하에겐 심판당해도 불만이 없다 했어도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자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들먹여 저항하는 것이다.

“……일리가 있어.”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폐하께선 순순히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셨다.

-저벅

여왕 폐하는 아무 말도 없이 온화한 얼굴로 살인범을 향해 걸어가셨다.

범인을 에워싸고 있던 경감들은 그 의도를 감히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일단은 길을 비키고 고개를 조아렸다.

본래 내가 살던 세계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쪽 세상의 여왕 폐하는 화경의 고수.

조너선 드레이크의 실력으로는 폐하의 머리카락 한 올도 해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흉기일지고.”

폐하께선 조너선이 형제를 살해하는 데 사용한 장침을 집어 들으셨다.

아까 조너선이 내가 링 위로 불러온 후기지수들에게 당해 피떡이 되며 놓친 바늘은 몇 번인가 공격을 막아 내는 과정에서 휘고 끝이 무뎌져 있었지만, 이어진 여왕 폐하의 말씀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이렇게나 날카로운 무기를 휘두르면 필히 다치는 이가 나오는 법이지.”

보아하니 폐하께서 생각하는 예리함의 기준은 나와 사뭇 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저리 말씀하시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고고고고고……

여왕 폐하께선 오른손으로 장침을 들고 무시무시한 양의 공력을 쏟아부었고, 이윽고 바늘 끝에 예리한 침강針罡이 돋아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앙!!!!!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거대한 굉음과 충격이 무도회장을 휩쓸었다.

으깨진 샹들리에의 파편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폐하께선 개의치 않고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하셨다.

-콰아앙!

-쾅!

-콰콰쾅!

바로, 거대한 힘을 머금은 강기의 바늘로 체했을 때 자극하는 왼손 검지 끝의 십선혈十宣穴을 여러 번 찌르신 것이다.

“흠. 이래도 안 되는가.”

폐하는 잠시 당신의 손가락을 주시하며 한숨을 쉬셨지만 이내 오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장침을 내리쳤다.

-콰콰콰콰콰콰!!!!!!!!!

충격파에 부서진 바닥의 파편이 이리저리 흩어지다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좋아. 됐군.”

채 5초도 지나지 않아 초토화된 무도회장.

여왕 폐하께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철선을 펼쳐 부채질하자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거센 돌풍에 밀려 무도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헨더슨 경.”

“……예. 폐하. 여기 있습니다.”

시야가 트인 실내를 바라보던 폐하는 경찰청장을 호명하시더니 왼손 검지를 보이셨다.

놀랍게도, 곧게 뻗은 옥지玉指의 끝에 작고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흥분한 탓에 잊고 있었지만 아까 조너선 드레이크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가 휘두른 바늘에 찔려 생채기가 생겼느니라.”

“……?!”

“내 묻노니, 이자는 어떤 죄를 범하였는가.”

경찰청장은 짧은 침묵 후에 고개를 들고 폐하께 아뢰었다.

“폐하의 옥체에 무기를 휘둘러 상처를 입혔으니, 이는 명명백백한 반역죄이옵니다.”

조너선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런 장침 하나로 화경의 고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피해자인 여왕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시는데 감히 나서서 토를 다려는 자가 있을까.

“조너선 드레이크!!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여봐라! 경감들은 이 자를 매우 쳐라!”

헨더슨 경찰청장이 소리치자마자 경감들이 몰려들어 조너선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백팔경감진을 실제로 보는 것도 모자라 공세 전환까지 구경하게 되다니. 운이 좋군.”

경감들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조너선에게 합법적인 제재를 가한 다음에야 연행을 재개했다.

“이 장침은 금강불괴를 이룬 본녀의 몸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신병이기이니 버킹엄에서 엄중히 보관토록 하겠다.”

폐하께선 반역의 대죄를 범한 죄인의 이빨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증거를 인멸하셨고,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이번 용봉지회에 참석한 후기지수들은 성취가 상당하니 이를 치하하노라. 여봐라, 왕립무학회의 노사들은 거기 있는가.”

이어서, 웨넘사와 함께 용봉지회를 주최한 왕립무학회의 회원들이 여왕 폐하의 부름에 응해 고개를 조아렸다.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소천마小天魔 셜록 홈즈와 그 파트너 군필의희軍畢醫姬에게 최상등의 답례품을 수여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남은 답례품 역시 범인 제압에 공을 세운 셋을 필두로 규정에 맞춰 분배하도록 하라.”

“명 받들겠나이다.”

여왕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급사들이 다가와 독각화망Unicorn Salamander의 내단이 담긴 유리 용기를 나와 왓슨에게 하나씩 안겨 주었다.

“폐하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인사를 마치고 마주한 여왕의 눈빛은 아까와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마치, 왕실에 바쳐진 진상품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 척추가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행히도, 빅토리아 여왕께서 내 무례를 추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포핀스.”

