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47화 (47/110)

047. 유령권마 (4)

Phantom Fist (4)

천하를 움직이는 건 기관차가 아닌 깨달음이다.

-빅토르 위고, <장발장전Les Misérables>-

* * *

“신식 건물은 역시 달라도 뭐가 달라.”

역사 안으로 들어간 왓슨은 길 하나를 두고 옆에 세워진 킹스 크로스 역을 떠올렸다.

킹스 크로스 역도 나름 커다랗고 역사가 깊은 곳이었지만 8년 전에 세워진 이 기적 같은 공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73년도에 완공된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기둥 간 간격이 243피트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도역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역사驛舍와 함께 건축되어 세인트 판크라스의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미들랜드 그랜드 호텔 역시 역의 명성과 걸맞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만든 열네 개의 기둥과 6천만 개의 벽돌, 그리고 9천 톤Imperial Ton의 백련정강Multiple-Refined Steel이 사용된 호사스러운 붉은 건물은 대영제국의 자랑.

다만, 오늘 이곳에 묵을 예정은 없다.

그녀는 지금부터 레스트레이드와 함께 다른 소송 관계자를 경호하기 위해 열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떠나야만 하니까.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로 말하자면 내무장관의 의뢰로 이번 사건을 맡게 된 수사 자문가 셜록 홈즈입니다.”

때마침 앞서가던 홈즈가 멈춰 서더니 돌아서서 짧게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말 한마디 뱉는 일 없이 곧바로 본론으로 돌입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을 위해 케임브리지劍橋행 열차의 일등석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오오……?!”

잠시 홈즈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던 이들조차 반색하며 기뻐하는 표정을 보였다.

“여러분은 쾌적하게 열차를 타고 호텔로 향하면 되시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탐정이라고 했나. 예의를 아는 친구라서 다행이야. 이제야 좀 잘 수 있겠어.”

일등석과 호텔.

예정보다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탓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졌던 이들의 노기를 효율적으로 가라앉히는 데엔 마이센맞춤Meissen Bespoke Ceramic의 단어였다.

다만, 왓슨은 일등석과 호텔 객실을 예약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을 텐데 그만한 자금을 홈즈가 어찌 구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사건 해결에 필요하답시고 울리히나 내무장관에게서 돈을 뜯어낸 걸까.

“…….”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합리적이고 타당한 추리였다.

“여러분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주시는 덕에 수사가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홈즈는 찝찝한 표정을 짓는 왓슨에겐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사무적인 소리를 늘어놓으며 일행을 열차 승강장으로 안내했다.

한 줄로 늘어선 객차는 단약과 물을 실은 단수차丹水車와 이어져 있었다.

선두에서 단수차와 객차를 끌고 달리는 건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운기기관차Yun-Qi Locomotive.

운기기관차 옆에선 상의를 벗은 철도기공사Locomotiveman들이 기수식Warming Up을 펼치고 있었다.

근골융륭한 대장부Nice Guy 여럿이 열기를 내뿜고 있는 탓에 기관차 곁에선 계속해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런던의 뭇 여인들이 농담 삼아 운기기관차를 증기기관차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다.

“슬슬 출발할 시간인가.”

왓슨이 고개를 들자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거대한 유리 천장을 통해 희미한 동틀 녘의 햇살이 내리쬐는 게 보였다.

-도미레솔, 솔레미도, 미도레솔, 솔레미도.

멀리서 오전 6시를 알리는 빅 벤大本鐘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출발을 앞두고 단수차와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 단약과 물을 공급받고 있던 철도기공사 중 하나가 시계를 보고는 옆에 있던 기적氣笛을 불었다.

-퓌오오오오!!!!!

출발 시각이 다가온 것을 알리는 웅장한 소리가 역사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이 역무원과 차장의 안내를 따라 일제히 객차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준비는 전부 끝나가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선 안심하고 사흘 동안 휴가를 즐겨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홈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는 그동안 살인마에게 영국 형법의 지엄함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겠습니다.”

바로, 이 주먹으로.

왓슨의 눈에 비춘 탐정의 두 손은 그렇게 웅변하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잠깐 얘길 좀 해둬야겠어.”

장장 17시간 동안이나 떨어져 있던 탓일까, 출발 시각이 다가왔지만 왓슨은 잠깐이라도 좋으니 홈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왓슨이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남자다.

자신을 방치하고 혼자 움직인 데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

다만, 조수 된 사람으로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들어보고 싶었다.

“……음?”

그런데, 열차에 탑승하기 전 홈즈에게 말을 걸러 다가가던 왓슨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호를 위해 따라왔던 경감 중 레스트레이드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열차에 타는 일 없이 홈즈가 있는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움직이느라 고생이 많았네, 왓슨.”

역에 들어선 이후로 사람들을 인솔하느라 정신이 없던 홈즈는 드디어 왓슨과 대화할 여유가 생긴 게 기뻤던 듯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겨우 만났군, 홈즈.”

“그러게 말이야.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 뭔가.”

예상했던 대로 홈즈는 미안하다는 기색 따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자네가 고생하는 건 잘 알고 있네. 제일 바쁜 사람은 누가 뭐래도 범인을 쫓는 사람일 테니까.”

