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61화 (61/110)

061. 통화를 마치고 (3)

When The Call Ends (3)

궁정과 귀족 사회에서 가치 있는 자나 훌륭한 자를 부를 때 로마인이 그랬던 것처럼 협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관습은 주목할 만하다.

-미셸 드 몽테뉴, <수상비록Essay>-

* * *

템즈강 둔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궁.

대영제국 의회와 고위 공직자들이 모이는 이 건물 앞에선 몇 달 전부터 기묘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대가 점거한 건 궁전 앞을 지나는 도로와 직선으로 이어진 웨스트민스터 교橋였다.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매일같이 검은 옷을 입은 집단이 찾아와 난간 앞을 점령하는 기이한 광경은 뜬소문을 즐기는 런던 시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남녀노소가 골고루 분포된 백여 명의 집단.

그들은 최근 들어 부쩍 시위에 나서는 일이 늘어난 노동자들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구호를 외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제각기 푯말을 들고 그저 조용히 웨스트민스터궁을 노려볼 뿐.

하지만 창밖을 지켜보는 의회와 내각 각료들은 이유 모를 섬뜩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화기는 천마Diablo의 발명이다.>

<의회는 전화 사용을 금지하라.>

빅토리아 여왕의 허락 아래 전화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에다 딱히 전화의 존재로 인해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어째서인지 전화의 보급을 반대하는 시위를 매일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전화 사용을 반대하는 이유랍시고 푯말에 적어둔 문구가 상당히 종교적이었다.

<멀리 있는 두 사람이 곁에 있는 것처럼 대화하는 건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주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시도다.>

천마이니 뭐니 하는 사악한 존재와 신까지 들먹이며 반反전화 시위를 이어가는 이들의 눈에는 기묘한 광기가 어려 있었다.

취재를 위해 나선 신문 기자가 말을 걸어도 그들은 묵언수행 중인 수도사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신 산업 관계자와 시위대 사이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던 내무장관 윌리엄 하커트 역시 밀정을 보내 저들을 추적했지만 이렇다 할 수확을 얻지 못했다.

그저, 시위대가 특이한 가르침을 따르는 무해한 신흥 종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교회가 아닌 다른 종파의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시위대를 해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아래 대영제국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런던에 사는 모든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왕림Kingswood의 숲지기를 통해 전파된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늘어나도 이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나서는 자가 없는 건 이러한 까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묘한 신흥 종교가 못 배운 이들을 홀리고 다닌다 한들 단속할 방법은 없다.

과거 호주로 추방당한 혈교Blood Cult 같은 사교邪敎 집단처럼 타인의 목숨과 재산에 심각한 피해를 끼친다면 모를까.

저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위를 멈추고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외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설법Preach을 맡은 신부는 젊고 멀쩡하게 생긴 안경 쓴 사내였는데, 내무장관의 밀정은 그에 관해 보고할 때 특이한 단어를 사용했다.

비자발적 사기꾼.

보고서에 따르면 이는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결과 의도치 않게 신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머저리,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주목할 가치가 없는 잔챙이.

내무장관은 일월성신교를 이끄는 교주를 그렇게 평가했고 일월성신교Church Of Asteroid인가 하는 그 작은 교회에 관해선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시위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난 후 전화기와 연관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 셜록 홈즈가 범인을 추포한 다음에도 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교 난간을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는 어느샌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니까 내무장관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일월성신교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과, 오후 3시에 웨스트민스터 궁을 출발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한 하커트가 준비한 보고서의 내용 중 시위대에 관한 언급은 한 줄이 전부였다.

이는 모두 일월성신교 교주의 의도와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연쇄 살인 사건이 해결된 사실에 안도를 표하는 정계 인사 중 그 사실을 눈치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웨스트민스터, 군주 빅토리아 여왕이 기거하는 버킹엄 궁전.

여왕의 집무실The State Rooms로 통하는 호화로운 복도를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급진적인 정치관을 지닌 탓에 사사건건 여왕에게 눈총을 받는 글래드스턴 총리를 대신해 호출당한 건 내무장관 윌리엄 버논 하커트.

왕실 시종은 그 특징적인 체격과 얼굴을 확인한 다음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내무장관 하커트 경이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집무실에서 차 시중을 들던 여왕의 집사가 대꾸하자 시종이 두 손으로 묵직한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윌리엄 하커트가 지존을 뵙습니다.”

예를 취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매가 넓은 옷을 입은 빅토리아 여왕이 홍차를 홀짝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가 들고 있는 잔은 작은 종Bell을 거꾸로 세운 모양을 띤 청회색의 영당배鈴鐺杯였다.

“잘 와주었다. 일단은 차 한 잔 어떤가.”

여왕이 집무실에서 차를 권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하커트는 어리석지 않았다.

-꿀꺽

내무장관 하커트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저 잔은 그 옆에 보이는 티 코지를 덮지 않은 찻주전자와 함께 관운장General Guan이라고 이름 지어진 웨지우드Wedgwood 공방의 걸작 티세트.

