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밤은 짧고 현장은 멀다 (5)
Night Is Short, Way Is Long (5)
정파의 신공절학이 신발을 신는 동안 좌도방문의 사술은 강호의 반절에 퍼져 있다.
-마크 트웨인-
* * *
“……피해자들이 누구길래 그리 소란을 피우는가.”
“그건―”
그렇게 물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란 몸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쥐를 닮은 눈이 체신장관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포셋 경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레스트레이드의 결례에 노한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영 껄끄러워 보이는데.’
두 관인Officer 사이를 흐르는 기묘한 침묵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당장 떠오른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
일단은 평소처럼 멍청하게 부리나케 달려와 소리부터 질렀다가 수사 정보를 누출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급히 입을 다물었을 가능성을 꼽을 수 있다.
혹은 피해자들의 신원을 고려했을 때 그들을 죽일 동기를 가진 게 체신장관이나 우체국 관계자일 거라고 생각해 침묵을 지키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두어 가지 더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긴 하다.
“…….”
나는 레스트레이드와 포셋 경, 그리고 1층에서 보았던 사무권사들과 집배권사들의 체격을 비교해보았다.
포셋 경의 우람한 체격은 역근경Bulk-Up&Cutting을 오랫동안 수련한 레스트레이드 못지않게 거대했다.
아까 본 권사들 역시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찰관들만큼은 아니어도 외공 수련에 힘을 쏟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커트 경과는 정반대로군.’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박력이 느껴지던 내무장관과 달리 포셋 경의 모든 움직임에선 탄력이 도드라졌다.
부서지지 않는 강인함이 아닌 자유로운 내공의 수발收發을 위한 극한의 유연함을 갖춘 신체.
그야말로 역근경으로 완성한 금강석과 같은 강체剛體와 대비되는 팔단금Eight Layers Of Silk 수련자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했을 때 레스트레이드가 저런 반응을 보인 건 단순히 정반대의 길을 걷는 무인을 보고 무리적武理的인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게 아니면 레스트레이드답지 않게 머리를 굴려 체신장관이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을지도.
‘어느 쪽이든 쉽게 입을 열진 않겠어.’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나는 곧바로 레스트레이드에게 눈짓했다.
포셋 경이 맹인인 걸 확인한 레스트레이드는 내 의도를 알아채고 수첩을 꺼내 그 위에 조용히 몇 자 빠르게 휘갈겼다.
<사망자는 전원 런던에 위치한 전화 회사의 주요 간부.>
아까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던 정보였다.
“훌륭해.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아까 떠올린 가설대로 범인의 동기는 우체국과 전화 회사 사이에 일어난 소송과 무언가 연관이 있는 듯했다.
“먼저 야드로 돌아가 있게. 이야기만 마치고 금방 따라갈 테니.”
“……그야 상관없지만 오래 기다리진 못합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걱정 말게. 금방 갈 테니.”
레스트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중앙 우체국을 빠져나갔다.
“……소란스러운 친구로군.”
한편 포셋 경은 그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은폐 공작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데에다 민감한 수사 정보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처럼.
“그래도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 중에선 저만한 실력을 갖춘 이가 드뭅니다.”
“어쩐지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지더라니.”
내가 말하자 포셋 경이 짤막한 감탄을 발했다.
“정말로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그 정도 실력자인가?”
왓슨 역시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내게 물었다.
“사실일세. 어디까지나 맷집과 금나수에 한해서지만.”
저번엔 상대가 강시여서 레스트레이드가 실력을 보이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범죄자는 그의 체포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귀신의 그림자조차 붙들어 맨다고 일컬어지는 왕림Kingswood의 귀영금나수鬼影擒拿手를 익힌 레스트레이드의 실력은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으니까.
“촌각을 다투는 상황인 듯한데, 가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직 몇 가지 더 알아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얼마든지 협조하겠네.”
“잘 됐군요. 그럼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신원이 밝혀지며 범인의 동기가 드러나기 시작한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명백하다.
전화의 이권을 걸고 우체국은 런던에 자리 잡은 전화 회사에 각각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판결을 보류하고 있는 중이다.
회귀 전엔 작년에 이미 끝난 송사였을 텐데 이쪽 세상에선 아직 끝을 보지 못한 상황.
이 시점에서 전화 회사 관계자 넷이 살해당했지만 아직 법원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번 전화 회사와의 소송과 연관된 사람을 모아주십시오. 판사, 변호사는 물론이고 전화 회사 관계자와 우체국 관계자 중 엮여 있는 자라면 누구든, 전부.”
“어째서인가.”
“범인이 죽이려 들 사람이 아직 남아있거든요.”
내가 말하자 체신장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일리가 있어……. 자네 말대로 소송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암약하고 있는 모양이야.”
하지만 포셋 경은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관계자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경호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알겠네. 금방 수배하도록 하지.”
대화를 마치고 왓슨과 집무실을 나서려 했는데 포셋 경이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나도 움직여야 하니 같이 마차를 타고 가세. 야드 앞에서 내려주겠네.”
