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28화 (28/110)

028. 하오문 라이즈 (2)

Afternoon&Moonrise (2)

여고수는 신선과 천마의 합작에 의해 태어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무정혈장복수기Titus Andronicus>-

* * *

“베팅은 잘 풀리셨나요?”

“아니? 전혀.”

집사가 단안경을 밀어 올렸다.

오랫동안 문주를 보필해 온 그였지만 여전히 아이린의 기분을 살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박에 실패했다고 말한 이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물어보는 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윌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려 했지만 주인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안심해. 지금 딱히 기분 나쁘거나 그러진 않아.”

윌슨은 다시 돌아서서 아이린과 마주했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가 늘상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탓에 아이린은 측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알려 주곤 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건 마저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뜻.

윌슨은 다시 아이린에게 물었다.

“……다른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이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페라 가수를 그만두고 나서 무료함을 호소하는 일이 잦아진 영애는 윌리스 룸에서 용봉지회를 구경하고 온 길이었다.

물론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비밀통로를 지키는 올맥의 문지기에게 입장료를 지불하고 비밀 관객석에 들어가 후기지수Super Junior의 비무에 돈을 걸다 왔을 뿐.

무려 하오문下午門의 문주인 그녀가 푼돈에 연연해 할 리는 없다.

경마장과 마찬가지로 도박장은 신사숙녀가 인사를 나누는 사교의 장.

비밀리에 용봉지회를 관람하러 온 다른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의 문주에게 있어 인맥이란 검과 같았고, 무기의 관리를 게을리하는 자는 런던강호에서 설 자리를 잃는 법이었으니까.

“탐정이었어.”

“……?”

하지만 다음 순간, 주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집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탐정이라면, 스코틀랜드 야드의 무능함에 기생하는 버러지들 말씀이십니까?”

“응.”

아이린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문주께서 그런 족속들에게 흥미를 보이시다니.”

윌슨이 생각하는 탐정이란 머리가 아둔하고 일천한 무공밖에 지니지 못한 야만스러운 이들이 직업이랍시고 내세우는 단어였다.

런던에서 탐정을 자칭하는 이들은 관의 인력 부족과 인프라 편중이 야기한 치안 공백을 틈타 고객에게서 막대한 보수를 편취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들 중 대부분은 이류에서 삼류 정도의 실력밖에 갖추지 못한 무인들이었고 경찰이 처리하지 못한 사건을 해결한다는 구실로 범죄자와 다를 바 없는 짓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런 연고로, 탐정을 시체를 뜯어먹는 남만Africa의 하이에나에 빗대는 윌슨의 관점엔 아이린 역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만큼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지만.

“그냥 탐정이 아니야. 자문 탐정이지.”

자문 탐정. 영 익숙하지 않은 단어.

아무래도 새로 생겨난 직업인듯싶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강했어.”

“……그렇다면 더더욱 깊게 엮이지 않는 게 좋겠군요.”

아이린 애들러가 강하다는 표현을 사용한 걸 생각하면 자문 탐정인가 하는 자는 틀림없이 절정이나 초절정 이상의 경지를 이룩했을 터.

그뿐인가.

윌슨은 이번 대의 하오문주가 타인의 지능을 칭찬한 경우를 단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첫 번째가 바로 일월성신교Church Of Asteroid의 교주.

두 번째가 바로 방금 언급된 자문 탐정인가 하는 자였다.

“어째서?”

“잘 아시는 분께서 왜…….”

아이린은 대답 대신 이마를 짚는 윌슨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내비쳤다.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위험과 그에 따르는 보상을 가늠하는 건 그녀의 장기였다.

윌슨은 선대 하오문주가 죽고 아이린이 자리를 물려받은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아이린은 윌슨을 시험했고 결과에 만족했다.

여러 장로와 호법이 물갈이당하는 와중에도 윌슨은 자리를 지킬 수 있던 건 이러한 까닭이었다.

이번에도 그 자문 탐정을 두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윌슨은 그렇게 추측했다.

물론, 전혀 납득은 가지 않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겁니까? 그 자문탐정이라는 남자가.”

하오문은 일반적인 문파와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점조직 형태로 존재하는 거점을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외부의 문파나 개인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윌슨이 생각하기에 무력과 지략이 뛰어난 개인보다 영향력과 정보력을 지닌 자를 문파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쪽이 훨씬 유익해 보였다.

단순히 하오문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거라면 정계의 거물이라든지 더욱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터.

하오문이 다루는 건 무당의 태극보다 더욱 유연한 부드러운 힘Soft Power이다.

폭넓은 정보를 다루는 집단이 애매하게 강한 힘을 지녀봤자 그들의 고객인 정파와 사파 무림인이 경계하게 만들 뿐.

과연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한낱 탐정을 회유할 필요가 있을까.

“있잖아, 윌슨.”

“네. 아가씨.”

“혹시 천마라고 불리던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문제는 아이린이 이번에도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꺼냈다는 사실이었다.

자문 탐정에 이어 천마.

이해할 수 없는 순서와 조합에 윌슨의 두뇌가 잠시 회전을 멈췄다.

“천마입니까. 도시전설이라면, 몇 번인가.”

“도시전설?”

“예. 부끄럽게도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워낙 황당한 이야기밖에 접해 보지 못한지라.”

