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38화 (38/110)

038. 밤은 짧고 현장은 멀다 (1)

Night Is Short, Way Is Long (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탄지공이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아미수녀회의 금언-

* * *

“음? 잠깐. 살인이 일어난 건 모두 이 근방일 텐데. 굳이 마차를 타지 않아도 걸어가면 되는 게 아닌가.”

내가 말하자 왓슨이 의문을 제기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왓슨.”

“아니, 자네가 아까 목적지는 벡슬리라고 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왓슨. 이 근방에서 일어난 건 첫 번째 살인뿐이야.”

“분명 하룻밤 사이에 네 건의 살인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왓슨이 오해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는 아직 사건 기록을 읽지 못했으니까.

“네 건의 살인은 전부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네.”

“그래. 전부 이 근방에서 일어난 게 아닌가.”

사건 현장이 어딨는지 아는 그렉슨이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푹푹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골치가 아프다는 증거.

마침내 왓슨과도 이 놀라운 자극을 공유할 때가 되었다.

“잘 듣게. 첫 번째 피해자는 이곳, 런던의 동쪽 끝인 벡슬리에서 사망했어.”

“알고 있네.”

“그리고 두 번째 피해자는 런던의 북쪽 끝인 엔필드. 세 번째 피해자는 서쪽 끝의 힐링던. 마지막 피해자는 남쪽 끝에 있는 크로이던에서 완벽히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했지.”

“……뭐라고?”

추가로 하나 더 정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네 건의 살인이 일어났다는 건 잘못된 정보라는 걸 알아두게.”

“음? 무언가 잘못된 게 있었나?”

“하룻밤이라는 표현은 과할 정도로 포괄적이야. 교환소 직원과 현장 부근에 있던 시민의 증언에 따르면 네 건의 살인은 전부 15분 이내에 발생했으니까.”

“그게……무슨…….”

“잘 듣게. 확인된 정황을 통해 유추한 범인의 행적은 이러하다네.”

왓슨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로 했다.

“범인은 벡슬리, 엔필드, 힐링던, 크로이던을 잇는 100마일의 거리를 일각Fifteen Minutes 안에 주파했고, 달리는 틈틈이 밀실에서 전화를 받던 네 명의 피해자를 살해했네. 어떠한 흔적도 남기는 일 없이.”

요약하자면, 이 모든 게 단독범의 범행이라고 전제했을 때.

“범인이 음속의 절반에 달하는 속도로 움직인다는 뜻이지.”

* * *

제갈율리의 의뢰를 덥석 받아들인 데엔 복잡한 이유가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게 진상의 은폐 따위가 아닌, 진실을 밝히고 범인을 잡아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하려는 일이고 진범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의 수는 내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하려던 일을 마치기만 해 추가적인 보수를 얻을 수 있으니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밤은 짧고 현장은 멀다.

우리는 살인이 일어난 런던의 네 모퉁이를 마저 돌기 위해 서둘러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마차에서 사건 기록을 요약한 정보를 왓슨에게 들려주며 기다리길 2시간 반.

그리니치와 토트넘을 지나 도착한 두 번째 사건 현장은 런던의 행정구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엔필드였다.

“여길 찾는 것도 오랜만이군.”

“자네도 입대 후 엔필드 무관에서 초식을 익혔나?”

왓슨은 오래된 추억이라도 떠올리듯 잠시 긴장했던 얼굴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에서 일시적으로 역용술까지 해제한 걸 보니 조금 전 사건 현장을 보고 느낀 심리적 피로가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맞아. 엔필드 무관은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도 왓슨은 무관이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해 공수례拱手禮를 취했다.

“노사에게 사사하던 나날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때 배운 무공이 없었다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겠지.”

“대영제국 제일의 탄지공 달인이 가르친다더니, 과연 명불허전Fair Reputation이로군”

이곳은 엔필드 가문 출신 아미수녀회 고수가 관장을 맡은 왕립 탄지공 무관, 통칭 엔필드 무관의 연고지라 탄지공을 수련하는 이들에겐 일종의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무관이라고 부르긴 해도 엔필드 무관은 문파로 인정받지 못해 무관으로 남은 곳들과는 격이 달랐다.

엔필드는 무관 중 유일하게 왕실 어용 문파 인가증Royal Warrant을 보유한 곳으로 왕실 구성원에게 무학을 지도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육군의 탄지공 교본이 이곳에서 작성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으리라.

엔필드 무관의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선 굳이 먼 곳에서 예시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당장 내가 왓슨에게 가르친 탄환지 연사소총Martini-Henry 등의 초식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근방에서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 걸 알면 노사께서 잠을 설칠까 두려워지는군. 만일 범인이 사용한 게 탄지공이라면…….”

짙은 걱정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왓슨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걱정 말게. 그럴 가능성은 없으니.”

“정말인가?”

“내 장담하지.”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안심해도 되겠어.”

마차에서 내린 우린 걸어서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크리켓 클럽의 북쪽,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간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은 변호사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청장님의 지시를 받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셜록 홈즈 대협이 맞으신지요.”

“그렇소.”

이쪽에도 경감이 한 명 배치되어 현장을 통제하는 중이었다.

경관의 안내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자 이번에도 아까 벡슬리에서 보았던 것과 거의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참담하군…….”

