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학관도시 (2)
University Town (2)
이 우주에서 펼쳐진 초식인 이상, 자연경에 달한 고수와 범용한 무림인의 출수를 가릴 것 없이 그 흔적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새뮤얼 스마일즈, <자구비책Self Help>-
* * *
열다섯 명의 일행 중 대부분은 저녁 늦게까지 카드놀이를 즐기다가 방에 들어갔고, 군의관과 경찰은 그제야 불침번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제길. 한 끗발 차이로 돈을 잃고 말았네.”
“도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코인 토스로 순서를 정하도록 하죠. 뒷면이 나오면 제가 먼저 불침번을 서겠습니다.”
“그럼 나는 앞면에 걸지.”
사실 딱히 어느 쪽을 맡아도 상관은 없었다. 군에 몸담았던 시절부터 불침번엔 익숙했으니까.
물론, 당장 피곤한 몸을 뉘이고 싶은지라 먼저 잠드는 쪽이 좋아보인 건 사실이었지만.
-팅!
그런 왓슨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 걸까.
레스트레이드가 던진 동전은 뒷면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제가 먼저 네 시간 동안 복도에 서 있으면 되겠군요.”
순순히 결과에 승복한 경감은 복도 끝으로 걸어가 벽에 등을 기댔다.
복도의 양쪽에는 유령권마의 잠재적 표적으로 여겨지는 열다섯 명이 잠들고 있었는데,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선 모든 방을 감시할 수 있었다.
홈즈가 미리 호텔에 연락해 창문을 전부 틀어막은 덕에 문 말고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는 없다.
유령권마가 찾아오든, 방에 묵은 이들이 빠져나가든, 전부 지켜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나는 먼저 잠시 자다 오겠네.”
왓슨은 레스트레이드에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복도 반대쪽 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호텔 방은 1등석 객차 이상으로 쾌적했고 침대 역시 푹신했다.
심지어 한쪽 벽에는 아늑한 벽난로까지 있었다.
레스트레이드와 교대해야 하는 탓에 길게 잠들 순 없어도 여독을 푸는 데엔 지장이 없을 터.
“……방음진법에 전화까지, 호텔 주인이 돈을 꽤 들인 모양이야.”
침대나 다른 가구 이상으로 왓슨의 눈을 사로잡은 건 방에 설치된 전화기였다.
호텔에 묵은 다른 투숙객과 대화할 수 있는 내선 전화는 물론 멀리 떨어진 도시로 연락하는 것도 가능했다.
“홈즈에게 연락할 순 없으려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로, 홈즈는 지금쯤 바쁘게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을 테고.
둘째로, 홈즈에게 연락하고 싶어도 허드슨 부인의 하숙집에는 전화기가 없었다.
가입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이유로 홈즈도 허드슨 부인도 굳이 사용하려 들지 않는 게 그 이유였다.
“……사흘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혼자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묵고 있는 탓에 동거인의 빈자리가 어느 때보다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범인을 뒤쫓고 있는 홈즈가 고강한 무공과 뛰어난 두뇌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사흘이라고 했지만 분명 예상보다 빠르게 범인을 잡아 들일 게 분명하다.
“홈즈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왓슨은 외투를 벗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4시간 뒤엔 불침번을 서야 하니 차마 잠옷으로 갈아입진 못했다.
“…….”
몸에 둘둘 감아둔 붕대가 불편해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던 와중 문득, 가방에 넣어둔 가죽 주머니가 떠올랐다.
왓슨은 곧바로 그것을 꺼내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자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이걸 열어보게.’
가죽 주머니를 주며, 홈즈는 그렇게 말했다.
지저분한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을 걱정하는 홈즈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써먹으라고 준 건 아니겠지만―”
왓슨은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다음 가죽 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주머니에는 홈즈의 외투에서 나던 영약 냄새가 짙게 배 있었다.
“…….”
어째서일까, 외로움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 * *
오전 3시 20분.
체신장관 헨리 포셋이 묵고 있는 방에서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어디에서 걸려온 건지 알 수 없는 전화.
포셋은 침대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헨리 포셋이오. 이런 시간에 무슨 용건인지―”
-카득!
포셋이 말을 마치기 전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음……?!”
포셋이 맹인으로 살아오며 갈고 닦은 직감은 그 짧은 찰나 동안 자신을 겨눈 날카로운 살기를 감지해냈다.
다만, 살수가 지척까지 다가온 건 아니었다.
이 방에 있는 건 오직 자신뿐.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흐리멍덩했던 체신장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이 모든 의문을 설명할 수 있다.
벼락같은 깨달음과 함께 포셋은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가만히 있다간 죽고 만다.
지독한 살의의 출처를 확인한 포셋은 곧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콰아앙!!
그보다 먼저 한 줄기 파공성이 호텔을 뒤흔들어놓았다.
* * *
이른 새벽.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깬 왓슨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흐엑.”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타구봉Golf Club.
분명 강렬한 소리와 진동이 호텔을 뒤흔들었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직감한 왓슨은 재빨리 다시 붕대를 몸에 감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저긴가……!”
그녀의 시선은 곧바로 체신장관이 묵고 있던 105호 객실의 입구를 향했다.