폐하가 부르자 샤프롱으로 위장하고 있던 젊은 궁녀가 우산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셜록 홈즈에게 버킹엄 무도회의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여라.”

“존명.”

이쪽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대뜸 무도회에 오라 하다니.

폐하께선 내 의사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양광공녀를 연기할 때 짓던 순진한 미소로 말을 이으셨다.

“다음에 논검 체스라도 한판 두도록 하지.”

“과분한 영광입니다.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수련하겠습니다.”

거절했다간 저기 있는 조너선처럼 될 게 분명했기에 나는 깊게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네 스승만큼은 날 즐겁게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

-펄럭

폐하께서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하녀가 우산을 펼쳤고, 둘의 신형은 윌리스 룸 천장을 뚫고 하늘로 사라졌다.

폐하를 상대로 논검 체스와 비무를 가리지 않고 전승을 거뒀다는 스승의 이야기, 거짓인 줄 알았는데.

“……그 인간이 얼마나 놀려먹었으면 저러실까.”

강호의 은원은 끝이 없고, 스승의 업보는 내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 * *

상승 경공 천상제Jacob’s Ladder를 펼친 궁녀의 손을 잡고 사라진 폐하를 지켜보던 내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딱히 윌리스 룸의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걸 보고 걱정이 든 건 아니었다.

단지, 폐하의 성질을 건드린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심각한 불안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으음…….”

여왕은 스승이 그녀에게 안겨드린 패배감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분노를 오롯이 홀로 받아 내는 건 바로 내가 될 예정이고.

“홈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독각화망의 내단을 얻은 거로 모자라 폐하의 무도회에 초대받다니.”

한편 왓슨은 자신이 겪은 일련의 행운이 믿어지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꿈이라면 악몽이 틀림없군.”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한껏 들뜬 왓슨에겐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단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실력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폐하가 내게 적잖게 화가 나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체를 까발린 게 문제였던 듯하다.

그나마 감수성 풍부한 17세 소년의 진심 어린 눈물에 화가 누그러진 모양이었지만.

다음 달엔 나와 왓슨은 버킹엄으로 불려 가서 여왕 폐하와 불편한 자리를 갖게 되겠지.

나란 인간은 애초에 이런 모임을 선호하지 않아서 문제다. 고매하신 귀족 나리가 모인 앞에서 가식을 떨어야 한다니.

무엇보다 무도회에 높은 확률로 마이크로프트가 참석할 거란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몇 안 되는 껄끄러운 상대. 가능하다면 마주치고 싶지 않다.

“바솔로뮤 터너. 조너선 드레이크의 살인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레스트레이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거울 뒤에 숨어 있던 도박꾼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공범이 끌려가는 게 보였다.

비무대를 들어 올리는 기관장치의 존재를 범인에게 알려 준 사내이리라.

그가 범인이 단순히 승부를 조작하려 드는 건 줄 알고 협조했을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살인이 일어났으니, 인생 참 얄궂기도 하지.

“묘하군.”

끌려가는 공범에 사람들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도박꾼들.

왓슨은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나?”

“아니. 후기지수 몰래 비무의 승패를 두고 도박을 한 사람들에게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해서.”

“도박은 딱히 죄가 아니니까. 자네도 자주 술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다 돈을 잃지 않는가.”

“그건 대체 어떻게…….”

“몇 번 미행해보니 알 수 있었네.”

“……대체 언제?!”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과하다. 회귀 전에 내가 알던 왓슨이 그랬던 것처럼 이쪽 왓슨 역시 도박엔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다.

“물론, 작년 혹은 그 이전에 열린 용봉지회에서 승부조작을 시도한 자가 있을 거야.”

“그래! 승부조작은 법으로 심판받아야 마땅하지.”

“괘씸하긴 해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진 지금은 알 수 없어. 경찰도 이번엔 그냥 넘어갈 걸세.”

“아쉽게 되었군. 하긴 이미 시간이 꽤 지났으니 작년과 그전의 비무에 엮인 승부조작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겠어.”

고개를 끄덕이던 왓슨이 갑자기 내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아까 돌멩이가 긁고 지나간 것 같군. 눈 밑이 조금 찢어져 있네.”

“흠.”

엄지로 천마장의 칼자루를 밀자 드러난 칼날에 얼굴이 비쳤다. 왓슨이 말한 대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 가서 금창약을 뿌려줄 테니.”

그때였다. 왓슨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든 건.

보석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가면을 쓴 그녀는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귓바퀴의 모양과 눈동자의 색이 눈에 익었다.

또 하나,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유난히 붉은 입술 밑에 보이는 점.

“안녕하신가요?”

“…….”

익숙한 얼굴이었다.

회귀 전에 상대했던 범죄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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