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밤은 짧고 현장은 멀다 (3)
Night Is Short, Way Is Long (3)
맹인은 강호를 주유하며 만나는 인간군상 가운데 특히나 위험한 부류 중 하나다.
그 외 조심해야 하는 부류는 점소이, 노파, 귀족, 청년, 농인, 주정뱅이, 여자, 장년, 개, 백치, 아이, 고자, 노인, 수도사, 흑인, 노동자, 그리고 개방도가 있다.
-마크 트웨인-
* * *
왓슨은 아픈 기억보단 조수의 본분을 더욱 중히 여기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꾹 억누르고 작업을 재개했다.
“이 조각은 연골이니 왼쪽 귓바퀴가 확실해.”
왓슨은 전문가답게 천천히 올바른 순서대로 피해자들의 머리를 조립했다.
덕분에 혼자 하는 것보다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범인이 잘게도 부숴놨군.”
원체 두개골의 파편이 많은 데에다 새벽에 조립했던 것을 포함해 측두부만이 아닌 전체를 복원하느라 시간이 많이 필요했지만.
“겨우 끝났나.”
작업이 완료되기까진 얼추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시체들의 복원된 측두부에선 새벽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네 말대로였어. 모두 같은 자의 주먹이 남긴 자국이야.”
초식에 당해 주먹 모양으로 거무죽죽하게 괴사한 피부 조직의 크기와 형태를 측정한 왓슨이 결과를 알리자 경관들이 작게 탄식을 발했다.
개중 한 명은 아까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복원된 얼굴을 노트에 옮겨 그리고 있었다.
“이로써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이 단일범에 의한 범죄라는 게 명확해졌어.”
나는 다시 한번 파악한 정보를 되새겼다.
사건 기록에는 전화 교환소 직원의 증언과 현장 근방에 있던 목격자들이 신고를 넣은 순서가 적혀있다.
이를 근거로 판단했을 때 범인은 고작 15분 동안 런던 외곽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살인을 저지른 게 확실하다.
게다가 놈은 모종의 방법으로 아무런 흔적과 목격 정보를 남기지 않고 이 모든 걸 해냈다.
녀석이 어떤 수를 써서 이 불가해한 연쇄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나는 범인의 정체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흥미로워지는군그래…….”
딱 하나 있긴 하다.
벽 너머에 있는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초식이.
전화를 걸어 상대의 위치를 미리 정해둔 장소에 고정한다면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도 권격을 명중시킬 수 있을 터.
만일 범인이 그 초식을 익힌 자라면 현장에 직접 출입하는 일 없이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문제는 놈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네 곳을 돌아다닌 방법인데.”
물론, 그건 범인이 15분 이내에 런던을 한 바퀴 도는 게 가능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100마일의 거리를 15분 동안 주파하는 건 내 스승과 빅토리아 폐하 같은 절세고수에게도 불가능하다.
“확인할 게 생겼어.”
그러니까, 이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따로 검증해봐야겠지.
* * *
스코틀랜드 야드를 나서기 전, 나는 레스트레이드에게 피해자들의 신원을 파악하면 바로 내게 연락하도록 말해두었다.
나와 왓슨이 향한 곳은 사보이 객잔과 킹스 칼리지를 지난 곳에 있는 챈서리 레인이었다.
챈서리 레인은 런던 법조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이곳을 찾은 이유는 법률과 하등 상관이 없었다.
나와 왓슨은 공공 기록 사무소Public Records Office에서 장거리 경공 세계 기록과 기록 보유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한 다음 바로 건물을 나섰다.
“설마 장거리 경공의 세계 기록 보유자가 우체국에 있었을 줄이야.”
“흔히들 고수는 민간에 숨어있다高手在民間지 않나.”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런던의 모든 우체부는 경공을 익힌다.
푸른 신형이 거리를 가로지르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조건 우체부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정도였으니까.
그중 한 사람이 강호 제일의 경공술을 펼치는 고수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쓸데없이 헤맬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야. 서두르세.”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차를 타고 6분 정도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 세인트 마틴 르 그랑 거리.
그곳에 위치한 런던 중앙 우체국General Post Office은 우체부들의 쉼터Postman’s Park을 사이에 두고 왓슨의 직장인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과 인접해 있었다.
“우체부들의 자부심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걸.”
중앙 우체국 본부는 말 그대로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 정면엔 주두柱頭에 소용돌이 장식이 달린 이오니아 양식 기둥이 늘어서 있었다.
“비번인 날 이 근처에 오는 건 피하고 싶었는데…….”
나는 왓슨의 불평을 무시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야드와 마찬가지로 중앙우체국 본부는 바쁘게 굴러가는 중이었다.
작업실에선 붉은 옷을 입은 사무권사事務拳士들이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가 업무에 적합한 무공을 익힌 듯 빠르게 편지와 소포를 분류하고 있었는데 현란한 손놀림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산티아고 곤륜파의 섬전수Thunder Clap인가.”
“과연, 엄청난 속도로군.”
사무권사Office Boxer 전원이 이류 이상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섬전수에 한해 숙련도가 상당했고.
한편 좌측에 보이는 다른 작업장에선 푸른 옷을 입은 집배권사集配拳士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경공을 펼치며 돌아다니는 저들 역시 사무권사들과 마찬가지로 산티아고 곤륜파의 무공을 익힌 모양이었다.
