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천리신권?
Telephone Punch?
무공을 한층 더 깊이 익히려 하는 자는 자신의 무재와 연공에 의지해야 한다.
이는 스승이 강제하는 수련과 가르침만을 통해 온오蘊奧한 깨달음을 얻거나 무의 정점에 선 자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존 로크-
* * *
“두전성이Big Dipper Shift나 건곤대나이World Denial까지 가지 않아도 도구의 힘을 빌린 초식을 받아칠 수 있는 무공은 차고 넘치는 법이지.”
왓슨을 치료할 때도 펼쳤던 치륜대법은 바리츠의 독문 무공으로 톱니바퀴 형태의 내력을 회전시켜 남의 진기가 흐르는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온 뇌정지기는 나의 손바닥에 돋아난 진기의 톱니에 떠밀려 고스란히 왔던 길을 돌아가 놈의 귓가에서 권풍의 형태로 쏘아져 나온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경악한 영이 팔을 난폭하게 휘젓자 붕대가 풀리며 조명 아래에서 커다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녀석의 손목에 달린 평범한 크기의 주먹보다 두 배는 큰 면적의 자국.
진동판에서 재현된 권풍이 넓게 퍼지며 주먹의 크기보다 커진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거한을 찾아다녔으리라.
“유령권마 티모시 영. 런던에서 체신장관을 저격하려 시도한 게 바로 너의 패착이다.”
포셋 경의 목숨을 취하려 했던 티모시 영은 그 용의주도한 성격 탓에 몇 겹이나 보험을 준비했고, 결과 내게 중요한 실마리를 내어주었다.
나는 놈의 다음 표적이 포셋 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덕에 쉽게 대응책을 세울 수 있었다.
저격 당시 권풍에 뇌정지기를 싣지 않은 건 사건을 수사 중인 내게 살인에 사용한 초식이 무엇인지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걸 파악한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며 녀석을 속일 수 있었다.
하나 재밌는 건, 당사자인 영이 권풍을 사용한 저격으로 포셋 경을 죽이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놈은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날지라도 우리가 관계자를 한곳에 모아 보호할 거란 사실을 예상하였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저격을 시도했을 테지만, 그 안일함이 유령권마의 발목을 잡았다.
“무인으로서 갖춰야 할 의협심은커녕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살인을 일삼다니. 공력이야 차고 넘치도록 쌓아온 모양이지만 나머지가 수준 미달이로군.”
원격 살인이라는 발상 자체는 봐줄 만하나 딱 거기까지가 한계.
고작 이 정도 상대에게 위협을 느낄 정도로 천마의 후인은 약하지 않다.
“네놈 같은 격 떨어지는 탐정 나부랭이가 그분께서 계시하신 천리신권Telephone Punch을 파훼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영이 주춤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분?”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의 분노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마공을 가르친 스승이 있었나.”
유령권마는 범행이 밝혀진 사실에 분개한 게 아니었다.
타인에게 배운 초식이 파훼 되었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을 뿐.
‘하나의 초식에 집착하는 걸 보니 정식 제자로서 사사한 건 아닌 모양이고, 은거 기인과 연이 닿아 한 자락 가르침을 얻은 모양이군.’
내심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티모시 영에게 전화기와 뇌정지기를 사용한 살초를 전수한 자는 따로 존재했다.
어쩐지, 백도White Chess Piece 늙은이들이 좌도방문Left Wing의 사술이라고 거품 물 법한 초식을 평범한 엘리트 전화 회사 임원이 만들어낸다는 게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전화기를 사용해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건 포셋 경을 비롯한 우체국의 권사들조차 떠올리지 못한 발상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가 굴곡 따위 없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살아온 엘리트 도련님公子의 머리에서 나올 수는 없는 법.
“한심하긴.”
살인자를 얕보다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티모시 영을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다만, 놈이 사용한 초식을 생각해낸 자에겐 도리어 관심이 생기고 있었다.
유령권마가 천리신권이라고 칭한 초식을 토대로 분석한 이번 사건의 진정한 배후자Mastermind.
그 특징이 회귀하기 전 오랫동안 추적해온 어떤 범죄자와 겹쳐 보인 까닭이었다.
높은 지식수준과 이를 응용하는 발상의 대담함,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죽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악의까지.
잠시, 유령권마의 배후에 그림자를 드리운 존재가 내가 상상하는 그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어.’
놈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틈을 노리면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기다렸다.
계획과 다르긴 해도 놈의 밑천을 확인하고 그 뒤에 숨은 자의 정보를 캐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었다.
“천리신권인가. 광오한 이름이로군. 고작 그 정도 깊이의 초식으로 왕림의 백보신권1200 Inch Punch을 모욕하려 하다니.”
“……내게 내공 한 톨, 깨우침 한 자락 보태준 적 없는 네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간단한 도발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 분명 그로기 상태였는데 회복이 기묘하리만치 빠르다.
“한층 흥미로워지는군.”
사태를 관망하던 포셋 경이 사람 좋은 미소를 내비쳤다. 맹인이 관망한다는 표현이 옳은지는 차치하고.
“그래. 진즉에 그렇게 나와야지.”
