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48화 (48/110)

048. 유령권마 (5)

Phantom Fist (5)

대학관은 천무지체를 혐오한다. 수도학관修道學館이 성자를 배척하는 것처럼.

-랠프 월도 에머슨-

* * *

예상치 못한 한 마디. 힘겹게 웃음을 참은 왓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친구는 못 이기겠군.’

그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신같이 눈치채다니.

런던의 유일무이한 자문 탐정다웠다.

“……이번만일세.”

왓슨이 슬며시 홈즈의 얼굴에 손을 뻗어 반듯한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똑바로 홈즈의 눈을 쳐다보고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털어놓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네의 계획을 믿고 따르겠네.”

“이해해줘서 고맙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까 다치지나 말게.”

“최고의 주치의 왓슨 박사의 귀중한 조언이니 이 홈모, 삼가 받잡도록 하겠네.”

“……무례하긴.”

왓슨은 저도 모르게 셜록 홈즈라는 남자를 표현하는 데 비교적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뱉고 말았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네만. 다시 말해주겠나.”

홈즈는 존재해선 안 되는 단어라도 들은 것처럼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왓슨은 그런 홈즈를 보며 배덕감과 쾌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후안무치한 이성理性의 사도司徒와도 같은 남자를 동요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작은 만족감 역시도.

“이건 주치의가 아니라 친구로서 하는 조언일세.”

왓슨은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왓슨―.”

“어서 가보게. 사건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쾅!

홈즈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왓슨은 재빨리 객차 문을 닫았고,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운기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왓슨 주제에.”

승강장에 남겨진 탐정은 멀어지는 열차를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홈즈는 회귀 이전에 함께 다니던 조수, 그러니까 방금 열차를 타고 떠난 왓슨의 쌍둥이 오빠가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일을 떠올렸다.

무려 총에 맞은 다음에야 존이 성공했던 위업을, 그의 여동생은 고작 몇 마디 단어만으로 해내고야 말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그리고 생각했다.

범인은 머지않아 자신이 마주한 적이 어떤 무인인지 알게 될 거라고.

“대기 중인 인원에게 전보를 보내게, 그렉슨. 선로를 망가뜨릴 시간이야.”

“알겠습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왓슨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거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흘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유령권마Phantom Fist의 가면은 바로 오늘 밤.

케임브리지에서 벗겨질 테니까.

* * *

왓슨과 레스트레이드, 그리고 포셋 경이 탑승한 열차는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햇필드를 지나 힛친까지 북상하면 비스듬히 동쪽으로 진로를 틀 것이다.

철도기공사들의 휴식 시간까지 고려해도 오후 3시엔 케임브리지劍橋에 도착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열차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멈춰서야만 했다.

“지면이 가라앉아 선로가 우그러진 모양입니다.”

승객들이 열차가 정지한 사실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차장이 일등석으로 달려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귀띔해주었다.

왓슨과 레스트레이드는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어 철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선로 밑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서 철도가 아래로 푹 꺼진 모양새로 휘어 있었다.

“으음, 곤란하게 되었군.”

깔린 레일은 총 두 줄.

옆에 있는 선로로 옮기려면 분기기Railroad Switch가 필요하다.

사실, 분기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저기 보이는 커다란 구덩이를 지난 곳에 있을 뿐이지.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뜻밖에도 차장은 침착한 얼굴로 승객들을 달래는 중이었다.

“분기기를 옮겨서 설치하면 옆 선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착이 조금 늦어지는 건 어쩔 수 없겠군요.”

설명을 마친 차장은 그대로 일등석 객차를 지나 다음 칸의 승객에게 상황을 설명하러 갔다.

“지반이 무너진 모양이군. 그나마 멀쩡한 선로가 한 줄 더 있어서 다행이야.”

포셋 경이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왓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포셋 경이 맹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다시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전방을 보자 운기기관차를 끌고 달리던 철도기공사들이 멀리 보이는 분기기를 공구로 뜯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열차를 왔던 길을 따라 뒤로 밀어낸 다음 분기기를 가까이에 설치하면 무사한 쪽의 레일로 갈아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도착 시간이 늦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을 터.

“조금 늦는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바로 그거지.”

왓슨을 비롯한 일등석 승객들은 대체로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래 열차 여행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따라붙는 법이다.

작게는 양떼가 선로를 가로지르는 탓에 잠시 기관차가 멈춘다든지, 크게는 열차 강도가 습격하는 등.

어차피 케임브리지 도착이 늦어진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유령권마가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비좁고 냄새나는 삼등석이 아닌 쾌적하고 널찍한 일등석 객차.

호텔에 머물 시간에 일등석에서 조금 더 오래 쉰다고 생각하면 되는 문제다.

“이 틈에 모자란 잠을 자거나 요기라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여러분.”

차장이 앞서 지나온 역에 선로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리러 간 사이, 벨 전화회사의 젊은 이사가 다른 이들에게 제안했다.

“그게 좋겠군.”

사람들은 차례차례 좌석 칸막이를 닫고 누워 낮잠을 자거나 식당차로 향했다.