시체를 목격한 왓슨이 인상을 찌푸리고 중얼댔다.

중규모의 변호사 사무실에 설치된 전화기.

그 곁에선 머리 없는 사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사건 현장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피해자.

그 머리는 잘게 부서진 채 초식이 적중한 반대 방향으로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이탈리안 요리를 벽과 바닥에 쏟은 광경을 전위적으로 표현한 그림처럼 보이는 광경.

내 눈에는 끈과 이어진 채 위태롭게 매달린 수화기가 공기 중을 떠도는 불온한 기운이 폭발하지 않도록 붙들어 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주위를 둘러보다 창가에 뇌수가 튄 걸 발견했다.

두 번째 피해자가 첫 번째 피해자와 달리 창문이 아닌 반대쪽에서부터 공격당해 사망했다는 뜻.

이로써 피해자가 창밖에서 범인에게 저격당했을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간 초식은 방 안에서 출수되었다.

“이 사무실도 저커버그앤코의 자물쇠를 사용하고 있었어, 홈즈.”

“이미 들어오면서 확인했다네.”

그리고 첫 번째 살인 현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 변호사 사무실도 허공섭물을 막는 자물쇠로 도둑의 침입을 방지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내에서 피해자를 죽인 다음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건가.”

첫 사망자를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시체의 맥을 짚어 생전의 내공 수준을 확인해보았다.

“흠.”

두 번째 피해자는 무공을 충분히 연마한 자였다.

내력을 흘려보내 살핀 혈도와 세맥은 그가 최소한 일류의 경지에 달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무리 통화에 정신이 팔렸었다 해도 일류의 무인이 지척까지 다가온 흉수에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하다니.

차라리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자살하려는 사람은 전날에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두지 않는 법.

만일 마음에 드는 구두를 신고 신사다운 최후를 맞이할 생각이었다면 저런 식으로 자기 머리통을 박살 내진 않았을 거다.

런던무림에선 말끔했던 정장이 뇌수와 핏물에 흠뻑 젖는 방식의 죽음을 우아하다고 여기진 않으니까.

“이런 살인이 가능한 방법은 몇 없겠군…….”

모던파 수도사가 영약을 먹여 키우는 암살용 벌레 중에는 특정한 소리에 반응해 폭발을 일으키는 폭살고爆殺蠱라는 종류가 있다.

그걸 피해자의 귀에 집어넣었다가 통화 중에 기폭용 음성을 들려준다면 이런 기묘한 밀실 살인 사건도 충분히 일으킬 수 있으리라.

다만, 폭살고의 경우 폭발한 장소에 일주일 내내 사라지지 않는 특이한 악취를 남기는데 현장에선 그 냄새를 확인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검증이 필요하겠어.”

폭살고가 사용되지 않았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두어 가지 정도.

곰방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자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방법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홈즈. 나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여럿이 아닐까 싶다네.”

그 와중에도 왓슨은 또 엉뚱한 추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야, 범인이 혼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혼자 벌일 수는 없을 테니까.”

“간결하게 논지만 잘 말해주었군.”

“그렇지? 아무래도 공범이 있어야 자물쇠도 조작할 수 있고 여러모로 뒷공작이 쉽지 않겠나.”

왓슨은 용기백배한 얼굴로 추리를 이어갔다.

“무엇보다 범인이 발이 빠르다고 알려진 신화 속 천신 위타천Mercury이라도 되지 않는 한 고작 일각의 시간 동안 런던의 네 모퉁이를 돌 수 있을 리가 없어. 네 명의 범인이 각각 한 명씩 피해자를 죽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생각하네.”

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이자 왓슨의 표정이 한층 더 의기양양해졌다.

“아무래도 자네를 따라다닌 덕에 나도 추리가 많이 늘은 모양이야.”

“안타깝지만 그 말엔 동의하지 못하겠군.”

“아닛, 어째서…….”

한껏 치솟던 왓슨의 광대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앞서 본 두 시체를 관찰하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야. 조각나 흩어진 머리를 자세히 보게.”

왓슨은 내가 시키는 대로 박살 나 흩어진 피해자의 두개골과 뇌를 살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선 왓슨의 눈을 탓할 순 없었다.

초식이 남긴 흔적을 보고 어느 정도의 내공이 사용되었는지 추측하는 건 시체안치소에 구두 밑창이 닳도록 드나들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우리가 본 두 시체는 완벽히 같은 초식에 당해 숨졌다네. 같다는 건, 같은 초식을 다른 무림인이 펼쳤다는 뜻이 아니라 출수한 자가 한 사람이라는 뜻일세.”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건가.”

“사람마다 두개골의 두께와 골밀도 등이 제각기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뼛조각과 뇌가 흩뿌려진 거리, 범위, 각도를 비교하면 두 피해자의 머리에 가해진 충격의 크기는 동일한 걸 알 수 있다네.”

아예 비슷하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다.

같은 초식이어도 펼치는 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고 각자의 버릇이 반영되는 법인데, 두 현장에 남은 흔적은 완벽할 정도로 일치했다.

“머리카락이나 담뱃재, 하물며 발자국 같은 단초 하나 남지 않았지만 내 눈앞에는 범인의 실루엣이 아른거리고 있어. ”

“일단은 놈이 어떤 초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밝히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이젠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이 사실인지 확인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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