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뜻밖의 성장
Enlighted
살의를 품은 네 부의 신문이 천 자루 보검보다 두렵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 *
베이커가 221b 번지.
동이 틀 때까지 같이 술을 퍼마신 왓슨이 곤히 잠들어 있는 사이,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딱히 쉬고 있던 건 아니었다.
요 며칠 동안 내가 바빴던 건 무공 수련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 전임자 대신 어제부터 새로 일하기 시작한 메이드나 허드슨 부인이 증언할 수 있다.
사실 그 둘이 아니어도 베이커가를 오가는 사람들 중 아무나 데려와도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용봉지회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례는 드릴 수 없지만 제발 집 나간 고양이를 찾는 데 도움을―’
‘남편의 불륜 상대를 찾아주세요.’
‘그 자식이 내 아이디어를 표절한 게 분명해! 증거? 그, 그야 내 일기장이지! 왜 각본이 아니냐고?! 탐정이란 사람이 뭐가 이리 멍청해! 당연히 이제부터 완성할 거다!!’
나는 오늘 내쫓은 진상들의 헛소리를 떠올렸다.
신문사가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기사에 내 이름을 적은 탓에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의뢰인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9할은 제대로 된 고객이 아니었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워지는 머저리부터 시작해 당연하다는 듯이 무료 봉사를 요구하는 쓰레기.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건 그들이 의뢰랍시고 가져온 일들이 하나같이 나의 지성을 모독하는 유형의 사건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아…….”
이럴 땐 백년설삼즙 7% 용액을 정맥에 흘려 넣고 싶어진다.
첼시에서 수사 자문이라는 질 높은 노동을 제공하고 비밀을 엄수한 정당한 대가로 받아온 영약을 죄다 소모해 버린 탓에 불가능하지만.
“빌어먹을 범죄자 놈들은 제대로 된 사건 하나 일으키지 못하고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버러지 같으니라고.”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었다가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거울에 비춘 내 얼굴은 본 적 없는 흉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살기는 당장이라도 내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중이었다.
“……왕의 망령인가. 처음 겪는군.”
영약 중독의 금단 증상이 지속된 결과 심마Papiyas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럴 때 제때 영약을 투여해 주지 않으면 사자심법의 ‘진짜’ 부작용에 당하고 만다.
사자심왕이 만든 원본 심법의 부작용, 스승이 왕의 망령이라고 부르며 개량한 심법을 사용해 가두어두라고 지시한 증상 말이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기게 두었다간 더는 이 아늑한 숙소에 머물 수 없게 되겠지.
“영약이…… 더는 없군.”
큰일이다. 사건을 해결한 대가로 받은 금일봉으로 뭐든 영약을 구매해 두었어야 했는데 귀찮아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가면 드레이크의 시체에서 회수한 중독성 약물이 섞인 위법 스멜링 솔트를 입에 대고 뿌리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아니, 아직 하나 남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래층에 숨겨 둔 비상용 영약이 남아 있었다.
“후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허드슨 부인은 평소처럼 축음기를 틀어놓고 취미 생활에 몰두하는 중이고 신인 메이드는 장을 보러 나갔다.
찬장을 뒤지기 최적의 상황.
“여기쯤 있을 텐데.”
저번에 허드슨 부인이 메이드가 사 온 머쉬룸 중에 곰팡이가 핀 게 섞여 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녀가 우편물을 확인하러 간 사이 그것을 슬쩍해 찬장에 감춰 두었다.
-끼익
제일 구석에 있는 찬장을 열자 안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버섯을 꺼내 옷소매로 문질렀다.
곰팡이가 피었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
“잘 말랐군.”
표면이 옥과 같은 은은한 녹색을 띤 버섯.
이것은 흔히 옥지玉芝라고 불리는 영약으로 가끔 버섯 캐는 양반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평범한 버섯과 같이 두고 파는 경우가 있었다.
“음?”
그런데, 찬장 구석의 어둠 속에 못 보던 약병이 몇 개 숨겨져 있는 게 보였다.
“……메이드 짓이군.”
나는 언이 두고 간 백고를 떠올렸다.
보아하니 앞으로 내 돈을 들여 비싼 독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누가 보낸 건진 몰라도 끼니마다 저걸 탈 생각인 듯한데 잘만 대처한다면 이 집에 사는 셋에겐 오히려 득이 될 것 같다.