가담항설Street Gossip, 도청도설Alleyway Rumor.

천마의 별호를 지닌 무인의 이야기는 수십 년 전부터 도시전설이나 괴담처럼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외로이 강호를 주유하며 자신을 꺾을 자를 찾는獨孤求敗 가면 쓴 괴인의 이야기는 듣는 이에 따라 충분히 낭만적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이 일컫기를 천마는.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문파의 본산을 찾아가 비무를 청했고.

견식한 모든 무학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으며.

천하에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대영제일검 빅토리아 여왕조차 그를 꺾지 못했다고 하는데, 윌슨은 이를 시답잖은 헛소리로 치부했다.

천마의 강호행에 관해 알려진 게 없는 건 그가 명예를 가벼이 여기며 행적을 종잡을 수 없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비무를 진행한 까닭이라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뭘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향간의 소문은 대부분 사실일 거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이 얼마나 과장을 더했든 상관없어. 천마는 그 이상으로 강하거든.”

“…….”

아이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차마 문주의 말을 허언이라고 매도할 순 없던 윌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문주는 농담을 즐기지만 정보에 관해선 허튼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없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에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이리라.

“확실해. 그때 본 것과 같은 초식이었어…….”

혼잣말을 중얼대는 아이린 애들러의 눈에는 미약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유럽이 제아무리 넓어도 놈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천마뿐이야.”

윌슨이 눈을 부릅떴다.

아이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선대 하오문주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윌슨으로선 반가워 마지않은 이야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린의 계획이 실현 가능한 것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송구하오나, 문주님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천마가 활동하던 건 수십 년 전이 아닙니까.”

“맞아.”

“그렇다면 노쇠로 인해 그의 기량이 후퇴했거나 죽었을 가능성도 있는 건―”

“몇 년 전에도 목격 정보는 돌았잖아? 나도 직접 천마를 본 사람 중 하나라는 얘길 해 둘 걸 그랬나.”

“천마를 직접 보셨다고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확신에 찬 표정으로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내 눈앞에 그의 유일한 제자가 나타났어. 운명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거겠지.”

문주가 아까 언급한 탐정이야말로 천마의 제자였다.

“천마가 살아 있든 죽었든 상관없어. 그의 제자라면, 소천마 셜록 홈즈라면, 우리의 숙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문주님의 칼이 되기 합당한 자일까요?”

“시험해 봐야지. 스승인 천마가 살아 있다면 그를 시켜 찾아낼 거야. 그게 어렵다면 진전을 이은 소천마를 길들여야겠지.”

“만일, 만일 그를 가질 수 없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가 하오문의 비밀을 파헤치기라도 하는 날엔―”

“글쎄. 만일 주제도 모르고 버릇없이 군다면…….”

아이린 애들러가 손에 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약간의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초승달처럼 호를 그리는 두 눈은 달콤한 목소리 이상으로 웅변하는 중이었다.

* * *

다음날 오후, 나와 왓슨은 느긋하게 베이커가 221b 번지를 나섰다.

독각화망의 내단Seasoned Pill이 상하지 않도록 케이스에 담아 조심스럽게 마차에 탑승.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장장 50분 동안 이동한 다음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왕 폐하께 진상되는 영약을 연구한다는 곳이 여긴가.”

마차에서 내린 우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런던 서남부 리치몬드에 위치한 왕립영약원Kew Garden이었다.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온몸에 좀이 쑤실 지경이었지만 지난밤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사자심법의 부작용을 달래는 것만큼은 쉽지 않았다.

당장 마차를 타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유리 케이스를 부수고 내단을 꺼내 삼키고 싶다는 끔찍한 유혹을 견뎌야만 했으니까.

내가 이지적이고 자제력이 뛰어난 영국신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저기 보이는 큐 가든의 담장을 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3시까지 5분 남았군. 슬슬 가게로 가 볼까.”

왕실의 영약원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오늘 집을 나선 목적은 따로 있다.

“저기 보이는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뉴웬스Newens라는 간판이 달린 티 룸茶房이었다.

선명한 붉은색의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은 작지만 우아했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애프터눈 티를 즐기러 온 손님으로 가득했다.

아니, 즐긴다고 말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었다.

안에 있는 손님 중 상당수가 영약차를 마시고 곧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다들 열심이군 그래.”

이쪽 세상의 런던에선 공력 증진을 위해 티 룸에서 운기티타임을 가지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수련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은 집을 떠나 조용한 장소에서 양질의 영약 홍차와 다과를 섭취하며 내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까닭이다.

“아직 자리가 남아 있으면 좋겠어.”

“걱정 말게. 우리 자린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왓슨을 안심시킨 다음 가게 문을 열자 우아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과연, 이곳의 다과가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뉴웬스가 31년 전 영업을 시작한 이래로 줄곧 런던의 신사 숙녀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었다.

첫째. 미식가로 이름난 헨리 8세가 즐겨 먹던 빵과 과자의 비밀 레시피를 재현했고.

둘째. 상류층 혹은 부유한 전문직 고객에게만 개방되는 특별한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보게.”

나는 점소이에게 다가가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밝혔다.

“수련동Private Party Room을 사흘 정도 빌리고 싶네만.”

이곳에서 나와 왓슨은 구음절맥의 치료를 시작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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