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43화 (43/110)

043. 뜻밖의 대답

Surprise

사람들은 허를 찌르는 초식Surprise을 사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무학의 씨앗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 * *

“뭐라고?!”

왓슨의 경악을 또각대는 발소리가 가라앉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고개를 돌리자 모자와 지팡이를 챙긴 포셋 경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영물 비둘기는 사무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마차가 준비된 모양이니 어서 출발하도록 하지.”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마침 야드의 경찰들에게 시킬 일이 늘어난 참이라.”

중앙우체국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체신장관의 마차엔 잔뜩 먼지가 쌓여 있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던 내무장관의 마차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관록과 세월이 모두 느껴지는 기품있는 마차로군요.”

“청소해두는 걸 잊고 있었군. 마차를 타는 건 1년에 한두 번 정도여서 말이지.”

기겁한 나머지 헛소리를 하는 왓슨에게 포셋 경은 쓴웃음을 지으며 핑계 아닌 핑계를 늘어놓았다.

“3초면 깨끗해질 걸세.”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을 묶어둔 마부가 돌아와 기수식을 취했다.

그가 입은 외투는 소매가 무척이나 넓은 것으로 재질은 다르지만 포셋 경이 입은 것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런 커다란 소매가 달린 옷은 곤륜파 순례자의 상징과도 같았는데 운룡대팔식을 펼칠 때 허공에서 자세를 제어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곤륜파의 본산이 스페인에 있는지라 실제로 저 소매를 이용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견식할 기회는 흔치 않은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타앗!”

마부가 기합을 발하며 팔을 휘두르자 손바닥과 소매에서 형형히 빛나는 뇌정지기Brain Stopper가 마차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악!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잘게 흩어진 부드러운 기운은 마차의 안팎을 구석구석 훑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한 줄기의 푸르른 꽃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먼지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곤륜파를 대표하는 방어 초식 표화탄공수飄花彈空手를 소제掃除에 응용하다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So Luxurious.

“그래. 아직 자네들을 야드에 내려주기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마저 이야기나 좀 해볼까. 아까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우연히 들었는데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더군.”

“그렇습니다.”

마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자마자 포셋 경이 물었다.

예상대로 아까 2층에서 왓슨과 전신권사들을 보고 나눈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게 우체국과 연관이 있는 일이라면 나도 알아야 할 것 같네만.”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검증이 필요한 사항이다 보니.”

칼같이 거절하자 포셋 경의 얼굴이 미소를 띤 채로 마른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자네에겐 사람을 섭섭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먼.”

체신장관이 색안경을 벗었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건 검은자가 사라져 한 가지 색밖에 남지 않은 안구.

마차 안의 공기가 바늘처럼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는 게 느껴졌다.

“……!”

비단실을 꼬아 만든 밧줄이 목을 옭아맨 것만 같은 중압감에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옆에 앉은 왓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포셋 경이 일으킨 기세는 온전히 내게만 집중되고 있는 듯했다.

‘아직 왓슨에겐 저게 보이지 않나 보군.’

눈에 공력을 집중시켜 안법을 펼치자 포셋 경의 머리 뒤에 떠 있는 희끄무레한 빛의 고리가 보였다.

저것은 성산과 곤륜을 비롯한 수도가 문파Christianism Clan의 고수 중에서도 경지를 이루어 상단전을 개방한 자들의 징표인 광배Halo.

고작 무림 후학에게 겁을 주겠다는 이유로 드러내기엔 과한 면이 없지 않다.

다만.

“다들 그리 말하더군요.”

그가 발하는 기백을 튕겨내는 데엔 굳이 대량의 내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없었다.

열린 창문을 향해 진기를 실은 손을 가볍게 내젓자 나를 향해 쏟아지던 불가시의 후광後光이 방향을 바꿔 마차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음?”

그것이 의외였는지 포셋 경의 눈썹은 크게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제가 뜻밖의 기쁨Surprise을 선사하기 전까진.”

“호오.”

어째, 체신장관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뜻밖의 기쁨이라…….”

포셋 경은 내 말을 듣고도 아리송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용서하게. 자네의 표정을 살필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군. 나 같은 장님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주지 않겠나?”

어리숙한 척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의 의중은 짐작이 갔다.

‘내가 범인을 잡아낼 결정적인 단초를 찾아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군.’

포셋 경은 정치인이다.

그에 더해 무국강병책Manual Of Kung-Fu Economy이라는 무공경제학의 바이블을 집필한 권위자이기도 하고.

그는 지금쯤 우체국 관계자가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굳이 내게서 단초를 캐내려는 건 자신이 직접 움직여 범인을 처단하기 위함이겠지.

내무부의 하부조직인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찰이 우체국에 들이닥쳐 부하를 끌고 가는 것보단 직접 범인을 잡아 넘기는 쪽이 정치적 입지가 덜 위태로워질 게 분명하니까.