선천진기Innate Essence라도 끌어 쓰고 있는 건지 강력한 기운이 혈자리에서 새어 나와 아지랑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 검거를 위해 무턱대고 몸부터 날리던 레스트레이드조차 사각에서 다가가다 날이 선 기세에 놀라 멈춰 서 있었는데 레스트레이드치고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아아앗!!”
내가 기다려주던 사이 어떻게든 몸을 추스른 티모시 영이 강렬한 뇌정지기Brain Stopper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파츠츳!!
학관에서 성실하게 수련을 쌓은 인재답게 실력의 3할을 숨기고 있던 듯 놈의 기세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놈이 몸에 두른 진기는 내가 아는 뇌정지기와는 확연히 다른 색깔을 띠기 시작했다.
푸른 섬전과 같은 곤륜파의 독문진기가 아닌 검붉은 혈관을 방불케 하는 사이한 기운.
나는 알고 있다.
내겐 무척이나 익숙하고, 심지어는 반갑기까지 한 저 힘의 정체를.
“맙소사, 그런 거였군By George, I Knew It!”
저절로 올라가기 시작하는 입꼬리.
설마 이런 데에서 같은 길을 걷는 무인을 보게 될 줄이야.
다만, 반가웠던 건 나 혼자만이었던 듯했다.
“닥치고 죽어라!”
패도적인 기운을 두른 유령권마의 주먹이 숨 쉴 틈도 없이 날아왔고.
“바리츠, 베어 너클裸拳式―”
나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놈의 손목을 붙잡은 다음 그토록 찾아 헤매던 힘을 받아들였다.
나의 단전Elixir Field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비료.
“흡성대법Gravitation.”
마공으로 변질된 유령권마의 진기를.
-콰아아아아!!!!
다음 순간, 혈도를 타고 탁한 내력이 빠르게 단전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네놈…… 마공을 익혔구나?!”
티모시 영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마인과 경지가 비슷한 이는 마공을 받아내기만 해도 진기가 무너지며 세맥이 끊어지거나 공력이 체외로 흩어지는 법인데 그의 손목을 붙잡은 나는 누가 봐도 멀쩡했으니까.
심지어 나는 여유롭게 금나수를 펼쳐 놈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티모시 영이 보기엔 이쪽이 마공을 익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을 터.
“이 정도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생각보다 견식이 얕은 모양이야.”
물론, 실제로 익히고 있긴 하다.
아무리 내 진기가 정순하다 한들 이를 쌓는 데 사용한 심법은 마공이 맞으니까.
다만 지금 내가 아무 타격도 입지 않고 있는 건 사자심법·개Renewal Lionheart Method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 초식은 정파 무공이라서 말이지.”
-두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진기의 파장을 맞추자 티모시 영의 변질한 진기가 순식간에 팔을 휘감으며 나의 혈도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라고……?”
급격한 공손실Essence Loss을 겪은 유령권마는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반응을 보였다.
“크헉……!!”
녀석은 육지로 나온 물고기가 호흡 곤란에 빠진 것처럼 숨을 헐떡이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떤가. 정파 무공도 쓸만하지?”
흡성대법吸星大法은 천하에 악명을 떨치는 초식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이 무공을 그리도 두려워하는가 하면, 별을 빨아들인다는 이름과 타인의 내력을 흡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강호는 개개인의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장소.
고로, 무림인에게 있어 살면서 쌓아온 내공을 빼앗긴다는 건 치명상을 입거나 죽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내 공력을……빼앗고 있어……?”
“바로 그거야.”
상당수의 강호인이 흡성대법을 흑도의 사술이나 마공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야말로 흉악함의 방증.
다만, 흡성대법의 창시자가 누군지 아는 이들이 초식을 직접 목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무슨 정파의 무공이 이리도……그아아아악!!!!”
유령권마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비틀었다.
흡성대법이 상대와 접촉한 시간이 길수록 공력을 흡수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당하는 측이 그에 비례한 격통에 휩싸이는 초식인 까닭이다.
“어디 보자.”
한편 나는 손바닥과 맞닿은 혈자리에서 강맹한 뇌정지기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며 그 성질을 분석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진기가 아닌 마공으로 성질을 변화시킨 파괴적인 기운.
나이에 비해 상당한 양의 진기를 쌓고 있지만 기대에 미치진 않았다.
“아직 마기가 옅군그래.”
티모시 영의 내공은 변질된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마공을 익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여태껏 정체를 감출 수 있던 거겠지만.
‘이 정도 마기에는 부작용도 반응하지 않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은 말했다. 사자심법의 진정한 부작용은 영약 섭취를 멈추고 겪는 금단증상 외에도 강력한 마공과 접촉할 경우 유발된다고.
티모시 영이 익힌 마공 심법의 경지가 그가 평소 다루는 정파 무공만큼 높지 않았던 덕에 왕의 망령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는 놈에게도 내게도 다행인 일이었다.
만일 마기의 농도가 진했다면 몸이 통제를 벗어나 놈을 즉사시켰을지도 모르니까.
“……순 쭉정이로군. 어디 사는 누구한테 배웠는진 모르겠지만 마공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야.”
고작 2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놈이 주먹에 담았던 붉은 벼락을 닮은 기운은 정순한 진기로 변해 단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종류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한 데 녹여내는 사자심법의 공능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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