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무공 밀실 살인 사건 (2)
Serial Kung-Fu-Cide In Locked Room (2)
정치의 결정적 수단은 무공이다.
-막스 베버-
* * *
런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잿빛 구름이 드리워진 장엄한 지붕과 뾰족한 첨탑은 오래전부터 런던무림을 대표하는 풍경으로 대영제국의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 궁전은 본래 왕가의 거처였지만 지금은 의원과 장관이 모여 공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변모했다.
대영제국 의회Parliament of the British Empire가 열리는 이곳은 오만하고 야심 찬 정치가들이 모이는 복마전Pandemonium.
런던무림맹의 별명으로 알려진 귀족원과 구성원 전원이 왕립무학회에 소속된 서민원이 무림의 대소사를 논하는 대영제국의 심장부였다.
이곳에선 사후 길 건너편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는 영예를 손에 넣기 위해 정쟁을 벌이는 의원들 외에도 다양한 인간군상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유형으로는 여왕폐하의 정부Her Majesty’s Goverment를 이끄는 대영제국 내각에 소속된 장관대신長官大臣들을 꼽을 수 있었다.
“오늘도 귀가하긴 글렀나.”
내각 의전서열 4위, 중대국무공직重大國務公職의 일익을 맡는 내무장관 윌리엄 버논 하커트는 평소처럼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장관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도 된 것처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양손은 모두 비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에 차례차례 친필 서명과 날인이 완료되고 있는 건 만년판관필과 도장이 그의 왼손과 오른손을 정확히 따라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는 덕이었다.
허공섭물Poltergeist.
하커트는 경지에 달하거나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업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후우.”
한동안 바쁘게 서류를 결재하던 그는 숨을 돌릴 겸 잠시 손을 멈추고 서랍을 열었다.
하커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안에 들어있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그것은 오전에 도착했지만 공무가 다망해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편지였다.
발신자는 미합중국 클리블랜드 경찰.
몰몬교 신도들을 다수 체포했다는 보고와 대영제국 측의 협조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번잡스럽게 굴긴.”
몰몬교의 집단 범죄는 분명 흥미로운 화제였지만 타국의 사건에까지 신경 쓸 정도로 하커트가 처한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내무장관은 편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업무를 재개했으나 머릿속에선 계속 3주 전에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되새기고 있었다.
되살아난 시체가 무공을 사용해 사람을 죽였다.
스코틀랜드 야드는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스탠거슨이라는 사내의 신병을 확보했고 하커트의 지시로 그를 철저히 심문했다.
결과, 그는 몰몬교 미합중국 북서부에서 벌여온 살인, 납치, 감금 등의 온갖 범죄 행위에 관해 털어놓았다.
미합중국으로 강제송환된 스탠거슨은 살인죄로 기소되었고 갖은 패악질을 부리던 몰몬교도들 역시 미룬 죗값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 하나가 무사히 끝났다고 해도 내무장관의 업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무부Home Office는 치안유지를 시작으로 이민, 법률 집행 외에도 첩보 등 국가안보에 관한 업무까지 도맡는 대형 부처다.
이런 거대한 조직의 수장을 맡은 하커트가 막대한 양의 업무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
다만, 최근 그가 일주일 내내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에 몰두해야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찾아낼 방법이 없군.”
복수할 힘을 빌려준답시고 사냥꾼을 꼬드겨 최악의 강시로 만든 건 파문당한 모던파 수도사 프랑켄슈타인으로 추측된다.
오랫동안 행적을 감추고 있던 마두가 다시 나타난 건 의도적으로 런던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일 터.
사라졌던 무림공적Public Enemy이 돌아왔지만 추적은커녕 단초라고 부를만 한 게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커트가 과로 중인 건 의회를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활동을 재개한 무림공적의 정보를 긁어모으고 그들의 범죄를 대비하기 위해선 새로운 법률이 필요했다.
간악한 좌도방문Leftwing의 무리가 계속해서 런던을 혼란에 빠뜨릴 거란 예감이 불행히도 현실이 되고 있었으니까.
“모포와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퇴근도 마다하고 곁에 남아 있던 시종 클라크가 장관의 어깨에 담요를 덮고 테이블 위에 요깃거리를 올려두었다.
훌륭한 솜씨로 조리된 샌드위치. 하지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저 퀭한 눈으로 앞에 놓인 게 음식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한 입 베어 무는 게 전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니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제 됐네. 먼저 들어가 보게.”
“송구스럽지만 집무실에 계시는 동안은 시중을 들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시종은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했고 충직했다. 하커트 경은 포기한 듯 다시 입을 다물고 업무에 집중했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펜이 움직이고 종이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난로의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은 퍽이나 정적이었다.
템즈강에 면面한 그의 집무실은 검소했다.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업무에 시간과 집중력을 할당할 수 있는 구조.
