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바다
Sea
나는 미지의 무리武理로 가득한 거대한 바다가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아름다운 초식과 매끄러운 투로를 찾아 보법과 철사장鐵砂掌을 연마하는 아해와도 같다.
-아이작 뉴턴-
* * *
내가 묻자 젊은 엘리트는 아까보다 한결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제가 뇌정지기를 다루는 게 알려지면 유령권마라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 합격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니, 사람 말을 끝까지 들으면 어디 덧납니까? 제가 유령권마였다면 머리에 이런 큼지막한 주먹 자국이 생길 리―>
덧난다.
“참. 여러분이 예정보다 세 시간 먼저 기상해 짐을 챙겨 떠난 직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관들이 정중히 집안을 수색했습니다.”
<뭐라……고요?!>
다들 찔리는 구석이 하나씩은 있어서 그런가 웅성대는 소리가 일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몇 건인가 사소한 개인적 일탈의 증거가 나오긴 했지만 티모시 영 씨의 서재만큼 문제가 큰 곳은 없었습니다. 벽난로에서 타다 남은 전화기가 네 대나 발견되었거든요. 참고로, 네 대 모두 수화기는 처참하게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덧붙이자마자 의자 다리가 호텔 로비 바닥을 시끄럽게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상을 깨달은 이들이 신속하게 티모시 영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질문입니다만. 영 씨의 집 난로에는 어째서 전화기가 네 대나 있던 건지요.”
<이…… 이건 우체국의 모함입니다!! 누군가가 제 서재에 침입한 게 틀림없습니다!!>
“우체국 권사들이 친절하게도 열쇠 없이 반무공 자물쇠를 망가뜨리는 일 없이 연 다음 가짜 증거를 넣어두었다는 거군요. 그것 참 기이한 일 아닙니까. 현장을 살피던 경감들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느라 애를 먹었다던데.”
놀라우리만치 그 누구도 영의 편을 들지 않았다.
세 시간 일찍 사람들을 깨워 스코틀랜드 야드로 데려간 건 범인이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수색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전화기를 미리 태우는 대신 적당한 곳에 숨겨둔 걸 보니 유령권마는 나와 경찰이 범행 수단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던 모양이었다.
예정보다 일찍 집을 비우게 되자 부랴부랴 전화기를 난로에 넣고 태워 없애려 한 듯했지만 전부 제때 회수하는 데에 성공했다.
재판에선 분명 놈의 유죄를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잠깐!! 제가 범인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립니다!! 여러분! 이 탐정의 말은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티모시 영, 그러니까 유령권마는 여전히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려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호텔에 범인이 숨어 있다는 게 비논리적이란 말입니다!>
영은 로비에 모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필사의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제 상처를 보십시오. 포셋 경의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정말로 전화기를 사용해 살인을 저질렀다면 런던이나 다른 도시에서 범인이 초식을 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나름대로 머리를 썼는지 괜찮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
<영 씨의 말이 맞아. 호텔에 범인이 있다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이상 영 씨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건 조금…….>
이미 설득당한 사람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레스트레이드 역시 긴가민가 눈치만 보고 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언제든 말만 하게, 홈즈. 탄지공은 준비되어 있다네.>
유일하게 왓슨만이 충실하게 내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그 믿음에 부응하는 것이 나의 일이겠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자네가 말한 것처럼 런던에 있는 범인이 전화로 케임브리지에 투숙 중인 포셋 경의 목숨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다네.”
<또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를―>
“왜냐하면 외부와 연결된 호텔의 전화선을 사전에 전부 끊어두었기 때문이지. 즉, 포셋 경에게 걸려 온 건 내선 전화였다는 소릴세.”
“……!!”
완벽한 정적이 호텔 로비에 찾아들었다.
반박할 수 없는 주장.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전화선 너머에서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약속대로 범인을 대령했습니다, 포셋 경.”
나는 적막이 지배한 로비를 향해 뇌정지기로 키운 음성을 발했다.
-쾅!
직후, 난폭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훌륭한 솜씨로군.>
이어서, 포셋 경의 목소리가 고요한 로비에 메아리쳤다.
내가 시킨 대로 범인의 초식에 당해 죽은 척 쓰러져 있다가 부랴부랴 일어나 걸어온 모양이었다.
<체신장관…… 어째서 살아있는 거지……!>
유령권마 티모시 영의 목소리는 혼란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유감스럽군. 이번 재판이 어떻게 흘러갈지 맹인인 내게도 보이는 것 같아서.>
<탐정, 네놈만 아니었어도!!>
체신장관의 도발에 넘어간 티모시 영이 대뜸 내게 성을 냈다.
그리고 나는 궁지에 몰린 범죄자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충분히 예상을 마친 상태였고 대처 방법 역시 준비해두고 있었다.
<죽어!>
-콰아아!
“홈즈!!”
공기가 뒤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왓슨의 비명.
유령권마가 수화기를 향해 권풍을 쏘아냈다는 사실을 파악한 나는 수화기를 단단히 두 손으로 붙잡았다.
“당해줄 것 같나.”
나는 곧바로 수화기를 쥐고 있던 손목을 비틀었다.
-꽈앙!
진동판의 방향이 비스듬히 머리 위를 향하도록.
“크헉…….”
