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58화 (58/110)

058. 꽃잎에 베여

Petalcut

검을 쥐어도 뽑아 베지 않는 무인武人

흑도의 얼굴로 정도를 걷는 호협豪俠

강호를 움직이지만 바위처럼 무언無言

은인자중하고 뇌타부동하니 불혹不惑

저들은 적법한 은총을 물려받은 상속자

천재지보를 성실히 관리하는 청지기다

그들은 명망의 군왕이자 합법한 계승자

다른 범부들은 무武를 섬기는 시종이다

여름날 꽃은 홀로 피다 지지만

계절에 한 줄기 향기를 더한다

허나 그 뿌리가 상하고 지치면

화초의 존엄, 잡초만도 못한다

가장 미려한 피조물도 행실로 타락하니

들풀보다 썩은 백합의 악취가 지독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94: 백합검수百合劍手>-

* * *

몇 시간 뒤.

나는 레스트레이드와 왓슨, 그리고 포셋 경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다른 관계자들은 느긋하게 검교파 조정대Boat Club의 드래곤 보트 레이스 훈련을 구경하고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범인의 신병을 구속하고 있는 우린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던 까닭이었다.

“아쉽겠어. 모처럼 모교에 들를 기회였을 텐데.”

“내가 케임브리지 대학관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아니. 옥스브리지Ox-Bridge 출신이라고 얼핏 이야기한 적밖에 없네.”

“케임브리지에서는 캠포드Camford라고 말하게. 지나가는 검교파 제자들이 들었다간 시비가 붙을지도 모르니까.”

“……상상 이상으로 극성이군.”

“경쟁 관계에 있는 양대 학관이지 않나. 자연스러울 일일세. 마치 아일랜드의 성산파 가톨릭교도와 북아일랜드의 스코트인 종북파 장로회 신도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말이야.”

우리가 느긋하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열차는 기절한 유령권마를 싣고 멈추는 일 없이 달렸다.

나는 권풍의 충격파에 찢어진 코트 대신 호텔에 있던 유령권마의 외투를 입어 찢어진 옷을 가리고 있었다.

어차피 외투의 주인은 머리를 뇌정지기에 제대로 당했으니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할 터.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놈을 레스트레이드에게 맡겨두고 식사하거나 낮잠을 잘 여유는 없었다.

모리어티가 이번 사건의 배후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는 이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넘어갈 놈이 아니지.’

나는 지금도 이따금 피신시키던 증인이 모리어티의 사주로 숨진 일을 떠올리곤 한다.

놈은 교활하다. 언제 방심한 틈을 노려 흉계를 펼칠지 모른다.

회귀 전에 겪었던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감을 열차 안팎으로 뻗어 수상한 기색이 없는지 살피는 등 주의를 기울였다.

동시에, 계속 얻은 정보를 토대로 이쪽 세상의 모리어티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이런. 슬슬 버티기 힘들어지는걸.”

“도착하기 전까지 잠깐 눈을 붙여두게. 유령권마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간밤에 조금 자둔 거론 모자랐는지 왓슨이 신음 소리를 내며 침대차 매트리스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채 2분도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 작게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

하긴, 내 계획에 휘둘리느라 고생이 많았지.

나는 그녀에게 살포시 담요를 덮어준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가 생각에 잠겼다.

유령권마 티모시 영에게 마공을 가르친 게 내가 추측한 대로 제임스 모리어티라면.

놈은 다른 무공 범죄자에게도 마공을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리어티에게서 마공을 배운 자들이 영국 곳곳에서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내 전문분야가 아니지만 과거 다수의 마공 수련자, 그러니까 마인과 마녀가 모인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유럽의 역사를 통틀어 마인이 발호하는 시기에는 늘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손뼉은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여름에는 백합이 흐드러지겠군.”

격동하는 시대, 마인들을 참하며 혼돈의 한 축을 짊어지던 건 언제나 그 문파의 역할이었다.

* * *

유럽 무림의 수도가 문파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성산파聖山派의 본산 바티칸使徒座.

성산파의 자랑은 그들의 진산절기인 이십사수백합검술과 매괴신공Rosary 외에도 다양한 범주에 걸쳐 있었다.

최초의 교황 베드로와 역대 성산파 장문인의 시신이 안치된 성백다록제사St. Peter's Basilica나 성천사성보聖天使城堡를 비롯한 위대한 건축물은 물론.

건물과 비고 안에 보관된 조각과 미술품, 그리고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다양한 보물 등.

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거장들의 손길이 닿았거나 기독교의 역사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어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죽하면 사도좌의 또 다른 별명이 구교의 박물관이라는 말이 있을까.

유럽을 지배하는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둔 영적 권위와 기나긴 역사가 만든 정통성을 함께 지닌 바티칸은 유럽무림에서 도드라진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하지만, 이들이 진정으로 자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형태를 지닌 무언가가 아니었다.

사도좌가 지닌 가장 강력한 신병이기.

그것은 바로 무공이 유럽에서 꽃을 피우기 이전부터 성직자들이 갈고 닦아온 지배와 통제의 예술이었다.

성산파를 이끄는 장문인 교황은 대대로 천국의 열쇠를 물려받는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칭해왔다.

이런 연고로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교황은 자신의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세속의 군주들에게 파문破門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내비침으로써 심각한 경고를 줄 수 있었다.

파문Anathema이란 음습한 종교적 린치를 말한다.

한 번 파문을 당하면 그 길로 끝장Sticky Wicket.

파문을 당한 그 순간부터 가톨릭 교도는 이승과 저승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다.

신하와 부하는 파문당한 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정치적 관계 역시 끊어지게 된다.

