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49화 (49/110)

049. 학관도시 (1)

University Town (1)

중요한 건 평범한 행동으로 비범한 초식을 펼치는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 *

케임브리지의 중심부를 흐르는 캠강의 양쪽 기슭에는 수십 곳의 학관College이 늘어서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땅덩이가 학관으로 가득 찬 이 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무장Campus을 형성하고 있는 학관도시學館都市였다.

무학을 탐구하는 제자들의 열정이 캠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는不盡劍江滾滾來 이 도시의 학관은 전부 오랜 전통을 가진 명문으로 우수한 시설과 교육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나 다양한 문파의 무공을 가르치는 공동학관인 케임브리지 대학관은 젊은 무인이라면 옥스퍼드 대학관과 더불어 한 번쯤은 입관을 꿈꾸는 고수의 요람.

케임브리지 대학관은 근래 한뇌열맥寒腦熱脈 앨프리드 마셜을 개파조사Founding Master로 둔 검교파의 총본산이 되어 더욱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절맥증만 아니었다면 런던 대학관에서 의학 박사를 취득하는 대신 자신 역시 이곳에서 무공을 갈고 닦았을지도 모른다고, 왓슨은 생각했다.

‘만일 그랬다면 홈즈와 동문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홈즈는 학창 시절 옥스브리지Oxbridge에서 무공을 수련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옥스브리지는 대영제국 최고의 명문 학관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관을 합쳐 일컫는 단어.

그러니까 당사자가 밝히기 전까진 둘 중 어딜 졸업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절반의 확률로 지금 보는 풍경이 홈즈가 학창 시절 보던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원시천부元始天父와 태상성자太上聖子와 영보성령靈寶聖靈의 이름으로, 아멘阿門.”

왓슨은 홈즈를 떠올린 김에 범인의 빠른 체포와 동거인의 평온무사Uneventfulness를 기원하며 성호경聖號經을 외웠다.

삼청Trinity께서 보우하사 사건이 빠르게 해결되면 예정보다 일찍 베이커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앞서가던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턱 끝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 도시의 여느 학관 건물만큼이나 오래된, 아니, 과거 어떤 문파의 학관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물의 팔면을 둘러싼 널찍한 정원.

중앙엔 정문으로 이어진 벽돌길이 보였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대문을 지난 순간, 생경한 감각이 왓슨의 몸을 덮쳤다.

-저릿

마치 얇디얇은 종이 한두 장을 몸으로 직접 뚫고 전진하는 듯한 느낌.

언제 한 번 겪어본 듯,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었다.

오감이 지금보다 둔했을 시절, 그러니까 절맥증을 홈즈가 부분적으로 치료해주기 이전이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미미한 차이였지만 전신이 근질근질한 게 꼭 정체불명의 힘이 세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다…….”

왓슨은 혹시나 싶어 다른 일행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다음 대문 안팎을 오가며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방금 느낀 감각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는 겁니까. 닥터 왓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멈춰선 왓슨을 레스트레이드가 재촉했다.

“아니, 방금 기묘한 느낌이―”

“방음진법 안으로 들어가는 게 처음인가 봅니다.”

“방음진법?”

“법원이나 기업 등이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하는 저커버그앤코의 진법입니다. 최근엔 소란스러운 거리에 위치한 숙박시설에서도 보급되었고요.”

“아하. 그래서였군.”

왓슨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문을 지나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거리에 메아리치던 학관 제자들의 기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분명 자신은 런던에서도 방음진법이 펼쳐진 장소로 들어간 적이 있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진법 안쪽으로 진입하는 감각을 느끼지 못했던 건 필히 절맥증의 영향으로 육체의 감각이 둔해졌던 탓이었으리라.

이렇게 진법의 영향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만 봐도 홈즈를 향한 감사의 마음과 존경이 절로 우러나올 따름이었다.

“좋아, 안으로 들어가세.”

왓슨은 빙글빙글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호텔 정문으로 걸어갔다.

대문에서 정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좌우를 둘러보니 정원사와 인부들이 나무를 뿌리째 파내 옮겨 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정원사 중 한 명, 얼굴에 지저분한 검댕이 잔뜩 묻어있고 유난히 코가 큰 사내가 왓슨을 보았다.

사내는 잿빛 눈동자로 가만히 왓슨을 주시하다 대뜸 윙크했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친놈인가.”

왓슨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종종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갔다.

* * *

레스트레이드가 체크인을 마치는 동안 왓슨은 포셋 경을 비롯한 열다섯 명의 관계자들과 함께 로비의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째 런던보다 이쪽이 구름도 적고 날씨도 선선한 것 같습니다.”

“케임브리지는 좋죠. 햇빛도 자주 볼 수 있고 면학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마음에 듭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났군요. 검교대학관Cambridge University에서 수학하던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오호. 제임스 변호사님도 동문이셨군요.”

“검교의 후학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법조계 인사 중에도 케임브리지에서 수련한 자들이 있던 모양인지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있었다.

법조계에서 일하려면 으레 런던의 링컨스 인에서 공부해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던 왓슨에겐 꽤나 신선한 광경이었다.

