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7화 (27/110)

027. 하오문 라이즈 (1)

Afternoon&Moonrise (1)

한 잔의 차와 한 조각의 내단은 황홀하다.

-알렉산더 푸시킨-

* * *

“오늘 보여 주신 활약, 무척이나 인상 깊었습니다.”

여인은 품에서 꺼낸 하얀 손수건으로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고는 그것을 내 오른손에 꼭 쥐여 주었다.

“이건 제가 아끼는 손수건이니 다음에 꼭 돌려주셔야 해요? 아시겠죠?”

“…….”

차마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후기지수들의 틈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다.

“……홈즈. 저 숙녀분은? 아는 사람인가?”

왓슨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펼친 손수건에 자수로 새겨진 이니셜을 보기 전부터 이미 여인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잠시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게. 왓슨.”

나는 무작정 출입구에 몰린 인파를 헤치고 무도회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찾는 여인의 모습은 어두운 밤거리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늦었나…….”

어째서 ‘그 여자’가 이곳에 있는 걸까. 회귀 전에 살던 세계에선 한참 지난 다음에야 마주쳤는데.

고민해 봤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손수건을 돌려달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갔다.

내가 명단을 확인한 걸 보았을 테니 이니셜만으로도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겠지.

“골치 아프게 되었군…….”

이쪽 세상에서도 엮이다니. 지긋지긋한 악연이다.

이번엔 부디 별일 없으면 좋으련만…….

* * *

건물 안으로 돌아온 나는 왓슨과 함께 출입구를 지키고 자리를 뜨던 각 문파와 세가의 샤프롱에게 명함을 뿌렸다.

기왕 가면을 벗고 추리를 선보인 김에 공격적 영업을 해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사건으로 잠재적 고객이 꽤 늘었을 터.

모리어티의 단초를 잡기 전까진 최대한 유명세를 타지 않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이렇게 된 이상 너무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자금과 사회적 지위를 서서히 확보해나가는 수밖에.

명함 배포를 마친 우린 곧바로 마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어서 이리 와보게, 홈즈.”

돌아오는 내내 넋을 놓고 있던 왓슨은 어째 집에 돌아오자마자 활기를 되찾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 웃통을 벗기더니 맥을 짚고 청진기를 갖다 대는데, 그 모습이 평소처럼 남장한 게 아니라 한껏 꾸민 차림이었던 탓에 민망할 따름이었다.

“으음. 이상하군. 분명 과도하게 내력을 소모해 단전이 허해진 줄 알았건만.”

“그러게 내가 별일 없다 하지 않았는가.”

뜻밖의 장소에서 ‘그 여자’와 마주친 탓에 놀랐을 뿐인데, 왓슨의 반응이 너무 과해 정말로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하고 말았다.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마치 죽을병에 걸린 사람 같아 걱정했다네.”

잠시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라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호들갑은.

“…….”

아니. 호들갑을 떨어줄 사람이 곁에 있어 주어서 다행인가.

“그런 일 없대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운을 걸치자 왓슨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돌아서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군. 용서해 주게.”

“이미 처음 만난 날에 다 보아놓고서 새삼스럽군.”

“그, 그건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네……!!”

“게다가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같은 사내인 것처럼 대해 달라고. 나는 자네를 유능한 의사이자 군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네.”

존 왓슨이 아니라 제인 왓슨이어도 그녀가 최고의 조수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그리고, 나의 친구라는 사실도.

“홈즈…….”

왓슨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말하더니 후끈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하며 자신의 침실로 걸어갔다.

-퍽퍽퍽퍽퍽!!!!!

“이야압!! 이야아아아아압!!”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근거로 추리하건대 그녀는 이불과 베개에 공력을 실은 주먹과 발을 내지르며 권각술을 펼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기치 못한 사건과 조우한 탓에 스트레스가 쌓인 게 틀림없다.

“…….”

잠시 후,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왓슨이 평소처럼 가짜 콧수염을 달고 밖으로 나왔다.

피곤한지 역용술은 사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무척이나 개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리 오게, 홈즈. 금창약Tiger Balm Powder을 가져왔다네.”

“고맙네.”

왓슨은 물 묻은 수건으로 내 이마와 볼에 생긴 상처를 닦고 정성스럽게 약을 뿌렸다.

세심하고 꼼꼼한 손길. 누군가의 온기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가 등을 맡기고 싸울 수 있는 붕우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아무리 본래 살던 세상에선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라 해도, 그녀가 나의 친구이자 왓슨의 동생인 이상 절맥증의 희생양이 되게 할 순 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그때였다. 왓슨이 모기만 한 소리를 발한 건.

“아까부터 손수건을 계속 쥐고 있는데, 숙녀분이 마음에 든 건가?”

평소처럼 최대한 낮게 깐 목소리가 아닌, 무도회장에서 대화하던 내내 사용하던 본래의 음색.

“강호에 몸을 담은 자로서 사소한 은원도 잊지 않으려 했을 뿐일세.”

“훌륭한 마음가짐이로군.”

