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초생달이 검 같아 (3)
Scimitar Of Allah (3)
좋은 구두는 높은 경지로 데려다준다.
-이탈리아 속담-
* * *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강변을 통과하자 사보이 객잔과 워털루 교, 서머셋 하우스, 그리고 킹스 칼리지가 차례대로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치겠군.”
직선 도로로 접어든 다음 더욱 속도를 끌어올리자 블랙프라이어스 교의 북쪽 끄트머리가 정면에 보였다.
좌수검左手劍, 우수부右手斧.
만전의 준비. 왼손에 검을, 오른손에 도끼를 들고 정체불명의 살수가 있던 자리로 뛰어들었다.
“……늦었나.”
예상은 했지만 다리 위에 인기척은 없었다.
혹시 몰라 기감을 펼쳐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장장 1마일을 넘는 거리를 달려왔으니 현장을 이탈할 시간은 충분했으리라.
다만, 부리나케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은 있었다.
몇 가지, 아까 정체불명의 초식이 스코틀랜드 야드를 꿰뚫었을 때 눈치채지 못했던 단초를 얻은 까닭이었다.
“제자일 검법…….”
블랙프라이어스 교 위에는 살수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범인은 점창파 고수.
검법 스파이크화가 남긴 제자일 마크는 나의 눈엔 마치 런던의 얼굴 한복판에 새겨진 거대한 흉터처럼 보였다.
여태껏 보아온 어떤 제자일 마크보다 깊은 자국.
그것을 토대로 저격검수의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내내 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는 압도적인 속도로 도움닫기를 마치고, 급정지와 동시에 검기를 쏘아냈다.
거기까진 평범한 점창파 검수도 똑같이 따라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검기의 비거리였다.
“1마일의 거리를 단번에 꿰뚫다니…… 최소한 초절정의 경지인가.”
내력을 한 점에 응축해 검기의 파괴력을 높인 초식.
다만, 일반적인 방식으로 제자일 검법을 펼쳐도 여기서 검기를 쏘아내 스코틀랜드 야드에 있는 목표를 정확히 꿰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블랙프라이어스 교에 가까이 다가간 시점부터 눈치채긴 했다.
다리 위에 안개 대신 깔린 짙은 기운.
공기 중에 농밀하게 분포된 잔향의 정체는 마공을 펼친 자리에 남는 점착성을 지닌 흔적.
마기였다.
“마공의 경지도 높지만 본신의 실력 역시 예사롭지 않군.”
블랙프라이어스 다리의 바닥이 길게 삽으로 파헤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신법과 내공의 심후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관통흔을 남기는 초식이라면 이번에 견식한 게 처음이었지만 사용된 것이 점창파의 상승 절기라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이런 묘기가 가능한 검수는 점창파Dian Cang Clan의 본산인 아프가니스탄에도 몇 없을 터.
“진산제자Apostle가 아니라 유럽인인가.”
살수가 진각과 함께 도움닫기를 시작한 자리와 제동을 건 자리에 깊게 파인 발자국은 파쉬툰인이나 하자라인 저격검수의 검법 스파이크화와는 모양이 달랐다.
흔히 볼 수 있는 가죽 구두의 형태를 띤 발자국.
나는 조심스럽게 그 주위에 남은 검은색의 가루를 손가락으로 쓸어 코끝에 갖다 댔다.
“이건…….”
질 좋은 소가죽의 냄새.
살수는 초식을 펼치기 전 검법 스파이크화의 밑창을 덮고 있던 가죽을 떼어낸 모양이었다.
제자일 검법을 익힌 유럽인 점창파 무인이 사용하는 위장술이었다.
“단초가 더 필요해.”
이어서 나는 제자일 마크를 따라 저격검수가 도움닫기를 멈추고 스파이크로 제동을 걸며 본격적으로 초식을 출수한 위치로 향했다.
여전히 마찰의 열기가 남아 뜨거운 김이 솟고 있는 자국에는 아까 파도가 다리를 휩쓸며 남긴 강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제자일 검법의 무시무시한 반동으로 강이 역류한 결과인 듯한데 초식에 적중당했다면 아무리 나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흔적을 조사하는 지금도 언제 초식이 날아와도 막아낼 수 있도록 양손에 검과 도끼를 쥐고 기감을 펼치는 중이다.
“없군.”
내가 제자일 마크에서 확인하려 했던 두 번째 단초는 아교의 냄새였다.
값비싼 오금을 굽에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검법 스파이크화는 기본적으로 소모품으로 분류된다.
검법 스파이크화를 신은 채로 여러 번 제자일 검법을 펼치면 도움닫기와 급제동 시 발생하는 고열에 의해 밑창 둘레를 고정하는 아교가 녹아내려 신발이 망가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현장 어디에서도 녹아내린 아교의 냄새를 찾아볼 순 없었다.
그 말은 즉 저격검수가 신고 있던 신발이 아교가 아닌 가죽끈Welt으로 갑피와 밑창을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라는 뜻.
이런 방식으로 양질의 소가죽을 사용해 검법 스파이크화를 만드는 사람은 유럽 전역을 뒤져봐도 노샘프턴Northampton의 구두장이 정도다.
추가로, 강물을 역류하게 만드는 고수의 격렬한 움직임에도 웰트를 꿰맨 실밥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즉, 놈의 신발이 기계를 사용한 굿이어 웰트 공법이 아닌 무공을 익힌 장인이 핸드 쏘운 공법으로 만든 주문제작품이라는 뜻.