나는 근처에 있던 천 조각을 집어 약병의 내용물을 그 위에 조금씩 담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허드슨 부인, 홍차를 부탁해도 될까요?”
잘 건조된 옥지를 주머니에 숨기고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던 허드슨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동시에, 전음으로 짧게 메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였다.
“아! 벌써 그럴 시간인가요?”
고개를 끄덕인 부인은 그제야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다시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침실에 감춰둔 백고에게 먹이를 주고 허드슨 부인이 갖다 준 요깃거리와 홍차 위에 옥지를 얇게 썰어 얹었다.
“음. 좋아.”
말린 레몬 슬라이스 대신 띄운 영약 조각에서 작지만 강인한 기운이 흘러나와 찻물에 녹아들었다.
한 모금 입을 대자 혈도 안에서 날뛰던 진기가 차분하게 흐르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사자심법은 1차 부작용이 까다롭긴 해도 해결하는 방법 또한 명확해서 좋다.
접시와 찻잔을 비우고 곰방대를 물자 그제야 머리가 본래의 성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그 남자가 관심을 보일지도 모르겠군.”
여태껏 나는 왓슨에게 내가 사건을 해결한 사실에 관해 외부에 공표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용봉지회라는 런던 무림 전체가 주목하는 행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나는 이를 해결한 탐정으로 보도되었다.
“…….”
실은 지난밤 증언을 한 사람의 이니셜이 굳이 기사에 포함된 게 신경 쓰여 잠을 설쳤다.
내가 사건 해결에 관여했다는 정보를 기자에게 넘긴 건 I·A를 자칭하는 증인.
I·A는 그 여자의 이니셜이다. 어제 내게 손수건을 건넨 여자 말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메시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 보라고 저러는 거 같다.
기사를 쓴 기자는 아마 그녀에게 돈을 받았으리라.
그를 찾아가면 자신을 매수한 여인의 위치를 내게 알려 줄 터.
이 역시 그녀의 지시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말로, 뭐라 해야 하나.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다.
“이런 귀찮은 방식을 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굳이 저렇게 보험까지 준비해 둔 걸 보니 내게 어지간히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 미국 태생의 오페라 가수.
어린 나이에 음공의 극치에 달한 그녀는 러시아의 황실 극장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다 런던으로 건너와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신분에 지나지 않는다.
회귀 전에 내가 알고 있던 그녀는 제임스 모리어티의 컨설팅을 받는 VIP 고객, 즉 범죄자였다.
이쪽 세상에서도 그 사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
그래도 일단은 그녀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런던에서 암약하고 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지금 당장 찾아가긴 껄끄러운 것 같단 말이지.”
마음 같아선 그녀를 붙잡아 모리어티에 관해 아는 것을 모두 실토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아직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
나는 과거 그 여자와 수 싸움을 벌이다 패배한 적이 있다.
그 사건은 나의 몇 안 되는 실패로 남았고 나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이린 애들러가 모리어티의 고객인 이상 그녀를 찾아가는 건 필연적으로 모리어티에게 나의 존재를 노출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쪽 세상에서도 그동안 내가 겪은 사건들이 비슷하게 일어난다면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터.
그녀를 찾아가는 건 어느 정도 모리어티의 계략과 맞설 준비를 마친 다음이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먼저 나를 찾는다면 그땐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야겠지만.
지금은 이른 단계에 아이린 애들러의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내게 유리한 쪽으로 써먹어야 한다.
“……기사에 이름이 실리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최대한 모리어티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활동할 생각이었기에 기사에 내 이름이 적힌 걸 보고 당황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유능한 수사 자문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면 지금의 생활을 영유하는 데에 필요한 지속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회귀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위층과의 인맥도 만들 수 있을 테고.
기왕 버킹엄 어전 무도회에도 초대받았으니 여왕 폐하를 비롯해 여러 사회 지도층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쪽이 여러모로 좋지 않겠는가.
“…….”
물론 나는 그런 자리를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왓슨과 단둘이 모리어티와 싸울 수는 없을 테니까…….”
놈은 혼자가 아니다.
제임스 모리어티는 조직력을 갖추고 사회 각 계층에 부하를 심어 유럽의 어둠을 지배하는 범죄의 나폴레옹.