세도가들은 가톨릭의 영역에서 무림공적Public Enemy으로 취급되며 사회적 말살Exterminatus을 겪게 되는 이 가혹한 징벌을 두려워하며 교황의 반지에 입을 맞춰 충성을 맹세했다.

성산파가 그들의 정신적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티칸은 죽음 너머에서 기다리는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도들에게 돈으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면죄부적免罪符籍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와 여러 신학무인들이 타락한 구교의 각성을 부르짖으며 일으킨 개혁의 파도 속에서도 사도좌는 꿋꿋하게 유럽의 정기신을 틀어쥔 고삐를 놓지 않았다.

괴황지에 경면주사로 그린 면죄부적이 여전히 판매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

교회는 공포야말로 사람들을 묶는 가장 확실한 사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상이 가장 짙게 반영된 집단이 바로 마공을 익힌 마인과 마녀를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성산파 최강의 무력대 검사성성檢邪聖省.

교황의 검이라 불리는 구마사제와 이단심문관의 손에 무고한 이들의 목숨이 수없이 땅에 떨어졌지만 성산파는 여전히 대의를 외치며 유럽 전토를 감시 아래에 두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은밀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성공회 교도와 장로교 신도가 거하는 영국 본토를 향하지 않을 리는 만무했다.

“영국에 잠행 중인 무공신부대가 마인의 흔적을 포착했소.”

성 베드로 대성당聖伯多祿帝祠 어딘가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회의실에선 추기경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장문인 레오 13세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 폐관수련 중이었지만 붉은 모자를 쓴 성산파 장로들은 교황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무리 런던이 이교도異敎徒의 땅이라고 해도 무고한 피가 흐르도록 두는 건 세존의 뜻이 아닌 줄 아뢰오.”

“평범한 백합검수로는 안 되겠어. 구마사제……아니, 종교재판관을 보낼 필요가 있군.”

겉으로는 양민의 안위를 위하는 척 말하고 있었지만 자리에 모인 모두가 입 밖으로 꺼내려 하지 않는 진실된 의견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했다.

마인 토벌을 핑계로 성산파의 고수를 런던무림으로 보내 더러운 이단자들에게 진정한 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기강을 잡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목적이었다.

“현재 동원 가능한 사제라면……, 그가 좋겠군.”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성산파의 고수 중에서도 특출난 무위를 자랑하는 자를 파견할 필요가 있었다.

“에식스Essex에 비둘기를 보내도록 하지.”

추기경의 우두머리 되는 자가 말하자 어두운 회의실에 웅성대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설마 그 남자를 풀어놓을 생각인가.”

에식스에 비둘기를 보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런던의 북동쪽, 진주언가의 본가가 위치한 지역.

그곳에는 전 세계를 떠돌다 정착한 한 명의 사제가 있었다.

그는 교황의 명을 따라 성산파의 적을 닥치는 대로 베고 다니던 살수.

통제가 불가능한 검귀를 유일하게 복종시킬 수 있는 건 성산파 장문인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어인권계Ring of the Fisherman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그 괴물의 잠을 깨웠다간 강호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게 뻔했다.

“그만두게. 아무리 놈이 장문사형께서 아끼는 자라 해도 통제할 수단도 없이 강호에 내보내는 건 미친 짓일세.”

“옳소! 부디 재고해주게!”

여기저기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었지만 찬성을 표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차마 후보로 거론된 사내의 이름조차 입에 담고 싶지 않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

“……정말로 몬시뇰Monsignor을 보낼 생각인가. 성하께서 폐관 중인 지금 우리가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네.”

차분한 눈으로 다른 추기경들의 대화를 관망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화두는 이렇다 할 동의를 얻지 못했다.

“어차피 영국은 배교자들의 땅이지 않나. 이 기회에 그 남자가 검무를 한 번 추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네.”

“가톨릭 신도가 아닌 인간의 목숨은 파리만도 못하지. 머나먼 타국에서 혈겁이 벌어진다 해도 성산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로 취급하면 그만이야. 검후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못할 걸세.”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나, 운이 따라주어 그 남자가 북부대협北部大俠이니 뭐니 떠받들어지는 종북파 노괴와 동귀어진해줄지도.”

“선재善哉로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그야말로 허공섭물로 코를 푸는 격이 아닌가.”

토론이 격해짐에 따라 추기경들이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도들이 거하는 아일랜드라면 모를까, 영국 무림인들의 목숨따윈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대다수의 추기경은 바다 건너 비좁은 섬을 벗어나 곳곳에서 식민지를 만드는 탐욕스럽고 오만한 이교도를 혐오했다.

그들에게 교훈을 내려줄 수 있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불사하지 않겠다는 적의가 성직자들의 눈동자 속에서 맹렬히 타오르고 있는 지금, 회의의 방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을 마친다. 추기경 회의는 주님의 이름으로 브라운 몬시뇰의 강호출도를 허許한다.”

반대 의견을 고집하던 추기경들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몬시뇰의 비인간적인 무위와 냉혹함을 직접 목격한 바 있던 그들은 앞으로 런던무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머지않아 영국인은 떠올릴 것이다.

교황에게 지배당해왔던 공포를.

좁은 섬나라에 갇혀만 살아왔던 굴욕을.

“아멘.”

“아멘!”

“아―멘……!!”

아멘삼창阿們三唱을 끝으로 추기경 회의는 막을 내렸고, 새하얀 비둘기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서쪽을 향해 날아갔다.

멸마백합滅魔百合.

비적유성검秘蹟遺聖劍.

철혈의 이단살해자Cult Slayer.

그 외에도 수많은 별호Call Sign로 불리며 마인들의 두려움을 한몸에 사던 성산파의 노괴.

브라운 신부Father Brown를 다시금 강호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주께서 그들을 보우하시길.”

몇 남지 않은 평화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런던에 피바람이 몰아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