왓슨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그들을 따라 식당차로 향했다.

새벽에 일어나 여태껏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인지 으슬으슬 오한이 느껴지기 시작한 참이다.

이대로는 배고파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터.

남들이 호텔에서 자는 동안에도 레스트레이드와 함께 경호를 맡아야 하니 이 틈에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식당차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자 든든한 풀 잉글리시 운기 브렉퍼스트十全英倫運氣朝食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열차에서 파는 것이어서 그런지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어차피 숙박비와 교통비를 남이 내주고 있는 상황.

왓슨은 큰맘 먹고 아침 식사를 주문하기로 했다.

“이거로 하지.”

잠시 후, 식당차소이가 밀크티가 담긴 찻주전자와 십전영륜운기조식을 담은 접시를 왓슨의 테이블로 실어 날랐다.

십전영륜운기조식Full English Yun-Qi Breakfast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충분히 호사스러운 메뉴였다.

하수오를 먹인 돼지의 피와 살코기로 만든 블랙 푸딩血腸&소시지香腸.

십년강남두十年江南豆를 조린 베이크드 빈스茄汁焗豆 등.

영약을 블렌딩한 찻잎으로 밀크티를 우린 것은 물론 음식에도 상당히 값진 식자재가 사용되어 있어 위장과 단전 모두 여간 든든한 게 아니었다.

왓슨은 창문 너머로 펼쳐진 목가적인 교외의 풍경을 바라보며 부지런히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식사를 마친 다음은 일등석 침대에 누워 쪽잠을 잤다.

중간에 열차의 진동에 놀라 일어났는데, 그새 분기기 설치가 끝나고 기관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껏 해봤자 식사 중 왓슨이 탄 차량보다 늦게 출발한 열차가 먼저 옆에 있는 멀쩡한 선로를 달려 앞질러 간 것 정도일까.

추월한 열차의 승객 열댓 명이 창문을 열고 왓슨이 탄 객차를 쳐다보고 있던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왓슨은 다시 침대차에 드러누워 마저 잠을 잤다.

4시간 후, 왓슨과 소송 관계자들은 무사히 케임브리지에 도착했고.

새로운 살인 사건은 그곳에서 일어났다.

* * *

오후 5시 16분.

왓슨이 탑승한 열차는 런던에서 북동쪽으로 56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소도시, 케임브리지劍橋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기차역을 나선 왓슨과 레스트레이드는 열댓 명의 인원을 인솔해 호텔로 이동을 개시했다.

캠강River Cam에 놓인 다리Bridge에서 유래된 그 이름처럼 케임브리지는 오래전부터 런던에서 북부로 건너갈 때 거쳐 가는 길목으로 번성해왔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상업의 요충지였던 과거와 지금의 케임브리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하앗!!

-타아앗!

-용조수Dragon Claw를 받아라!

-면장Cotton Hand으로 흘려주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젊은 기합 소리.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도시 곳곳에선 여전히 비무Duel가 진행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는 활기가 넘쳐서 좋군.”

레스트레이드를 따라 오래된 건물이 늘어선 시가지를 걸어가던 포셋 경이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맹인이지만 반향정위대법을 펼치고 있는 덕에 지팡이를 짚은 왓슨보다 경쾌한 리듬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저 나이에도 여전히 팔팔하시군…….’

왓슨은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체신장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소리에 민감하다는 사실은 진즉에 확인한 바 있다.

다만, 그는 왓슨이 생각했던 것처럼 떠들썩한 잡음을 꺼리는 것이 아닌 특정한 유형의 소음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즐기고 있는 듯했다.

아까도 열차에 타고 있는 동안 포셋 경이 몇 번인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주로 운기기관차를 끄는 철도기공사들이 기합 소리를 발하거나 요란하게 기적을 불 때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에 대한 애정이 여전히 각별한 게 틀림없었다.

‘저러니까 곤륜의 도달자Alcanzador가 될 수 있던 거겠지.’

나이도 장애도 무를 추구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몸소 보여주는 포셋 경을 보고 있던 왓슨의 가슴에 수련을 향한 집념이 끓어올랐다.

어느샌가 그녀의 머릿속엔 다시 두 다리로 자유롭게 경공을 펼치고 말겠다는 목표가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도시를 가득 채운 있는 무학구열武學究熱이 향상심에 불을 붙인 게 틀림없다.

왓슨은 새삼스럽게도 케임브리지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호텔이 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이군.”

그때였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판사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불만을 토로한 건.

아무래도 마냥 마음이 들뜬 사람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이제 5분 정도만 더 걸으면 도착할 겁니다.”

인솔과 경호를 맡은 이상 이 정도 불만은 달래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왓슨이 노신사를 향해 점잖게 미소를 지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기차역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도시의 그 특이한 성격상 기차역은 외곽에만 지을 수 있도록 제한되고 있었으니까.

“홈즈도 이곳에서 수련했으려나…….”

지금은 곁에 없는 동거인을 떠올린 왓슨은 옅게 웃으며 케임브리지의 경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상상했다.

담장 너머 비무대에서 출수하는 그녀의 탐정을.

그의 학창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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