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45화 (45/110)

045. 유령권마 (2)

Phantom Fist (2)

은혜를 잊는 건 사파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정파 고수 중 은혜를 잊는 자를 아직 나는 본 적이 없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격률여반성格率與反省>-

* * *

“아까 쪽지에 적었던 것처럼 피해자들은 런던에 근거지를 둔 전화 회사의 중역들입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우체국이 건 소송을 대비하려고 준비하던 자들이고요.”

“역시 그랬군.”

“참고로, 소송 내용이 어떤 건진 알고 계십니까?”

“대략적인 상황 정도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자들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까진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소송에 관해선 일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우체국과 그 배후에 있는 체신부Ministy Of Posts And Telegraphs가 이기면 그때부턴 전화가 전신의 일종으로 분류될 거라지?”

“네. 만일 그렇게 되면 전화 회사는 매년 매출의 1할을 체신부에 납부해야 하며 우체국은 7년 주기로 전화 회사 인수를 고려할 수 있게 됩니다.”

“패소했다간 전화 회사에겐 악몽이 따로 없겠군.”

“바로 그겁니다! 우체국 입장에선 확실한 승소를 위해 전화 회사의 임원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을 테죠.”

레스트레이드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맺었다.

“무엇보다 전화 회사 임원들을 엉뚱한 장소로 불러낼 수 있던 건 범인이 그들에게 강압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즉, 범인은 체신장관이 분명하다 이겁니다!”

“…….”

“…….”

자신만만하게 결론을 읊은 레스트레이드는 나와 왓슨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곤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대체 뭡니까! 그 표정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 정문 앞에서 포셋 경이 암살당할 뻔했는데 잘도 그런 헛소리를 한다 싶어서.”

“그, 그렇다면 체신장관이 아닌 그 부하 중에 범인이 숨어있을―”

“레스트레이드 덕에 우체국 관계자가 결백한 건 확실해졌군, 왓슨.”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야.”

“이익……!!”

이번에도 레스트레이드 덕에 오답을 배제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당사자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댁이 그렇게 잘났으면 범인이 누군지 말해보던가!”

대뜸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내가 뭘 하려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일세. 다만, 그 전에 자네와 왓슨이 제 역할을 다해주어야만 해.”

“내가?”

예고 없이 지목된 왓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내 계획에 따르면 그녀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배역을 맡게 될 예정이다.

* * *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파트너를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한참이 지난 다음 혼자 스코틀랜드 야드 정문을 나선 왓슨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홈즈는 급한 용무가 생겼다는 말만 남기고는 왓슨과 레스트레이드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고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디 보자. 메이페어Mayfair 쪽이겠군.”

물론, 이따 합류하자면서 레스트레이드의 수첩을 찢어 주소를 한 줄 적어주긴 했다.

포셋 경을 찾아가 볼일을 마치면 자신도 곧바로 그곳으로 향한다면서.

“앨버말 스트리트 18b……. 슬슬 출발하면 늦지 않게 합류할 수 있겠지.”

아예 낯선 곳은 아니다.

앨버말 스트리트. 부자와 유명인이 잔뜩 사는 거리다.

비싼 그림을 파는 갤러리나 고급 잡화점이 많았는데 왓슨도 몇 번인가 지나간 적이 있었다.

다만, 홈즈가 자신을 저기로 불러낸 이유만큼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도 없는 장소였으니까.

“그나저나 중요한 역할이라……, 정말 내가 그런 걸 맡아도 되는 건가.”

걱정되는 한편, 홈즈가 아닌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았다.

“으음.”

언제나 고개만 돌려도 그곳에 있던 명탐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괜히 불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이번 살인사건의 범인에겐 유령권마이니 뭐니 으스스한Spooky 별호까지 붙어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까 체신장관이 습격당했지 않았나.

같이 있던 자신도 언제 표적이 될지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야드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리다니.

왓슨으로선 그저 홈즈가 원망스럽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조수라고 불렀으면서.”

모든 계획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홈즈가 촌각을 다투며Race Against Time 움직이고 있는 건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진실을 깨달았길래 가장 가까운 조수에게 귀띔 한 번 해주지 않고 나간 걸까.

‘사건이 무사히 해결되면 날 잡고 따져봐야겠어.’

마차를 잡으러 길가로 나온 왓슨은 그렇게 속으로 윽벼르며 아까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홈즈는 말했다.

자신이 런던에서 유령권마를 추적해 붙잡기 전까지 놈이 목숨을 노릴 법한 관계자를 전원 멀리 대피시킬 필요가 있다고.

동시에, 그는 왓슨에게 부탁했다.

레스트레이드와 함께 저들을 지켜보다 혹시 모를 위험이 일어났을 때 대처해달라고.

“굳이 말하면 호법인가.”

다행히도 이쪽 분야에 아예 경험이 없던 건 아니었다.

왓슨은 노섬버랜드 제5보병연대에 몸담고 있던 시절 프레데릭 로버츠 장군의 막사 앞에서 호법을 선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것이어서 그녀의 뇌리 깊숙한 곳에 남아있었다.