허공으로 도약하거나 몸을 낮추고 미끄러지는 등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해 다른 집배권사들과 부딪치는 일 없이 우편물을 나르는 그들의 경신법 역시 과거 견식한 적 있는 것이었다.
“운룡대팔식Eight Cloud Dragons…….”
비록 첫 번째 초식 말곤 익히지 못한 모양이지만 저만한 상승무공을 모두가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공강국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곤륜의 제자Pilgrims를 보게 될 줄이야.”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진 않았다.
여길 찾은 건 어디까지나 장거리 경공 세계 기록 보유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평범한 집배권사조차 이 정도 수준이라면 천하제일경공대가Ultimate Speedster가 우체국에 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
나는 작업을 감독 중인 무인에게 하커트 경의 인장이 찍힌 사건 기록의 겉면을 내밀었다.
“내무장관의 명으로 살인 사건을 조사 중인 셜록 홈즈라고 하네. 체신장관Postmaster General 각하를 뵙고 싶네만.”
사내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당황한 듯 입을 뻥긋대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대답은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바로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찾고 있나.”
고개를 돌리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사내가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게 보였다.
-구구우
그 어깨 위에는 거대한 영물 비둘기가 한 마리 자리 잡고 있었다.
런던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루엣.
다만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그 얼굴과 커다란 비둘기가 아니라, 그가 편안하게 늘어뜨린 팔 끝에 달린 것이었다.
‘범인의 신장은 6.25 피트의 거구. 근육이 발달한 오른손잡이로 추측되네.’
어젯밤 뼛조각을 맞추고 왓슨에게 했던 말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체신장관遞信長官 헨리 포셋 경 되십니까.”
“그렇네만.”
“……!”
이 남자, 주먹이 대단하다.
내가 안구를 움직이지 않고 체신장관의 손을 살핀 반면 왓슨은 쉽게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포셋 경의 커다란 주먹에 고정되어 있었다.
“홈즈…….”
“조용. 보는 눈이 많네.”
일단 왓슨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도 이 정도 반응이라면 체신장관을 직접 보고 놀란 거라고 얼버무릴 수 있다.
체신장관Postmaster General은 대영제국 내각에 속한 각료다.
높으신 분께서 갑자기 나타났으니 평범한 무림인Gentry인 우리가 놀라는 건 당연한 반응.
……그렇게 생각해줄 것이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없을 때의 이야기.
‘만일 이 자가 범인이라면―’
방금 자신의 손을 보고 놀란 왓슨의 얼굴을 보았을 테니 우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음을 눈치챘을 터.
무언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나서거나 차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움직일지도 모른다.
“……살인이라. 하커트 경이 움직였다면 꽤나 심각한 사안인 모양이야.”
하지만 그의 진한 색안경 너머로 보인 두 눈을 확인한 순간 나는 그런 걱정이 괜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떤가, 여긴 자네 말대로 ‘보는 눈’이 많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 집무실에서 마저 하는 게.”
“……좋습니다.”
포셋 경은 맹인이었다.
* * *
3층. 두어 가지 의미로 보는 눈이 없는 체신장관의 집무실.
이따금 들려오는 영물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
이곳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마자 포셋 경이 던진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그쪽 숙녀분은 많이 긴장하신 모양인데.”
“……?!”
-덜커덕
왓슨이 놀란 나머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가 황급히 주워들었다.
“수, 숙녀라니. 대체 무슨 말씀을…!”
왓슨이 부정했지만 포셋 경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파다닥!
저도 모르게 당황해 언성을 높인 왓슨에게 영물 비둘기가 경고의 의미를 담아 날개를 퍼덕였다.
“가만히 있어라, 데이빗大比.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는데 예의를 지켜야지.”
체신장관은 영물 비둘기가 매달린 횃대 앞에 놓인 그릇에 모이를 뿌렸다.
데이빗이라는 멋들어진 이름까지 지닌 비둘기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왓슨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조용히 사료를 쪼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평범한 맹인과 같이 취급해선 안 되겠어.’
포셋 경은 시력을 잃은 대신 청력이 기이하리만치 발달해 있었다.
역용술이야 목소리를 바꾸는 데에 조금 도움을 줄 뿐, 눈이 보이지 않는 포셋 경에겐 크게 의미가 없다.
아마도 발소리와 심음만 듣고 왓슨의 본래 성별을 눈치챘으리라.
역시나 방심할 수 없는 상대.
괜히 강호에서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인간군상 중 하나로 맹인을 꼽는 게 아니다.
“……이런. 미안하네. 내가 큰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구먼. 방이 어두워서 목소리만 듣고 착각했지 뭔가.”
어둡다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창밖에선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자가 범인이라면 상대하는 건 절대 쉽지 않겠군.’
그가 왓슨의 정체를 꿰뚫어 본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방이 어둡다고 말한 건 자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분위기를 환기하려 건넨 농담이리라.
고작 몇 마디 말로 왓슨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척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솜씨를 보니 나름대로 머리가 잘 굴러가는 유형인 모양이다.
“체신장관님께서 위트가 넘친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의 통찰력에 감탄했다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식으로 통성명부터 하는 게 어떤가. 나는 여왕 폐하의 내각에서 체신장관의 직무를 맡아 우편과 예금 등을 관리하는 헨리 포셋―”
포셋 경은 알이 작고 둥근 색안경을 한 손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청익복Blue Bat이라는 유쾌한 별호로 불리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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