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일념즉시무량겁
Faust Moment
시간아 멈춰라. 그대, 폐월수화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학사신권Faust>-
* * *
걸음을 늦춘 시간 속, 순간과 영원이 마주 보았다.
‘……해냈나.’
적막과 고요를 통해 바라본 세상은 평소와는 사뭇 다른 색채를 보여주고 있었다.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시절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든 정지한 시간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왓슨을 걱정하는 나의 마음이 집중력을 크게 끌어올린 덕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오래 머무는 건 여전히 불가능해 보이니 최대한 서둘러야겠군.’
이곳은 파우스트 모먼트Faust Moment.
또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이는 칠정을 놓아 곧고 깨끗하게 정신을 가다듬은 자만이 헤아릴 수 있는, 고요함조차 멈춰선 영역.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
뛰어난 지성을 지닌 이는 한 방울의 물을 보고 대서양과 나이아가라 폭포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생은 하나의 커다란 사슬이니 그 고리 하나를 보기만 해도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내 안의 모든 의념이 하나로 모일 때 순간Moment은 영원Eternity이 된다.
무애無涯한 영세가 촌음과 평등하니, 영겁과 찰나의 구분 또한 무애無礙한 것이다.
‘시작해야겠군.’
파우스트 모먼트에 진입한 이는 현실의 시간을 수백 배로 늘려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몸이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소리는 아니다.
가속되는 건 자신의 사고.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무리해서 파우스트 모먼트에 진입한 이유는 간단하다.
온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진 멈춘 시간 속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마음과 생각, 즉 의념뿐이지만.
왓슨이 품은 기운을 움직이는 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화륵!
왓슨의 독맥에 머무르던 열양지기가 음기의 대못을 품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집중된 의념이 진기를 빠르게 움직여 혈도에 박힌 음기의 대못을 갉아내는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대로 끝까지 간다…….’
뇌에 집중된 내공 중 일부가 시신경과 안구로 흐르자 왓슨의 꼬리뼈부터 후두부 너머로 이어진 독맥의 형태를 흐릿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경맥을 비스듬히 꿰뚫은 음기의 못은 양기와의 마찰로 인해 닳아 없어지는 중이었다.
아까보다 못의 크기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시간이 멈춘 것과 다름없는 파우스트 모먼트에 진입한 상태다.
즉, 절맥증을 유발하는 저 대못은 아까보다 최소 수십 배는 더 빠르게 갈려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지이잉!!
다만, 음기의 입자로 변해 가는 못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내 머리는 예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경을 달군 바늘로 직접 찌르는 것만 같은 격통.
집중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두뇌가 비명을 지른다.
머리에 모든 내공이 집중된 지금, 작은 실수라도 범했다간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약간의 내공이라도 역류하게 두었다간 뇌에 머물던 내력이 폭발할 테고, 왓슨이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머리 없는 시체로 변해 있겠지.
이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줄타기.
섬세한 기의 운용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극한까지 의념의 힘을 끌어올려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열양진기를 움직였다.
‘조금만 더……!’
소용돌이처럼 못을 감싼 양기. 그 한가운데에서 침전된 음기가 부스러져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열양진기와 하나가 되어 중화된 기운은 혈맥을 따라 반복해서 순환하며 안정적으로 왓슨의 단전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단을 복용해 얻은 열양진기와 못의 형태로 굳어 있던 음기가 서로를 중화하며 만들어 낸 진기.
그 양은 왓슨의 만성적인 공력 부족을 해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진기도인을 마쳤을 땐 절맥증의 증세가 완화되는 건 물론이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더욱 강해져 있을 것이다.
‘버텨다오, 제발!!’
느린 심장 박동이 숨골을 따라 올라와 두개골 안에 울려 퍼진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고무처럼 늘어난 소리는 죽음의 선고.
상승한 뇌압. 혈관을 타고 전해진 진동이 한껏 부푼 풍선처럼 뇌에 모여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내력을 건드리려던 찰나.
-사륵
인고 끝에, 바늘만 한 크기까지 줄어든 음기의 덩어리가 고운 입자로 변하며 녹아내렸다.
독맥을 틀어막고 있던 첫 번째 못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화아악!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시곗바늘.
왓슨의 경맥에 간섭하는 것을 그만둔 직후, 나의 뇌를 벗어난 진기가 의념을 따라 단전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억…… 허억…….”
직후, 왓슨의 등을 타고 올라온 소량의 진기가 손바닥을 통해 나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두개골이 터져 나가며 뇌수를 사방에 흩뿌렸을지도 모르는 상황.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눅진한 핏물을 애써 삼킨 직후, 뒤를 돌아본 왓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타오르는 것만 같은 적발 사이에 섞여 절맥증의 심각성을 알려 주던 은색의 새치, 그중 일부가 빠르게 본래의 색깔을 되찾고 있었다.
“독맥의 음기가…… 사라졌어?”
그녀의 볼에는 여전히 눈물이 번져 있었지만, 고통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아홉 개의 못 중 하나를 제거했을 뿐이지만, 나는 왓슨의 구음절맥을 부분적으로나마 치료하는 데에 성공했다.
“홈즈. 부탁이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고 말해 주게.”
“첫 치료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네. 그리고 이는 엄연한 현실이지.”
“그게 정말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걸 보니 아직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가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내가 고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야 멀쩡하네만, 어째 자네의 안색이 영 시원찮은 것 같아서…….”
“기분 탓일세.”
다행이다.
부작용은 없는 모양이라서.
“평소보다 몸이 배는 가벼워. 전부 자네 덕이야, 홈즈―”
몸이 가벼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 더해 무언가 희미한 깨달음의 편린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순수의 전조에 담긴 화엄의 묘리를 직접 체화한 걸까.
이것이 저러하고 저것이 곧 이러하다.