그게 아니면 자신의 커리어에 오점이 남지 않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체포에 필요한 증거를 인멸하려 들거나.

물론 수사에 협조하겠다며 아각패Jacob’s Shell까지 꺼내 맹세했으니 후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말 그대로 금방 놀라게 되실 거란 뜻입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가 날을 세운 어조로 내 말을 끊은 순간 뒤통수에 걸려있던 흐릿한 광배의 형체가 조금 더 뚜렷해졌다.

“진정하십시오, 대인!”

마침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한 왓슨이 장관을 진정시키려 들었다.

“실례. 나이가 드니 쓸데없는 오지랖과 호기심만 늘어나는 모양이야.”

포셋 경은 기세를 가라앉히고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 장관이 말하고자 하는 건, 자네가 언급한 서프라이즈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풀어서 설명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거란 뜻일세.”

3초가량, 내가 이 거래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내무장관 하커트 경이 내게 의뢰한 내용은 이번 사건의 진범을 찾아내는 것.

제갈세가Zuckerberg Family가 선금까지 건네며 부탁한 것 역시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범인을 붙잡는 것이다.

살인범을 체포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니 이번 기회에 포셋 경이 내게 빚을 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산티아고 곤륜파의 도달자이자 내각의 한 축을 짊어진 체신장관이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받는 우체부는 런던 전역을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감시자.

포셋 경을 아군으로 끌어들인다면 여차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터.

“소탐小探의 수양이 짧아 장관대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허허. 다 내 머리가 아둔해서 그렇지.”

“곤륜의 도달자께서 무슨 말씀을.”

청익복 대협은 그제야 광배를 거둬들였고 마차 안에 세 명의 화기애애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웃음소리가 그치는 걸 기다렸다가 포셋 경의 물음에 답했다.

“말씀드린 서프라이즈란, 제가 사흘 안에 범인을 잡아다 대인의 눈앞에서 무릎 꿇리는 것을 뜻합니다.”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나 싶었는데 포셋 경이 느닷없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보아하니 내 대답이 완전히 마음에 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과연, 최고의 서프라이즈로군! 본관은 기꺼이 사흘 동안 기다리겠네!”

그렇다고 아예 오답이었던 것도 아닌 듯했지만.

“이 홈모, 온 힘을 다해 분부 받잡겠습니다.”

내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동안에도 체신장관은 연신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네는 참 재밌는 사람이야.”

“유머는 신사의 소양이지요.”

나는 웃음을 그친 장관의 희멀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답했다.

포셋 경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하긴 했으나, 나는 처음부터 포셋 경이 범인을 체포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범죄자의 정체를 밝히고 그를 체포하는 건 어디까지나 수사 자문가인 나의 영역에 속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살인범을 경찰의 손에 넘기기 전 체포 과정에서 포셋 경에게 약간의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정도라면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그가 이렇게나 유쾌하게 웃고 있다는 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겠지.

“자네를 보고 있으면 자꾸 그 남자가 떠오르는군.”

“혹시 그자가 저와 같은 성씨를 갖고 있습니까?”

“오. 어떻게 알았나.”

“…….”

마이크로프트와 아는 사이였나.

“스코틀랜드 야드에 도착했습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마부가 창문을 두드렸다.

“여기서 자네들을 내려줘야 한다는 게 아쉽군. 마음 같아선 밤새 수다를 떨고 싶지만 경찰이 자네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차가 멈추자 창문 너머로 야드의 녹색 정문이 보였다.

체신장관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기회야 살아있다면 언제든 있지 않겠습니까. 즐거웠습니다, 장관 대인.”

“바래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뭘 이 정도 갖고.”

나와 왓슨이 차례대로 인사하자 황송하게도 포셋 경이 마차에서 따라 내렸다.

아무래도 떠나기 전에 내게 마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관계자들에겐 내가 따로 기별을 넣겠네. 야드로 대피시키면 되겠는가?”

“그게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포셋 경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 모인 자들 중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체국 관계자 중 진범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장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체신부 관계자는 피해자들의 신분이 밝혀졌을 때 가장 먼저 의심받기 좋은 위치에 있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가.”

“이번 사건의 범인은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겁니다.”

소송이 체신부에 유리하게 끝나봤자 이득을 보는 건 우체국과 정부다.

전화 회사 임원을 죽여도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데 개인적인 원한 외의 이유로 포셋 경의 부하가 살인에 나설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원한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하기엔 피해자들의 신분부터 이권 다툼의 냄새가 진하게 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네가 하는 말이니 사흘 동안은 믿어 보겠네. 그럼, 보중하게나.”

“감사합니다. 장관님도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나야 별일 없겠지.”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는 일입니다. 범인이 아직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진 않아서.”

“……사망자가 더 늘어날 거란 뜻인가?”

포셋 경의 질문에 나는 솔직한 의견으로 답했다.

“놈은 머지않아 장관대인의 목숨을 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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