“배려 감사드립니다.”
“먼저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게. 모자와 지팡이만 챙겨서 바로 따라갈 테니.”
왓슨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배려해준 모양이다.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신기한 분이야.”
집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왓슨이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분이 지팡이도 없이 어떻게 버킹엄의 우편을 배송하고 계신 걸까. 아까도 맹인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번잡한 1층을 걸어 다니셨지 않은가.”
그게 신경 쓰인 거였군.
왓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나마 구음절맥이 치료되며 저격검수에게 당한 다리 역시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왓슨은 경공을 펼칠 수 없는 몸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본 포셋 경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악조건을 극복해낸 뛰어난 강호의 선배.
존경심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반향정위대법Kung-Fu Echolocation을 익혔으니 가능한 거겠지.”
“반향정위? 이형환위와 비슷한 것인가?”
왓슨이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의외인걸. 자네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군부의 재활무관에서도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왓슨이 모르고 있을 줄이야.
일단은 간단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반향정위대법은 시력을 잃은 고수들이 장애를 극복하게 도와주는 무공으로 상승음공으로 분류된다네.”
이 절세의 음공은 목소리와 발소리 등 자신의 몸이 발하는 높고 낮은 모든 소리에 미량의 진기를 싣는 것을 기조로 삼는다.
진기가 담긴 음파는 온도의 영향을 받아도 굴절하지 않으며 반사와 회절의 성질이 강화되는데, 수련자는 반사된 소리만을 듣고도 자신의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맹인이 아니어도 대법을 극성까지 익히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자유롭게 무공을 펼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까.
“대단해. 과연 내각의 한 축을 짊어진 장관답군.”
어째서일까, 상대가 장관급 인사긴 하지만 처음 본 사람을 왓슨이 칭찬하니 괜히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왓슨. 혹시 첼시영약원Chelsea Physic Garden에서 내가 방범진법을 통과한 건 기억하고 있나?”
“아, 그것 말인가. 처음엔 믿지 못했지만 자네가 영약을 훔쳐온 걸 보고 사실이라는 걸 알았지.”
“그렇다면 엊그제 내가 하숙집 복도 천장에 숨어있던 살수를 찾아낸 건?”
“……설마.”
내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왓슨은 원하던 반응을 보여주었다.
“자네도 반향정위대법을 익히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포셋 경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에겐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홈즈. 대체 런던강호에 자네가 익히지 않은 무공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당연한 소리를. 내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아직 익히지 못한 무공은 차고 넘친다네.”
물론 어지간한 무림인들보다 훨씬 넓고 깊게 수련을 쌓았긴 했지만.
“무림세가와 각 문파의 비전 중엔 내가 익히지 못한 것이 허다하다네. 곤륜파를 예로 들자면 독문진기인 뇌정지기나 진산절기로 알려진 섬전수Lightning Clap 등이 있겠지.”
때마침 2층을 지나가고 있던 참이었던지라 작업 중이던 전신권사電信拳士들을 예시로 들었다.
“하긴, 자네가 굳이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날 위인으로 보이진 않아.”
“자네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그나저나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로군, 저건.”
아깐 급하게 3층의 집무실로 향하느라 빠르게 지나쳤지만 지금 보니 장관壯觀이 따로 없었다.
2층에선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전신권사들이 전신기의 키를 엄청난 속도로 두드려 모스 부호를 보내고 있었다.
섬전수의 묘리가 깃든 손길만 보아도 그들이 1층에서 우편을 분류하는 사무권사보다 높은 경지를 이룩한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중앙우체국의 전신권사들은 일반적인 우체국과 달리 전신을 보낼 때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뇌정지기雷霆之氣라…….”
전신권사들이 손에 두른 푸른 빛무리는 강호에 알려진 수많은 진기의 성질 변화 중에서도 뇌명쌍괴나 곤륜대성당의 순례자 등 일부 무림인의 전유물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평야에 내리치는 벼락을 심상에 담아 변화시킨 뇌정지기Brain Stopper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두개골을 뒤흔드는 강렬한 기운이다.
전기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이 기운을 섬세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저렇게 미량을 전신기에 흘리는 식으로 배터리 없이도 전보를 보낼 수 있는 거겠지.
뇌정지기는 식은 음식을 덥히는 데 사용되는 열양지기와 더불어 범용성이 뛰어난 기운.
이런 걸 보면 괜히 산티아고 곤륜파의 순례자들이 취업 시장에서 우대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잠깐.”
전신권사들의 손이 잔상을 남기며 모스 부호를 보내는 걸 지켜보던 와중 한 가지 가설이 벼락처럼 머리를 꿰뚫었다.
“뇌정지기로 전신을 보내는 게 가능하다면…….”
나는 깨달았다.
범인이 런던의 네 모퉁이에 있던 피해자들을 15분 이내에 전부 살해할 수 있던 이유를.
“무언가 떠오른 거라도 있나, 홈즈.”
걸음을 멈추자 이변을 눈치챈 왓슨이 물었다.
“흉수가 피해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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