“제자일 검법을 수련한 고수를 위해 자존심 센 노샘프턴의 장인이 직접 만든 검법 스파이크화, 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애국심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노샘프턴 구두장이가 수많은 영국 군인을 죽여온 저격검수의 상징 같은 신발을 만들어주었을 리 만무하다.
고로, 결론은 하나.
“군납품이군.”
나는 발자국의 크기와 보폭을 토대로 흉수의 체격을 상상하며 구두에 관한 정보를 되새겼다.
놈이 신고 있던 건 몇몇 전쟁 영웅을 위해 만들어지는 특별한 주문제작품.
직접 본 적이 없어도 현장에 남은 단초를 통해 그 모양새를 대략 상상할 수 있었다.
“재질은 변색을 감추기 위한 검은 소가죽. 초식을 펼칠 때 발생하는 마찰열을 배출하기 위해 갑피 앞코에 구멍을 뚫은 윙 팁 구두…….”
육군 무관들은 아미수녀회의 탄지공을 익힌 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다.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영국군이 파쉬툰인 저격검수들을 죽이기 위해 비밀리에 길러낸 천재 검수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저격검수가 펼치는 유격전에 시달리던 영국군은 천신만고 끝에 포로로 잡은 점창파 고수를 설득해 한 천재 무인에게 모든 절기를 전수하도록 했다.
스승인 아프가니스탄인 저격검수의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완성된 영국 최초의 저격검수는 모두의 기대대로 압도적인 전공을 세우며 유례없는 속도로 진급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화창한 어느 날, 사내는 예고도 없이 전쟁터에서 모습을 감췄다.
유럽 각지에서 수수께끼의 저격검수가 일으킨 무공 살인이 회자되기 시작한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이쪽 세상에서도 마주치게 될 줄이야.”
유럽에서 1760야드 거리의 저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무인은 아미수녀회의 진산제자와 극소수의 점창파 저격검수를 통틀어 다섯 명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중 남성용 구두를 신는 영국 무관 출신 무림인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단 한 사람 말고는 없다.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티모시 영을 찾아갈 때 쓰고 있던 면구를 꺼내 펼쳤다.
능글맞은 미소가 달라붙은 살인귀의 얼굴.
“모용새파Sebastian Moran.”
제임스 모리어티의 오른팔이자 그의 가장 충실한 사냥개.
세바스천 모런이 기어코 런던무림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고작 유령권마 따위를 죽이기 위해 꺼내든 카드치고는 거창하군.”
세바스천 모런.
나는 회귀 전에도 몇 번이나 그와 마주쳐 죽을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그는 모리어티를 쓰러뜨리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산이다.
이로서 이번 연쇄 살인사건의 배후가 제임스 모리어티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졌다.
다만, 내겐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었다.
단순히 살인멸구를 꾀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아끼는 심복Ace In The Hole인 대령을 불러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
“…….”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쪽 세상에서도 모리어티의 성품이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라면 자신의 계획에 훼방을 놓은 괘씸한 적수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싶었을 터.
회귀하기 전, 놈이 내가 보호하려 하던 중요한 증인을 배에서 떨어뜨려 살해하고 나서 조롱하는 글귀를 편지에 적어 보낸 적이 있던 걸 생각하면 이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섭혼대법에 당한 티모시 영에게서 중요한 정보를 얻는 건 요원한 일이었겠지만 모리어티는 세바스천 모런의 초월적인 검기 저격을 통해 방해꾼에게 명확한 경고를 남겼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그게 누구든 죽이겠다는 확고한 의사표명.
“사는 세계가 달라져도 여전한 모양이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놈이 라이헨바흐에서 나와 함께 추락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보이던 오만한 미소를.
삼라만상이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그 눈빛은 한낱 인간이 지니고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널―”
의로운 분노가 들불처럼 일었다.
놈은 지상의 법이 벌하지 못하는 최악의 마두.
제임스 모리어티를 지엄한 신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지상명제다.
맹세컨대,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때였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내게 속삭인 건.
“누구―”
블랙프라이어스 교를 벗어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근처에 사람은 나 한 사람 말고는 없었다.
전음인가.
아니, 애초에 저 목소리는 전음일 수가 없었다.
모리어티에 관한 생각과 그를 이 세상에서 지우겠다는 결심은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내게 저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건 오직 나, 셜록 홈즈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에야 나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너무 오래 있었군.”
사자심법·개Renewal Lionheart Method의 진정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정 기간 동안 충분한 양의 영약을 섭취하지 못해 심법의 1차 부작용인 금단 증상이 극도로 심해졌을 때.
그리고 둘째.
마공을 익힌 무인의 흉포한 기운에 노출되었을 때.
유령권마의 마기를 접했을 때 별일 없길래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세바스천 모런의 흔적을 조사하는 데 정신이 팔린 탓에 훨씬 진한 마기를 쐬고도 계속 다리 위에 머무른 게 실수였다.
“마이크로프트가 알면 비웃겠는걸.”
증세가 더욱 심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아직 환청을 듣는 데에 그치고 있어 망정이지.
이것보다 심각했다면 오후에 하커트 경을 만나러 가는 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제갈세가와 체신장관에 내무장관까지. 바라지도 않았는데 선물을 주겠다는 사람이 참 많군. 뭘 달라고 부탁해볼까.”
천마장을 본래 형태로 되돌린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베이커가를 향해 걸었다.
자고 일어난 왓슨에게 내가 한밤중에 겪은 짧은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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