“캠강 기슭에서 곡차Ale 한 잔 마시며 시를 한 수 읊으면 낭만이 따로 없겠군요.”

“그러고 보니 올해도 곧 옥스브리지의 드래곤 보트龍舟 레이스 대항전이 열리지 않나요?”

“예. 올해는 템즈강에서 진행되는 거로 기억합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나가면 검교파 조정대Boat Club가 연습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경감이 외출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사흘이라곤 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게 못내 아쉽군요.”

대부분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수련을 쌓은 우체국 관계자들 역시 학관도시가 마음에 드는지 사흘 동안 갇혀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사흘만 기다려주십시오. 전부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일입니다.”

자신은 의사이자 자문 탐정의 조수이지만 지금은 경호를 위해 동행한 몸.

왓슨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최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

“……흠.”

다만,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기껏 열차를 타고 교외의 소도시에 왔는데 사흘 내내 숙소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게 틀림없었다.

이대로 가면 왓슨과 레스트레이드의 눈을 피해 호텔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려는 이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시도가 실패하든 아니든 통제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고, 만에 하나 범인이 케임브리지까지 따라온다면 그땐 정말로 다시 누군가가 살해당할 가능성도 있다.

왓슨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은 상황.

“여기 계신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런던에서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진 저희 중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앉아있던 사내가 왓슨의 말을 거들어 주었다.

‘저자는…….’

왓슨은 사전에 레스트레이드에게서 전달받은 경호 대상의 명단을 주머니에서 꺼내 펼쳤다.

종이에는 경호 대상의 얼굴과 성명, 그리고 직함이 적혀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티모시 영.

우체국과 소송을 진행 중인 네 곳의 전화 회사 관계자 중 가장 젊은 나이에 이사까지 승진한 엘리트였다.

“여러분처럼 저도 언제 살수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무려 체신장관이 직접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퍼질러 자던 이들과 달리 티모시는 나름대로 상식인인 듯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거로 미루어보아 정말로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지만 그는 애써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런 거로 위로가 될진 저도 모르겠지만 기왕 한자리에 모인 거, 제가 좋은 향빈주香檳酒를 한 잔씩 대접하겠습니다.”

티모시가 혼자 멀리 앉아있던 건 호텔의 급사를 부르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진즉에 주문을 마쳐두었던 듯 급사 두 명이 수레에 얼음에 식힌 향빈주Champagne와 샴페인 잔 열일곱 개를 싣고 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퐁!

철사를 감은 코르크 마개를 열자 샴페인 병이 하얀 김을 토해냈다.

급사는 차례대로 잔에 술을 따르고는 체크인을 마치고 걸어오던 레스트레이드를 시작으로 열일곱 명의 투숙객 모두에게 잔을 돌렸다.

“확실히 식전주로 샴페인은 훌륭한 선택이지…….”

볼랭저 샴페인을 도매상도 아니고 호텔에서 네 병이나 주문한 걸 보니 티모시라는 사내의 지갑은 꽤 두둑한 듯했다.

다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려 드는 행동은 충분히 수상했다.

‘확인해볼 필요는 있겠어.’

왓슨은 허리춤에 숨겨둔 쿠션에서 바늘을 하나 뽑았다.

평소 치료를 위해 기혈에 꽂는 장침과 크기는 같지만 한쪽 끝이 뭉툭한 바늘.

선단에 약재를 묻혀 환자의 몸에 투여하는 식으로 사용하는 약침藥鍼이었다.

다만, 왓슨이 이 바늘 끝에 증착蒸着시켜둔 건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이 아닌 독을 검출하는 약품.

왓슨은 슬며시 소매 아래에 숨긴 바늘 끝을 잔 안에 담갔다.

-파스스스스

잠시 샴페인의 기포가 터지는 걸 지켜보던 왓슨이 바늘을 빼냈지만 이렇다 할 화학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다.

‘괜한 걱정이었군.’

왓슨은 바늘 끝에 묻은 술을 슬며시 닦고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쓸데없이 예민해진 탓에 무고한 티모시를 의심하고 말았다고 반성하면서.

“소제가 티모시 형장兄長을 오해하고 있던 모양이오.”

“그런 말은 맙시다. 체신부의 대협들이 직접 원해서 소송을 일으킨 게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내각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술이 들어간 덕인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서로 경계하고 있던 우체국 관료들과 전화회사 임직원들이 한결 풀어진 분위기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호법을 맡은 입장이라 해도 열차에 타고 있을 때부터 이어지던 미묘한 분위기가 불편했던 왓슨에겐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중에 유령권마는 없겠군.’

술에 독이 없다는 걸 확인한 왓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긴, 홈즈가 자신을 위험한 곳에 보냈을 리 없다.

괜히 예민해진 걸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모양이다.

옆에 있던 레스트레이드 역시 아까보단 한결 긴장감이 풀어진 얼굴로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가운데 일행은 호텔 1층에 잡아둔 각자의 방에 짐을 푼 다음 푸짐한 저녁 식사를 즐겼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잠이 들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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