“알아줘서 고맙네. 역시 자네밖에 없어.”

인사가 끝난 참에 왓슨은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그녀는 홈즈의 뒤에 모여 있는 경감들을 조심스럽게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저기 모인 경감들은 호텔까지 따라와 경호를 돕는 게 아니었나?”

“굳이? 경호는 자네와 레스트레이드에게 맡기겠다고 말했지 않은가.”

홈즈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한껏 위로 끌어올리며 답했다.

“남은 경감들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잇는 길목에 배치해 혹여라도 범인이 표적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감시망을 펼칠 예정이야.”

“아하. 그런 거였나.”

왓슨은 손뼉을 마주쳐 감탄을 표했다.

역시 홈즈다.

경감들을 대기시킨 건 범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런던을 빠져나가 표적을 위협할 수 없도록 막기 위함이었나.

이로써 작은 의문 하나가 해결되었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답해주겠네.”

“음.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사실 왓슨의 머릿속에선 여러 의문이 소용돌이치는 중이었다.

범인이 어떤 수법을 사용했길래 밀실 속 피해자들을 주먹으로 때려죽일 수 있던 건지.

그 외에도 유령권마가 아무 상관이 없는 제갈율리의 목숨을 노린 이유라든지.

어제 저커버그앤코의 사무실에서 홈즈가 무심코 입에 담은 ‘검증이 끝났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하지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 내내 걸어 다닌 탓일까.

왓슨은 홈즈에게 질문을 퍼붓기 이전에 자신이 대단히 고생했다는 사실을 먼저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다 좋은데, 다음부턴 그냥 같이 다니면 안 되겠나.”

“이번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다음부턴 그리하겠네. 내 자네에게 약조하지.”

“내가 종일 혼자 다니느라 얼마나 불안했는지 자넨 이해하지 못할 거야, 홈즈.”

홈즈는 왓슨이 뱉은 불평을 잠시 곱씹는 듯 허공을 바라보다 예고 없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하긴, 스코틀랜드 야드의 지하를 걸어 여기까지 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겠어.”

“……?!”

“그래서, 경찰이 숨겨둔 비밀통로를 걷는 기분은 어땠나?”

왓슨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제 홈즈와 스코틀랜드 야드에 들렀을 때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일단 관계자를 야드까지 모으기만 하면 세인트 판크라스 역까지 비밀리에 데려갈 수 있다고.

그는 통로에 관해선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홈즈는 관계자와 경감들이 어떤 식으로 유령권마를 따돌렸는지 몰라야 정상이었다.

“거길 지나온 건 대체 어떻게 안 건가?”

“그야 간단하지.”

홈즈가 지팡이 끝으로 왓슨의 발목을 가리켰다.

“자네의 바지를 보게. 화이트홀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잔디밭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바지 밑단이 이슬에 젖어있지 않은가. 새벽에 비가 내린 것도 아닌데.”

“과연, 자네의 절기는 몇 번을 봐도 놀랍네. 그렇게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것도 무언가 특별한 심법을 익혀서 그런 건가?”

“바보 같은 소리 말게.”

“흠…….”

왓슨은 홈즈가 정말로 상단전Upper Elixir Field이라도 열어젖힌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당사자가 부정하니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나저나 어두운 곳에서 눈까지 가리고 걷게 하다니, 역근경 수련자답지 않게 신경질적인 짓을 시켰군그래. 넘어지지 않으려고 고생이 많았겠어.”

“그건 또 어떻게―”

“포셋 경을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안대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지하 통로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본 게 없을 테니 아쉽게 되었어.”

“자네가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 하다니 흔치 않은 일이군. 그래도 안심하게. 지하에서 본 건 없어도 자네가 좋아할 법한 수수께끼의 단초를 건져왔거든.”

왓슨은 반색하며 지하의 비밀통로를 걷다 들은 신비로운 노래에 관해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퓌이이이이!!!!

때마침 울린 두 번째 기적Essence Whistle소리가 출발할 시간이 다가온 것을 알렸다.

“멋지군! 그 이야기는 범인을 잡고 마저 듣도록 하지.”

홈즈는 왓슨의 짐을 대신 들더니 일등석까지 함께 걸어가 주었다.

“호텔에서 느긋하게 푹 쉬고 오게나. 런던에 돌아오기 전까진 전부 해결되어 있을 걸세.”

그렇게 말하는 홈즈의 얼굴에선 사건 해결을 앞둔 탐정의 여유와 유쾌함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왓슨이 기대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한결같다.

혼자 비밀을 파헤치고 모든 단초를 손에 쥔 채, 진상을 미소 뒤에 감추며 살아간다.

그리고는 마음이 내킬 때, 혹은 확고한 증거가 있을 때. 최고의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관객의 앞에서 진실을 노래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홈즈가 정답을 밝히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뿐.

‘아무리 그래도 혼자 내버려 둬서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왓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홈즈가 그 정도로 남에게 다정다감하게 구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에게 기대해야 하는 건 전혀 다른 분야에 속한다는 것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참. 내 정신 좀 보게.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지 뭔가.”

“응?”

“자네를 혼자 두어 미안하네. 이건 진심일세.”

“……?!”

이어진 홈즈의 말에 왓슨은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입을 헤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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