수화기에서 튀어나온 권풍은 그대로 천장으로 솟구쳤고, 뚫린 바람구멍 너머에서 티모시 영이 고통에 겨운 신음을 발하는 게 들렸다.
“지하에서 종일 버티고 있던 보람이 있었군그래.”
전화기를 흙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천마장의 칼날을 뽑아 구멍을 확장한 다음 단번에 도약해 윗층Upper Floor으로 올라갔다.
그렇다. 왓슨이 묵던 호텔의 1층 로비 말이다.
“우욱……, 우웨엑……!”
호텔 정문으로 걸어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말끔했던 티모시 영은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으로 얼굴을 처참하게 구기고 있었다.
바닥을 부수며 위력이 약해졌다곤 해도 두개골을 산산조각내는 초식이 복부에 적중했으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을…….”
티모시 영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고 있었다.
전화선 너머에 있던 나를 죽이려고 쏘아낸 초식이 자신에게 돌아왔으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말했지 않나. 외부로 연결된 전화선은 모두 끊어두었다고. 그럼 통화 중이었던 내가 지척에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지.”
유령권마의 상태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배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제때 호신기를 집중해 몸을 보호한 모양이었다.
그래. 고작 이 정도로 죽어줄 어설픈 놈이었다면 애초에 밀실 연쇄 살인을 시작조차 하지 못했겠지.
“흠.”
그러다 문득 놈의 오른팔에 생긴 상처에 시선이 멈췄다.
“그새 한 건 했군.”
정황상 유령권마가 권풍을 날리자마자 왓슨이 탄지공으로 놈의 팔을 저격한 게 틀림없었다.
대뜸 내 이름을 부르길래 당황한 나머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나 싶었는데 역시 군인 출신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
“훌륭해. 기대 이상이야.”
거리를 벌리려 하는 유령권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왓슨한테는 찬사를 보냈다.
“저기, 죄송한데 누구신지…….”
“……내 정신 좀 보게. 아직도 이걸 뒤집어쓰고 있었군.”
왓슨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계속 변장 면구面具를 착용하고 다니던 걸 잊고 있었다.
-타탓!
수지로 만든 가짜 코와 턱을 떼어낸 다음 점혈을 마치자 역용술로 고정되어 있던 이목구비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지상으로 올라왔으니 더는 흡연을 참을 이유가 없다.
곧바로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삼매진화Buddha Fire로 불을 붙여 한 모금.
“이제 좀 살 것 같군.”
“홈즈, 자네였나……!”
“실망이야, 왓슨. 그렇게 알아봐 달라고 티를 냈는데.”
왓슨이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출발한 직후부터 나는 계속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케임브리지로 가는 길목에서 대기 중이던 레스트레이드의 부하에게 전보를 보내 선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소송 관계자들은 한동안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고, 그들보다 늦게 런던을 출발한 나는 케임브리지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에 누가 윙크를 그딴 식으로 한단 말인가!”
“그야 역용술에 변장 면구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눈꺼풀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왓슨보다 몇 시간은 일찍 목적지에 도달한 나는 곧바로 정원사로 변장을 마치고 호텔 정원의 나무를 옮겨 심는 척 구멍을 파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일행이 호텔에서 노닥거리는 동안 삽에서 예리한 삽기鍤氣를 뽑아 열심히 땅을 파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외부와 이어진 전화선을 끊고 지하에 파둔 아늑한 굴에서 유령권마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나머지는 방금 본 그대로다.
“젠장…… 빌어먹을 고장만 아니었어도!!”
한편 유령권마 티모시 영은 복부와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싸맨 채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초식에 두 번이나 당했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나였으면 진즉에 자결했을 것 같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나는 검지를 뻗어 놈의 측두부를 가리켰다.
“설마, 포셋 경을 암살하려고 전화를 걸었을 때 권풍이 중간에 튕겨 나온 게 전화기가 고장 난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잘 알고 있지. 그쪽 머리에 난 상처는 내 작품이거든.”
“뭐라고?!”
그렇다. 놈의 관자놀이와 이마에 걸쳐 뚜렷하게 새겨진 주먹 자국은 내 안배에 의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놈이 포셋 경에게 저지르려 했던 걸 고스란히 되돌려준 결과 생긴 상처니까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쪽이 옳겠지만.
“간단해. 전화선을 쥐고 있다가 뇌정지기가 흐르는 순간 진기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리면 되는 일이니까.”
나는 지하에서 포셋 경의 방에 설치된 전화와 연결된 내선 전화선을 쥐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렸다.
예상대로 유령권마는 포셋 경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장관은 사전에 논의한 대로 전화를 받다가 죽은 척 열연을 펼쳤다.
티모시 영의 머리에 상처가 난 건 조금 전 말한 대로 놈이 전화기에 권격을 때려 박은 찰나에 치륜대법Cogwheel Method을 펼쳐 초식을 되돌려준 결과였다.
“헛소리하지 마라! 네놈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가끔은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과 지식을 탓해보는 건 어떤가.”
나는 가엾은 우물 속 개구리에게 논했다.
“강호江湖에는 네놈이 알지 못하는 무공이 넘쳐나는데.”
그가 알지 못하는 넓은 강과, 깊은 호수.
무한의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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