빅토리아 폐하가 이쪽 세상에서 화경의 고수인 것처럼 모리어티와 그 부하들 역시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쪽 세상의 모리어티가 회귀 전보다 더욱 위험해졌다면 그만큼 나도 단단히 준비하고 싸움에 임해야만 한다.
나도, 왓슨도, 더욱 강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왓슨.”
사실, 비슷한 나이의 후기지수와 비교하면 왓슨은 아직 강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재능이 있고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구음절맥 탓에 아직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다르게 말하면 절맥증만 치료할 수 있다면 왓슨은 지금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왓슨을 치료하는 건 그녀의 목숨을 구할 뿐만이 아니라 누구보다 믿음직스럽고 강인한 동료를 얻게 되는 것을 뜻한다.
“양기를 품은 영약은 구하는 족족 왓슨과 나눠야겠군.”
고작 아홉 개의 못 중 하나를 제거한 것만으로도 왓슨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동안 내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왓슨은 내공을 조금이라도 사용한 다음 날엔 어김없이 안색이 창백했고 식사도 조금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소화 기능과 혈액순환은 물론 내력 운용의 효율까지 신체 기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항상 절고 있던 한쪽 다리 역시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정도다.
‘그동안 제자일 검법에 당한 상처가 낫지 않은 것도 절맥증의 영향이었던 거겠지.’
어제도 계단을 오를 때 예전보다 훨씬 움직이기 편해 보였다.
아마 음기의 못을 서너 개쯤 뽑아낼 즈음엔 달리진 못하더라도 더는 지팡이가 필요 없어질 터.
이렇게만 얘기하면 그냥 원래부터 증상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절맥증이라는 병이 원래 그렇다.
지금이야 시들시들 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증상이 악화되다 예고 없이 발작과 함께 요절하는 것이 바로 절맥증이었다.
‘희소한 질병이라 관련 지식이 없으면 평범한 지병인 줄 생각하다 죽는 일도 다반사지.’
물론 지식이 있어도 엄청난 양의 영약에 더해 나만한 실력을 지닌 무인이 진기도인을 이끌 필요가 있다 보니 생존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구음절맥을 완치하는 데엔 조금씩 실패 없이 치료를 반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총구를 겨누는 각도를 조금씩 여러 번 틀면 최종적인 탄착 지점이 크게 변하는 것처럼.
나는 여러 번의 치료를 통해 왓슨을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 내야만 한다.
만일 제인 왓슨의 절맥증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존 왓슨에게 면목이 없을뿐더러, 이미 제인 왓슨은 나의 소중한 친구이니까.
“그래도 잠시 숨 돌릴 순 있겠군.”
다행인 건 이번 치료를 통해 왓슨의 기대 수명이 조금은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몸 상태가 좋아진 것에 더해 왓슨의 공력이 치료를 통해 성장했다.
이는 내단을 흡수하고 못을 녹인 덕에 대량의 양기를 얻은 건 물론 혈도에 묶여있던 음기 또한 해방된 까닭이다.
전체적으로 내공의 양과 질이 한 단계 올라갔으니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이전보다 한층 강해졌을 것이다.
‘최대한 휘말리게 만들고 싶지 않지만, 왓슨이 가만히 있질 않겠지.’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다 돌아온 탓일까, 아니면 그 특수한 체질 탓에 언제나 죽음을 의식했던 탓일까.
왓슨은 언제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두 프랑켄슈타인의 강시를 마주하고도 맞서는 걸 택했다.
왓슨은 여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긍지 높은 무림인.
모리어티가 어떤 작자인지 알게 되어도 내 곁에서 함께 싸우려 하겠지.
그러니까.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어.”
한 번 나를 적이라고 인지한다면 모리어티는 반드시 나와 가까운 이들을 위협하려 들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도록 용납할 수는 없다.
다행히도, 이번에 절맥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강해진 건 왓슨만이 아니었다.
“……이걸 시험해 봐야겠군.”
-우우웅
사자심법으로 쌓아 올린 정순한 내력이 오른손을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저번에 왓슨을 치료하며 얻은 깨달음은 즉시 내가 익힌 몇몇 무공의 경지를 끌어올려 주었다.
예를 들자면.
“백보신권1200 Inch Punch.”
나는 계단으로 이어진 출입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아까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침입자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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