“일면식도 없는 레이디가 피를 닦아 주었으니 나도 무언가 보답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런가. 혹시 아는 사람이었나 싶어 물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게.”

왓슨은 조그마한 두 손으로 내 볼을 쥐고 이리저리 움직여 상처가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었다.

“참. 방금 사소한 은원도 잊지 않는다 했지.”

“그렇네만.”

“내가 이렇게 자네의 상처를 보듬은 것도 반드시 언젠가 보답해 주겠군?”

“당연한 소릴.”

내가 대답하자 왓슨은 빙글빙글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내가 아플 땐 자네가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조하게.”

“친구 사이인데 약조 같은 게 필요하겠나.”

“그래. 친구. 맞아.”

“그러고 보니 아까 두 노선배의 정체가 궁금하다 하지 않았나?”

왓슨은 그제야 무도회장에서 마주친 왕립무학회 회원들을 떠올리고 손뼉을 쳤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는 왓슨.

나는 한껏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뇌명쌍괴Thunder and Lightning, 라고 들어는 보았나?”

“서, 설마 마이클 패러데이와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노사를 말하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왓슨이 탄성을 발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미 돌아가신 줄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야. 은둔하며 새로운 무리武理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 걸지도.”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나는 뇌명쌍괴보다 배분이 높아 보이던 노인을 떠올렸다.

세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의 내용부터 추리하기에 그의 정체는 아마―.

“…….”

뇌명쌍괴에 관해 듣고 이만큼 놀랐으니 그 노인의 정체까지 왓슨에게 말했다간 기절할 게 틀림없다.

일단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하자.

“과연, 자네가 그곳에서 함부로 두 분의 별호를 입에 담지 않은 이유가 있었군. 만일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면 큰 혼란이 일어났을 거야.”

“자네의 궁금증이 해결되어 다행이야.”

왓슨은 충분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뜻밖의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네.”

“……살인 사건도 자네에겐 유희에 지나지 않는 건가?”

“딱히 사람이 죽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는 데에 큰 기쁨을 느낄 뿐이라네.”

왓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네. 독각화망의 내단에 더해 버킹엄 무도회의 초대장까지 얻지 않았는가.”

왓슨은 자신이 무엇을 받았는지 잊고 있던 듯 화들짝 놀란 얼굴로 테이블 위에 둔 유리 용기 두 개를 쳐다보았다.

“기왕 허드슨 부인이 집을 비웠으니, 자고 일어나 티 룸Tea Room에 들르지 않겠나? 내단을 가져가면 먹기 좋게 잘라 샌드위치로 만들어 줄 걸세.”

“완벽한 운기 애프터눈 티運氣茶頃가 되겠군!”

왓슨은 감격한 나머지 내 손을 잡고 연신 흔들었다.

“오후에 느긋하게 일어나도 괜찮으니 자기 전에 위스키를 한잔 걸치는 게 어떤가.”

“그러고 보니 좋은 날인데 아직 한 모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어.”

“이제 용봉지회도 끝났으니 참을 이유는 없겠지.”

나는 술병을 들어 유리잔에 부었다.

“나의 친구 왓슨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호쾌하게 잔을 비운 왓슨이 향을 음미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그녀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 * *

베이커가를 지난 곳에 위치한 리젠트 파크.

그 서쪽 담장을 따라 북서쪽으로 향하면 세인트 존스 우드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웨스트민스터에서도 특히나 부유한 이들이 모여 사는 서펜타인 대로가 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길가에 줄지어 선 대저택 중엔 최근 들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명소가 하나 있었다.

소문의 발상지는 바로 굵직한 버드나무가 푸르른 가지와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있는 동양풍 정원이 인상적인 그린 윌로우 저택綠柳莊.

저택의 주인은 미국과 러시아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온 유명 오페라 가수였고 이웃들은 그녀가 지역 사회에 새로이 합류한 사실을 반기고 있었다.

그린 윌로우에 기거하고 있는 건 비밀에 싸인 가희歌姬, 녹류장주綠柳莊主.

이 고혹스러운 여인은 공작부인이 여는 것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무도회를 달마다 주최하며 런던 사교계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참이었다.

“무도회 구경은 즐거우셨습니까, 노튼 부인.”

저택 3층의 서재. 보라색 드레스에 몸을 감싼 여인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집사가 우린 나이트 타임 티를 홀짝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건 건 나이 든 집사였다.

“우리끼리 있을 땐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잖아, 윌슨. 시집도 안 간 사람한테 부인이라니.”

여성 중에선 낮은 음역대에 속하는 미성.

녹류장주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집사를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애들러 영애님…….”

윌슨은 짓궂게 웃으며 주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노튼이라는 성은 가짜.

세간에 그녀의 남편으로 알려진 고드프리 노튼은 변장에 능한 여인의 위장 신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여인은 바르샤바 극장의 전직 프리마돈나이자 런던 사교계의 이단아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아니, 문주님Grand Master.”

그 진정한 정체는 세계 각지에서 커피 하우스와 티 룸, 오페라 하우스 등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는 비밀결사 하오문Afternoon Tea Party의 우두머리.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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