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통화를 마치고 (1)
When The Call Ends (1)
사마외도의 가장 교활한 속임수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
* * *
밤새 깨어있던 데에다 열차 안에서 계속 날카롭게 감각을 벼리고 있던 탓일까, 열차가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한 즈음엔 이미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괜한 걱정이었나…….”
다행히도 중요한 정보 제공자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유령권마가 차내에서 불가해한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등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돌아가면 잠깐 자야겠어. 내무장관을 만나러 가야 하니 오래 잠들 순 없겠지만.”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긴 하나 일단은 한시라도 빨리 하숙집으로 돌아가 피로에 전 몸을 침대에 누이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도 바로 쉬어야겠군. 오늘까진 비번이어서 다행이야.”
왓슨 역시 홍차의 힘을 빌려 졸지 않고 있었지만 연신 하품을 멈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척
때마침 레스트레이드가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하기 전 보낸 전보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경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런던 중앙 우체국의 간부와 저커버그앤코의 임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체신장관 포셋 경과 제갈율리를 마중 나온 무리였다.
경감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하고 차분한 기파를 지닌 고수들.
용봉지회에 참석한 후기지수를 감독하던 샤프롱Chaperon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경지를 이룬 자들이었다.
“저자가 바로 용봉지회에서 공을 세운 탐정…….”
“이번에도 살인범을 추포했는가.”
“템즈강의 뒷물결이 거세군.”
상사와 나를 번갈아보며 무어라 중얼대는 그들의 시선엔 경이로움이 엿보였다.
내 이름과 직업은 이미 저번 용봉지회 살인사건의 기사를 통해 런던무림에 알려지기 시작한 참이다.
저번에 중앙 우체국과 저커버그앤코 잉글랜드 지사 사무실을 방문했으니 얼굴 역시 보았을 테고.
런던 유일의 자문 탐정이 포셋 경과 제갈율리, 그리고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옆에선 살인사건의 범인이 연행되는 중이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도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었겠지.
최소한 이번 사건의 해결에 내가 기여했다는 사실 정도는 나를 향해 인사하는 경감들의 모습만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의 내막을 공공연히 밝히지 말라는 하커트 경의 지시가 있던 건 기억하고 있겠지.”
“예.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짧게 사망자들의 부고가 실리는 게 끝이겠죠.”
“그게 좋겠군.”
레스트레이드에게 묻자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체국 관계자들은 체신장관이 입단속을 시켜줄 테니 문제가 없을 테고, 나머진 스코틀랜드 야드에 모리어티의 눈이 없길 바라는 수밖에.
놈의 정보망이 어디까지 퍼져있는지 모르는 이상 막연히 희망적인 관측을 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긴 하지만.
“아쉽지만 홈즈 씨의 활약은 저와 동료 경감들만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미 고객들이 줄지어 찾아오기 시작한 상황이니 보수만 제대로 주어진다면 쓸데없이 명성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지금은 모리어티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고 있는 상황.
그를 찾아내지도 못한 지금 괜히 적극적으로 시선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다.
일단은 조용히 모리어티의 동향을 살피며 최대한 빠르게 놈을 쓰러뜨리는 데 필요한 힘과 자원을 갖추는 것이 옳겠지.
“그보다, 아까 열차에서 부탁한 건?”
“케임브리지에서 직접 구하면 됐을 텐데 왜 굳이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네.”
레스트레이드는 의아하다는 듯 턱을 긁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뭐, 좋습니다. 조용히 수배해보겠습니다. 헌데, 대체 누굴 찾고 있는 겁니까.”
“대학관 시절의 은사께서 아직 교편을 잡고 계시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다음에 조용히 찾아가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라네.”
“케임브리지는 그렇다 치고 옥스퍼드 대학관과 육군무관학교Sandhurst의 사범 명감은 어째서…….”
“옥스퍼드에서 모셔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레스트레이드에게 유령권마 티모시 영을 엄중히 감시하도록 조언한 다음 포셋 경과 독대했다.
“드리고픈 이야기가 많지만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조만간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포셋 경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덕에 목숨을 건졌군.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전화선에 안전장치를 설치하도록 전화회사를 감독해야겠어.”
“장관 대인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 정도야 소일거리지.”
나는 사흘은커녕 이틀도 지나기 전에 유령권마를 잡아다 바친 데에다 포셋 경이 체포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계획해 체면을 살려주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전화회사의 발언권이 약해질 테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더욱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
하나 의외였던 점은 그가 같은 문파인 유령권마를 직접 제압하지 않았다는 거다.