하나와 열이 같고 열이 곧 하나와 다르지 않다.
무공과 마공의 구분은 무애無礙하며 한 걸음과 백 걸음 역시 그러하다.
“그렇군, 이걸 위해 스승은 그 구결을―”
나는 마침내 하나의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털썩
“또 장난인가. 갑자기 쓰러진다고 해서 내가 속을 거라 생각하면…….”
연기가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대답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피곤하군.’
집중력을 과도하게 소모한 탓인지 눈꺼풀이 무겁다.
아무래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다.
“홈즈……!! 홈즈―”
멀어지는 의식.
나는 흐릿해져 가는 왓슨의 비명을 자장가 삼아 잠에 빠졌다.
* * *
며칠 후.
시티 오브 런던의 러드게이트 힐.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함께 런던을 대표하는 종교 건축인 세인트 폴 대성당이 자리 잡은 이 거리에는 젠트리와 전통 중산층이 즐겨 찾는 멋들어진 펍이 하나 있었다.
-탕!
술집 1층, 바 테이블에 내려놓은 잔에서 여아홍이 흘러넘쳤다.
잔을 쥐고 있는 사내의 옷차림은 근사했다.
지성이 느껴지는 단안경과 청결한 수염. 착용하고 있는 정장과 실크해트는 꽤나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사내의 직장은 이 근방에 사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
그와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들은 모두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동료 의사들이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근무를 마치고 펍에 모인 의사들은 아까부터 한 가지 화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그자의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던 건 최근 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한 의원의 병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이름은 존 왓슨.
왓슨은 제대한 군의관이었는데 빼어난 외모 덕에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에서 수많은 환자와 간호사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었다.
물론 왓슨은 의사로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실력과 큰 상관이 없었다.
체구가 작고 절맥증을 앓고 있는 모습이 허무하고 가련해 모성애를 자극한다든지.
새빨간 머리카락 군데군데에 은발이 섞여 있는 모습이 신비롭다던가.
그가 여인들의 사모를 받는 원인은 외적인 부분에 있었으니까.
이런 연고로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중 적잖은 이들이 왓슨을 시기하고 있었다.
물론, 절맥증을 앓고 있는 이상 왓슨이 요절할 거란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상황이 변하고 말았다.
“절맥증이 저렇게나 빠르게 호전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냥 머리를 염색한 걸지도 모르지 않나?”
“당치 않은 소리. 자네는 왓슨이 풍기는 기운 자체가 달라진 걸 느끼지 못했는가.”
왓슨과 함께 일하는 의사들은 그녀가 성별과 진짜 이름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도 그 기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제나 창백한 얼굴로 음기를 흩뿌리던 왓슨은 며칠 동안 휴가를 다녀온 이후로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건강해져 있었다.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건 물론 피로를 호소하며 주저앉는 일도 적어졌다.
군데군데 섞여 있던 은색의 새치가 줄어든 것도 염색으로 인한 것이 아닐 터.
“구음절맥이 부분적으로나마 치료된 게 분명해.”
“하지만, 어떻게? 그의 집안은 거액의 빚을 지고 있다지 않나. 극양지물을 사들일 돈은 없었을 텐데.”
“운 좋게 영약을 얻었다 쳐도 진기도인을 맡아줄 사람이 없지 않나.”
“맞아. 절맥증의 치료법은 지난 세기 명맥이 끊어진 거로 아네만.”
“비급을 지닌 기인이사Hermit라도 만난 건 아닐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기연이로군.”
잠자코 동료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스탠포드가 미소를 지었다.
‘기인이사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
스탠포드는 룸 메이트를 찾던 왓슨에게 자문 탐정을 소개했다.
왓슨의 체질 개선에 도움을 준 건 아마도 그 남자, 셜록 홈즈일 터.
평소 병원의 실험실과 영안실을 멋대로 드나들며 기묘한 짓을 일삼고 있지만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달한 무인.
어쩌면 구음절맥의 치료법을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단은 닥치고 있는 게 낫겠지.’
다만, 스탠포드는 굳이 자신의 가설을 동료들에게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당사자인 왓슨이 먼저 자신의 기묘한 동거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모를까.
-펄럭
옆자리의 의사들이 발하는 소음은 남의 일인 것처럼 스탠포드는 아까 읽던 석간신문을 다시 펼쳤다.
<충격! 용봉지회에서 천륜을 거스른 존속살해 사건이 발생하다.>
<피해자는 드레이크 남작가의 장남으로 가해자는 그의 친동생, 조너선 드레이크로 알려져―>
<사건을 해결한 것은 현장에 있던 런던 광역 경찰청장 에드먼드 헨더슨 경과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로―>
<목격 증언에 따르면 비밀리에 방문하신 빅토리아 폐하께서 후기지수에게 가르침을 내리심은 물론 범인 체포에도 손수―>
<익명을 희망한 정보 제공자 I·A 양의 증언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셜록 홈즈라는 아마추어 탐정이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고 한다.>
처음 기사를 봤을 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보여 놀랐다.
셜록 홈즈가 사설 탐정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신문1면에 보도될 정도로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해결할 줄이야.
그동안 내심 홈즈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정신병자 정도로 생각하던 스탠포드는 스스로의 오만을 뉘우쳤다.
시체에 내공을 담아 주먹질을 하거나 영약의 엑기스에 술을 섞어 마시는 등 홈즈가 병원에서 저지른 기행은 범죄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실험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큰 오해를 할 뻔했군.’
앞으로 그가 협조를 요청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리라.
스탠포드는 그렇게 결심하며 잔을 가득 채운 맥주를 비웠다.
“다음에 만나면 한 잔 사야겠어.”
머지않은 미래, 저 비범한 베이커가의 탐정이 대영제국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자랑거리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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