그곳에는 먼저 깨어난 투숙객 대여섯 명이 흥분한 얼굴로 문 앞에 몰려와 있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는―”
최악의 가능성이 왓슨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려주시오!”
“비키게!! 포셋 경의 안위를 확인해야만 하네!!”
“장관대인! 계십니까!! 무사하시면 대답해주십시오!!!”
한편,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홀로 외로이 문앞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이라고 해도 다수의 무림인을 홀로 가로막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만! 여기서부턴 경찰의 일입니다!! 다들 진정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닥치게! 장관대인의 안위를 확인하기 전까진 물러날 수 없어!”
경감은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려 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경감을 밀치고 굳게 닫힌 체신장관의 방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정말로 체신장관이 습격당해 죽은 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저기 몰려있는 사람들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란을 잠재우는 쪽이 우선으로 여겨졌다.
왓슨은 병원에서 무리적武理的인 힘을 가하는 일 없이 환자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취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수법을 펼쳤다.
-황금몽향충만안 黃金夢鄕充滿眼
-이미소수후파수 以微笑守候破睡
금빛 선잠이 눈에 가득하니.
미소로 일어나길 기다리리라.
토머스 데커가 남긴 금몽경Golden Slumber의 구결을 따라 심상을 그리자 왓슨의 진기가 변화를 일으켰다.
-화아악
진기는 의념이 이끄는 대로 강력한 진정작용을 지닌 음기로 화했고, 왓슨은 그 기운을 바람에 실어 호텔 복도에 퍼뜨렸다.
환자 하나를 완전히 마취해야 하는 게 아닌 흥분한 다수의 인원을 진정시켜야 하는 상황.
당연히 소모되는 진기 역시 평소의 몇 배는 많다.
허나 독각화망의 내단을 절반이나 흡수한 왓슨의 단전은 이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내공을 품고 있었다.
-털썩
“내 다리에 무슨 짓을 한 건가…….”
“기이하군, 단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왓슨보다 경지가 낮은 이들은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닌데 차례차례 바닥에 주저앉고 있었다.
근육이 이완되어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상태.
무공의 성취가 뛰어나 이질적인 음기를 사용한 마취를 견뎌내던 이들도 진정효과에선 벗어나지 못한 듯 한결 차분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왓슨은 레스트레이드가 지키는 포셋 경의 방문 앞으로 걸어가 설득에 나섰다.
“유령권마가 케임브리지까지 따라왔는데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군그래.”
“잠시면 됩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다음 바로 대응하겠습니다.”
홈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왓슨은 필사적으로 곁에 없는 동거인을 상상하며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소송 관계자들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본의 아니게 신세를 졌군요, 닥터. 어째서 홈즈 씨가 박사님을 동행시켰는지 알 것 같습니다.”
레스트레이드는 사람들이 급격히 차분해진 게 누구의 덕인지 파악한 듯 바로 왓슨에게 감사를 표했다.
평소 그렇게나 멍청해 보이던 사내가 진기의 성질 변화를 빠르게 눈치 챈 사실이 놀라웠는지 왓슨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레스트레이드와 그렉슨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감 중 가장 뛰어나다는 홈즈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헌데 방금 펼친 무공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한편 레스트레이드는 왓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궁금한 걸 물어보고 있었다.
“병원에서 군자산Gentleman Powder이 모자랄 때 환자를 마취하는 데에 사용하는 구결을 응용해 보았네.”
“그렇군요. 응용이라, 흠…….”
레스트레이드는 무언가 영감이라도 얻은 것처럼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보며 왓슨은 홈즈를 볼 때 자신이 보이는 반응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에 더해 심각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약간의 성취감과 쾌감 역시도.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기존에 익힌 무리武理를 활용할 수 있게 된 건 홈즈에게 탄지공에 관한 가르침을 얻은 덕이었다.
용봉지회를 준비하던 짧은 시간 동안 홈즈가 일깨워준 열린 사고방식은 왓슨에게 다양한 투로와 내공의 운용 방식을 깨우칠 기회를 주었다.
다만, 지금은 홈즈의 탁월함을 기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체신장관의 목숨이 위급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럴 때 의사인 자신이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
“일단은 문을 열어주게. 포셋 경의 용태를 확인하고 싶네.”
왓슨은 군인다운 결연한 표정으로 경감에게 요구했다.
레스트레이드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보여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레스트레이드는 다른 이들이 머무는 객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조심스레 지키고 있던 문을 열었다.
-끼이익
왓슨은 열린 문틈을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방 안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포셋 경의 몸뚱이였다.
“맙소사…….”
레스트레이드가 이미 한 번 살핀 듯 얼굴에 하얀 천이 덮여 있었는데 피가 스며들어 있는 걸 보니 의사보단 비슷한 이름을 지닌 다른 직군의 전문가가 필요한 상황인 듯했다.
창문은 막혀 있고 누군가가 출입한 흔적 역시 보이지 않는다.
다만 현장에는 포셋 경 외에도 하나 더,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위태롭게 줄에 매달린 채 흔들리고 있는 수화기.
“유령권마…….”
런던에서 목격한 살인 현장이 곧바로 왓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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