담은 차가 절대로 식지 않는다는 하노버 왕가의 보물이다.

관운장으로 우린 차를 방문자에게 허락한다는 건 여왕의 기분이 유례없을 정도로 좋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하커트도 잘 알고 있었다.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여왕의 심기를 어지럽히던 사건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가만히 두었다간 전화기의 보급을 가로막고 왕실의 위엄을 실추시켰을지도 모르는 연쇄 살인 사건의 막을 내린 건 바로 소천마 셜록 홈즈.

용봉지회에서 여왕의 눈길을 끌었던 후기지수였다.

“폐하께서 내리시는 잔을 받고픈 마음은 벤네비스산Mt. Ben Nevis과 같사오나 오늘은 부디 찻잔을 거두어주시길 청하옵나이다.”

“어허.”

차분하지만 단호한 여왕의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커트는 굽힘이 없었다.

“경은 어찌하여 권차勸茶를 마다하고 벌차罰茶를 받으려 하는가.”

“그 잔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까닭입니다.”

“……내 경을 오해할 뻔했군.”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여왕의 눈꼬리가 내려왔다.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은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천마에겐 내 직접 큰 상을 내릴 생각이다. 허나, 그를 기용해 용인用人의 묘妙를 살린 건 경의 공로다. 이를 치하하지 아니한다면 왕실의 논공행상이 공정하지 않다 흠잡는 자가 생길 터.”

“…….”

“여余의 명예를 욕보이고 싶지 않다면 경은 속히 이 잔을 받으라.”

하커트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고 찻잔을 들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족이 아니면 입에 댈 수도 없는 귀중한 영약차를 마신 내무장관은 이번 사건에 관해 상세히 보고를 마친 다음 집무실을 떠났다.

여왕은 연쇄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저잣거리에 돌기 전에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전화의 보급은 앞으로도 순조롭게 이어질 것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영국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나저나 글래드스턴의 오른팔이라 했나. 뼈대가 있는 사내로군.”

열린 문 너머로 사라지는 내무장관 윌리엄 하커트의 등을 지켜보며 여왕이 중얼거렸다.

지존Queen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내민 찻잔을 거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가 귀족이나 유력한 공직자도 아닌 누군가의 공로가 인정받길 원해서였다면 더더욱이나.

“쉽지 않은 자라 들었는데, 장관의 마음을 이 정도로 움직이다니.”

여왕은 용봉지회에서 자신에게 창피를 주었던 젊은 무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람 성질을 긁어놓는다는 점에선 스승인 천마天魔를 아득하니 뛰어넘는, 청출어람Out of the Blue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남자.

“포핀스.”

“예, 폐하.”

여왕이 부르자 그녀의 가장 은밀한 지시를 수행하는 전속 궁녀Woman of the Bedchamber 멜라니 포핀스가 병풍을 젖히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부터 여왕을 섬겨온 포핀스는 세 마리의 영물과 함께 검후 빅토리아가 가장 신뢰하는 심복 중 하나였다.

“베드포드 공작부인에게 연락해 소천마에게 보낼 어전 무도회 초대장의 등급을 조정하도록 하여라.”

“존명Yes, Maam.”

평소처럼 여왕의 명령에 즉시 대답한 포핀스였지만 내심 동요를 감추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 러셀, 그러니까 베드포드 공작부인은 빅토리아의 시중을 드는 여인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수석 궁녀Mistress of the Robes로 의복과 기타 의전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었다.

매년 봄에 열리는 버킹엄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발송하는 것 또한 수석 궁녀의 역할.

그리고, 영국 왕실의 오랜 역사에 비추어보아도 귀족이 아닌 일개 신사 계급의 사내에게 보내는 초대장의 등급이 바뀌는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백보첩Hundred Steps Invitation이면 되겠나이까.”

여왕이 대답했다.

“백보는 너무 멀다.”

“그럼 삼십보첩三十步牒으로―”

“십보첩Ten Steps Invitation.”

“……?”

경악하는 포핀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빅토리아 여왕이 마저 말을 이었다.

“아니. 칠보첩Seven Steps Invitation이 좋겠구나.”

세습 귀족이 아닌 자가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가문에 길이 남을 영예다.

하사받은 초대장이 백 걸음 밖에서 여왕을 알현하는 백보첩百步牒이라 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전 무도회에 처음 얼굴을 비추는 후기지수에게 일곱 걸음 밖까지 다가오는 것을 윤허하는 칠보첩七步牒을 내리시다니.

“소천마와 군필의희에게 모두 칠보첩을 보내면 되겠나이까.”

“군필의희는 오십보 밖에 머물게 하라.”

“명대로 속히 행하겠나이다.”

하지만 궁녀 된 자로서 지존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순 없는 법.

포핀스는 깊게 머리를 조아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

짧은 침묵이 드리워진 다음, 홀로 남은 여왕의 입매가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탐정의 이름을 노래했다.

“셜록 홈즈…….”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내의 제자.

그와 다시 보게 될 날이 손꼽아 기다려질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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