내무장관이 아닌 윌리엄 하커트 개인의 색이 드러나 있는 건 책장에 가지런히 정렬된 장서와 기록물뿐이었다.
법률서, 무공 비급, 칼럼과 연설문의 원고.
방문객들은 책등만 보아도 무학과 법학을 전공하고 법조계와 언론계에서 커리어를 쌓은 그의 행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력 덕에 하커트는 힘이 지배하는 무림에서조차 언어가 지닌 힘이 법과 무공 못지않게 강력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축에 속했다.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이 크나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음을 꿰뚫어 본 것 역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쌓아온 통찰력 덕이었다.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대중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최근 들어 런던에선 지능형 범죄와 무공 살인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을 스코틀랜드 야드가 감당하기엔 경찰의 숫자와 질이 여전히 부족했다.
사람들이 어설픈 탐정들의 손이라도 빌리는 것을 하커트가 눈감고 있는 건 이러한 현실을 단기간에 개선할 방법이 없던 까닭이다.
사라졌던 무림공적이 다시 나타난 것만 보아도 누군가가 런던에 큰 혼란을 일으키려 하는 건 확실하다.
무공 살인 중에서도 저번에 겪은 강시 살인 같은 건 저잣거리Streets에 소문이 돌기만 해도 민심이 뒤숭숭해지기 마련이다.
거기에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세심한 선동이 더해진다면 대규모 소요 사태마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사건은 기이함만 따지자면 시체에 의한 살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인정하긴 싫지만 이런 끔찍한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자의 도움이 필수불가결했다.
-똑똑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복도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내방자의 도착을 알렸다.
“들어오게.”
하커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머리칼을 지닌 사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맹금류를 닮은 잿빛 눈동자는 하커트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서려 있었는데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눈매나 턱선에 어울리지 않는 나른함과 게으름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귀족은 아니지만 하커트는 정부 의전 서열 4위의 권력자.
허나 상대는 장관을 눈앞에 두고도 위축된 기색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뻔뻔하지만, 그런 주제에 당당하고 신사다운 몸가짐과 여유를 잊지 않아 주위를 휘어잡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인사랍시고 고개를 한 번 까딱인 사내는 집무실이 제집인 양 느긋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누가 권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물었다.
“셜록 홈즈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Sherlock Holmes, At Your Service.”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그 위에 얹은 채.
“…….”
내무장관은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게도, 저 지독하리만치 염세적인 인상의 자문 탐정이야말로 그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까닭에.
* * *
“홈즈, 장관님 앞일세. 예의를 갖추게.”
몇 박자 늦게 집무실로 들어온 왓슨은 나와 하커트 경을 번갈아 보더니 기겁한 얼굴로 말했다.
“그쪽은?”
“제 우수한 조수이자 주치의인 왓슨 박사입니다.”
“그렇군.”
그저 동행이 누군지 확인했을 뿐, 하커트 경은 처음부터 왓슨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반면 왓슨은 무려 내무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의 집무실에 들어온 게 겁이 나는지 얼어붙어 있었다.
“의도치 않게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나는 각진 턱과 두꺼운 수염을 지닌 내무장관을 주시하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건넸다.
그리스 철학자의 조각상을 방불케 하는 강인한 인상의 하커트 경이 오직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짧고 명쾌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가 장황한 설명을 즐기는 글래드스턴 총리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자라는 사실 역시도.
이러한 정보를 근거로 나는 그가 일반적인 관료처럼 피곤하게 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편안하게 대화하려 했을 뿐인데 왓슨이 괜히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그대로 앉아 있게. 예의를 논하려고 탐정을 부른 게 아니니까.”
예상대로 내무장관은 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아쉬운 쪽이 누군지 판단할 정도는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도록 하죠.”
내가 대답하자 왓슨이 눈치를 보다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윌리엄 하커트다. 일각을 다투는 문제라 급하게 호출한 점 이해하게.”
하커트 경은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혔다.
어디까지나 이 집무실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소개했을 뿐, 자신이 높은 사람이니 알아 모시라는 고위 공직자 특유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한가하실 때에 불러주셔도 괜찮았는데. 장관씩이나 되시는 분이라 대부분의 업무는 부하에게 맡기시는 줄 알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지 못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네. 앞으로 보낼 한 주 역시 그럴 테고. 내게 한가한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아.”
사람 불러놓고 서류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꼬워서 비꼬아 봤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쉴새 없이 허공섭물로 만년판관필과 도장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레스트레이드에겐 어디까지 들었나.”
“밀실에서 넷이 죽었다더군요.”
“쉽게 말하는군. 연쇄 살인 사건인데.”
“매일 런던에서 과로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절대 많은 건 아니죠.”
“……그건 사실이지만 고작 네 건의 살인이
왕실의 위엄에 먹칠하고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면 어떤가.”
3초도 지나지 않아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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