곤륜대성당의 도달자인 그는 여왕 폐하의 정부는 물론 곤륜대성당의 본산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마공을 익히고 타락한 곤륜파의 후학을 도달자인 그가 처단했다면 분명 정치적으로는 가장 완벽한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아마 내무장관에게도 거나하게 생색을 낼 수 있는 데에다 곤륜대성당에서도 더욱 위상이 올랐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출수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내 공적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리라.
즉, 나와 체신장관 사이엔 적절한 신뢰가 형성되었다는 뜻.
“다음엔 찾아오기 전 미리 기별을 주게. 내 선물을 준비해둘 테니.”
예상대로 포셋 경은 내게 호의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여기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옳겠지.’
이번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내무장관의 신뢰를 얻게 될 것을 생각하면
여왕폐하의 내각을 구성하는 각료 중 두 명과 안면을 트게 된 셈이다.
필요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이 늘었다고 보아도 되겠지.
“장관대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회귀 전 제임스 모리어티 교수는 정·재계에 단단한 파이프라인을 두고 있었다.
이쪽 세상에서도 아마 그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나는 놈과 맞서기 위해선 무공 외에도 다양한 방면에 걸쳐 카드를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선 정치가와 교류하는 등 회귀 전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에도 서서히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나의 타고난 성품이 이를 쉽게 허락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성공 보수는 다음에 직접 저커버그앤코로 찾아가 받아가겠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소생은 은인에게 보답을 아끼지 않는지라.”
“제갈세가의 공자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믿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장관을 돌려보낸 나는 고민이 해결되어 만족스럽게 웃는 제갈율리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인사를 마친 다음 왓슨과 베이커가로 돌아갔다.
* * *
“어머나, 홈즈 씨. 돌아오셨군요. 왓슨 씨도……, 아니 근데 홈즈 씨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옷이 죄다 찢어져 있는 거죠?”
하숙집에 돌아오자마자 허드슨 부인이 내 꼴을 보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유령권마에게서 빼앗은 외투 안에 입고 있던 옷이 죄다 누더기가 되어 있었으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수선하긴 힘들어 보이니 이건 버리는 게 좋겠군요.”
마인을 제압하다 이렇게 된 거라고 무용담을 상세히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일단은 쉬고 싶다.
허드슨 부인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2층으로 올라가 욕조에서 피로를 풀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 왓슨 역시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그대로 뻗어버렸고.
한참이 지나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고 느릿느릿 일어나 운기조식을 마친 즈음, 아래층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왔습니다!”
보아하니 레스트레이드가 잊지 않고 부탁했던 물건을 찾아다 준 모양이었다.
나는 잠든 왓슨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 레스트레이드의 부하가 가져온 소포를 받았다.
“빨랐군.”
“경감님이 서둘러 갖다 드리라 하셨거든요.”
젊은 경관을 떠나보낸 나는 곧바로 2층으로 돌아가 꾸러미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1881년도 케임브리지 대학관 사범 명감>
<1881년도 옥스퍼드 대학관 사범 명감>
<1881년도 왕립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사범 명감>
내가 레스트레이드에게서 받아온 건 올해 대학관과 무관학교에서 교편을 쥔 사범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었다.
내 예상이 옳다면 모리어티는 이쪽 세상에서도 양지의 신분인 교육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터.
하지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대학관을 직접 찾아가는 순간 대영제국 곳곳에 숨어있는 놈의 부하들에게 나의 존재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명감을 갖다 달라고 한 건 모리어티의 눈을 피해 이쪽 세상에서 그가 사용하는 양지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무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늙은 악당이 수학 대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나는 제임스 모리어티의 가증스러운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 세 권의 두꺼운 사범 명감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회귀한 런던과 본래 살던 세상의 구성원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큰 차이가 없었다.
모리어티 교수는 이쪽에서도 세 학관 중 한 곳에서 사범의 신분으로 교편을 쥐고 있을 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째서 없는 거지.”
나는 세 권의 명감의 모든 페이지를 살폈지만 어디에서도 제임스 모리어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기대가 어긋나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군.”
-턱
펼쳐둔 명감을 닫고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모리어티의 이름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그가 이쪽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안이한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쉽게 찾게 두진 않겠다 이건가.”
제임스 모리어티는 이쪽 세상에서도 실존하며, 교수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가족부터 파헤쳐야 할까.”
회귀 전엔 모리어티의 형과 동생이 각각 육군 대령과 역장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형제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고로, 혈연관계에 있는 자들을 통해 정보를 얻는 건 쉽진 않을 것이다.
“역시 만나봤을 것 같은 사람에게 묻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구금된 유령권마가 곧 깨어날 예정이다.
놈에게 천리신권인가 하는 초식과 마공을 가르쳐준 건 아무래도 모리어티 본인일 터.
필요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선 티모시 영을 직접 심문해야 한다.
“서둘러야겠군.”
나는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범죄의 제왕이 도사리는 런던의 밤거리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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