당시 장군 막사를 지키기 위해 상당한 숫자의 병사들이 호법으로 동원되었지만 참모들은 전혀 안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서 호시탐탐 지휘관의 목숨을 노리는 저격검수Markswordsman의 존재를 의식한 까닭이었다.

그래서일까, 로버츠 장군Bobs의 막사 주위에는 제갈세가Zuckerberg Family 출신 공병대장의 지휘 아래 그들의 절예絶藝가 빈틈없이 펼쳐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였지.’

저커버그의 비기를 전개하는 데엔 대량의 노동력과 시간을 토목공사에 갈아 넣어야만 했다.

하지만 수고한 보람은 있었다.

공사가 제때 완공된 덕에 저격검수들의 검기가 무력화되어 근처에 있던 모두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

왓슨은 그 시절의 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땐 아직 지팡이 없이도 평범하게 걸을 수 있었다.

경공술을 펼치며 아프가니스탄의 뜨거운 모래언덕을 누비던 기억은 아직도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마중 나온 죽음을 외면하며 필사의 행군을 이어가던 나날.

화약 냄새를 닮은 제자일 검법의 검향이 지금도 코끝을 아릿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젠 마차 신세를 지는 것도 익숙해지고 말았군.”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왓슨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짓을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순 없는 법.

그녀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내고 긍정적인 가능성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근 홈즈가 혈도를 틀어막은 음기의 못을 하나 뽑아준 덕에 예전보다 한결 걷기 수월해졌다.

구음절맥이 팔음절맥까지 나아진 것만 보아도 희망은 있다.

절맥증의 치료가 더욱 진행되면 언젠간 예전처럼 멀쩡하게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홈즈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최선을 다해 조수의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어디로 모실까요?”

“메이페어. 엘버말 스트리트로.”

레스트레이드가 불러준 검은색 경찰 마차에 탄 왓슨은 딱딱한 좌석에 앉아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포셋 경은 아까 있던 습격 직후 스코틀랜드 야드를 떠났는데, 그 후 곧바로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돌려 언질을 주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가 보낸 전보에 따르면 대피 예정인 인원은 체신장관 자신을 포함해 모두 열다섯 명.

홈즈는 경찰의 협조를 구해 관계자들을 새벽에 케임브리지의 호텔로 피신시킬 생각이었다.

“새벽부터 돌아다녀야 하니 미리 자둬야겠군…….”

왓슨은 홈즈와 합류한 다음 곧바로 하숙집으로 돌아가 눕기로 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15분도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앨버말 스트리트 18b.

정확히 홈즈가 지정한 건물 앞.

간판을 확인한 왓슨은 어째서 홈즈가 이런 곳으로 자신을 불러낸 건지 깨달았다.

<저커버그앤코Zuckerberg&Co 잉글랜드 지사>

이곳은 제갈세가의 건물이었다.

보아하니 홈즈는 울리히를 만나러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수사 진척 상황이라도 말해주러 온 거려나.”

울리히 저커버그도 착수금을 지불한 의뢰인이니 홈즈도 나름 신경 써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저런 구석은 정상적이라니까.

왓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처음엔 경비원이 나서서 제지하려 들었지만 신분과 용건을 밝히자 순순히 윗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덩치 좋은 경비원이 왓슨을 데려간 곳은 3층에 위치한 저커버그앤코 잉글랜드 지사장의 사무실.

복도 양쪽 끝에는 기분 좋은 향기를 풍기는 꽃이 한눈에 비싼 걸 알아볼 수 있는 화분에 심겨 있었고 벽에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크게 티를 내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무림세가의 재력은 이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왓슨은 최대한 감탄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문앞에 섰다.

그런데 앞서가던 경비원이 문을 노크한 순간.

“일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콰아앙!!

문 너머에서 굉음이 일었다.

“홈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한 상상.

경비원이 주춤대는 사이 왓슨이 먼저 문을 열었고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잘 와주었네, 왓슨.”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울리히.

그리고 여느 때처럼 차분하게 이쪽을 향해 웃는 자문 탐정 셜록 홈즈였다.

“무, 무사해서 다행이야.”

왓슨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대는 동안 경비원이 주저앉은 울리히를 부축해 일으켰다.

“말도 안 돼……. 이게 현실일 리 없어.”

한편 공허한 눈으로 무어라 중얼대는 저커버그앤코 잉글랜드 지사장은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딱히 외상이나 내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에 왓슨은 제갈율리 대신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업무에 치이는 대기업의 중요 임직원답게 제갈율리의 책상 위엔 두 대의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개중 한 대는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었다.

나머지 한 대는 멀쩡했지만 수화기가 살인사건 현장에서 본 것처럼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게 여간 불길한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벽에 뚜렷하게 새겨진 거대한 주먹 자국.

그 크기가 피해자들의 측두부에 남아있던 것과 같을 거라고 짐작하는 데엔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왓슨이 묻자 홈즈가 유쾌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긴. 보면 모르겠나. 내가 저커버그앤코 잉글랜드 지사장을 위기에서 구해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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