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67화 (67/110)

067. 칼끝, 흔들릴 때

Touch of Madness

약간의 주화입마조차 겪지 않는 천무지체란 존재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 * *

셜록 홈즈가 떠난 블랙프라이어스 교.

짙게 깔린 마기가 조금은 흐려진 즈음, 한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만한 소동이 벌어졌는데 찾아오는 놈 하나 없다니. 런던의 협객이란 놈들은 다 죽었나. 쯧.”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Etiquette Is Fallen Down.

마치 런던 교처럼Just Like London Bridge.

낡은 골프백을 맨 노객은 그렇게 한탄하며 연신 혀를 찼다.

개방도가 빈곤하다는 건 강호의 상식이지만 계급이 낮아 매듭을 달지 못하는 백의개Knotless Beggar조차 허름한 신발 정도는 신고 다니는 법.

하지만 거지발싸개Vintage Shoes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개방도 노인은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다리 위에 저격검수가 남긴 값비싼 검법 스파이크화의 자국이 남아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

“그렇지 않느냐, 위긴스.”

“예, 방주님Yes, Dragon Head.”

노인이 제자일 마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대자 뒤따라온 아이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구불구불한 금발머리와 뉴스보이 캡報童帽의 챙이 가리지 못한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닌 소년. 그 오른팔에는 짧은 넥타이를 묶어 만든 매듭이 하나 달려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위긴스Wiggins.

개방의 막내를 갓 벗어난 일결개Single Knot Beggar이자 동시에 모든 개방도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용두방주의 손주였다.

최근엔 또래 개방도 아이들과 베이커가 의화단Baker St. Irregulars인가 하는 소꿉놀이에 열중하는 듯했지만 그조차도 노인의 눈엔 마냥 기특할 뿐이었다.

강호의 협Chivalry을 세우는 데 한 줌의 힘을 보태려는 그 마음을 귀히 여기는 까닭이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땐 그런 딱딱한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방주님께서도 단둘이 있을 땐 절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신다 약조하셨습니다.”

위긴스Wiggins는 베이커가를 돌아다닐 때와는 사뭇 다른 정중한 어조로 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노신老身이 먼저 약조를 어겼구나.”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조차 데면데면하게 구는 위긴스의 태도는 서먹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개방Homeless Clan의 용두방주,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는 그저 쓰게 웃기만 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기에.

“흠…….”

골프장에서 잔디를 살피는 것처럼, 올리버 트위스트는 자세를 낮추고 자국에 스며든 기운을 살폈다.

무공의 여파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해도 강물이 역류하는 건 망자가 되살아나 생자를 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순리를 거스르는 일Against Heaven’s Will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간 끔찍한 흉조가 아닐 수 없는 사건.

“이 기운은…… 낮에 본 놈이 맞군.”

용두방주는 오후에 목격했던 낚시꾼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박귀진Social Facade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닌데 상승의 잠행술로 기파와 기척을 모두 갈무리하고 있던 장신의 사내.

존재감을 흐리게 만드는 신묘한 수법은 인도 살막Thug의 고수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자신이었기에 한눈에 수상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지, 평범한 무인이라면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터.

“모처럼 괜찮은 무재武才를 지닌 놈이다 싶었는데.”

올리버는 다리 위에서 떠다니는 점착성의 기운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파 무공이 남긴 진기의 잔여물이 출수한 자리에 이렇게나 오랫동안 맴도는 일은 없다.

이는 그들의 내력이 천지간을 흐르는 기운을 토납법을 거쳐 연공한 것이기에 그 흔적이 금세 공기 중에 흩어져 자연지기로 돌아가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마공은 다르다.

블랙프라이어스 교 위를 떠도는 건 진기가 혈도를 역류하며 만들어진 끈적하고 진한 탁기.

마공이 남긴 흔적은 특유의 성질 탓에 쉽게 사라지지 않고 무겁게 가라앉아 사위에 엉겨붙는다.

“하필이면 마인이었다니.”

이곳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마공으로 인해 성질이 역전되긴 했으나 낮에 본 사내의 기파가 틀림없었다.

이만한 농도의 마기에 노출되었다간 무공을 익히지 못한 양민이나 성취가 낮은 무인이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죽음을 면치 못할 터.

“혹시, 가르침이라도 내리실 생각이셨습니까.”

위긴스가 묻자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런던 총타Headquarter에 인재가 없어도 마공으로 살인을 일삼는 놈에게 항룡십팔장Dragon Slayer이나 타구봉법Golf Technique을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안심했습니다. 런던이든 파리 분타Court of Miracles든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에잉, 그 탐정인가 하는 놈에겐 흥미가 없대도.”

올리버가 말을 끊자 위긴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물었다.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논할 얘긴 아닌듯하구나. 일단은 물러나 있거라. 이 난장판을 수습해야 하니.”

위긴스가 충분히 거리를 둔 걸 확인한 노협老俠이 골프백을 열었다.

그리고는 안에 든 열댓개의 막대 중 가장 샤프트가 길고 헤드가 두꺼운 것을 골라 꺼내 들었다.

개방의 신물 타구봉Golf Club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1번 우드一號木桿.

올리버 양손으로 쥔 클럽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스윙했다.

펼쳐지는 건 타구봉법의 절초.

“발구조천撥球朝天.”

-콰앙!!

발구조천Tee Shot이 일으킨 진기의 폭풍이 매섭게 소용돌이치며 무릎께까지 쌓여있던 마기를 모조리 밤하늘 저 너머로 쏘아 올렸다.

-휘간세여 약안광도, 방주절기 강맹무비

-揮桿勢與 掠岸狂濤, 幇主絶技 强猛無比

-Good Shot, Mr. Dragonhead!!

정화된 다리 위에 위긴스의 박수갈채가 메아리쳤다.

* * *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편지를 한 장 쓴 다음 잠시 거리로 개방 꼬마과 미리 정해둔 접선 장소에 동전과 함께 숨겨두었다.

자고 일어난 즈음엔 위긴스가 이끄는 베이커가 의화단의 일원이 수신인에게 전달을 마쳐둘 것이다.

1층에서 물을 끓여 내무장관에게서 받아온 동자삼Mandragora과 닐기리Nilgiri 홍차의 블렌드를 우린 나는 하숙집 2층으로 돌아가 왓슨의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규칙적인 숨소리에 섞여 앙증맞게 코 고는 소리가 엇박자로 끼어들고 있다.

아무래도 피로곤비해 쓰러진 모양이다.

하긴 요 며칠 동안 유령권마를 추적한다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마 호텔에서 레스트레이드가 불침번을 서는 동안 잠깐 곯아떨어진 것과 열차에서 낮잠을 잔 게 전부였으니까.

새삼스럽지만 레스트레이드에게 양면이 모두 뒷면인 속임수 동전을 쥐여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왓슨은 지금 이상으로 지쳐있었을 터.

나는 깔끔한 안배가 만들어낸 완벽한 결과에 만족하며 거실의 소파에 앉아 스코틀랜드 야드와 블랙프라이어스 교에서 겪은 사건을 되새겼다.

자극적인 모험은 약간의 성과와 함께 막을 내렸다.

이건 내무장관과 체신장관, 그리고 제갈율리에게서 앞으로 받아낼 보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유령권마의 목숨을 살수에게서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점혈이 얕았으니 지금쯤 가사 상태에서 벗어나 추가적인 취조를 받고 있을 테지.

티모시 영은 사이한 무공에 조종당하고 있는 데에다 처음부터 아는 게 없으니 모리어티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 건 거의 불가능할 테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놈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고 모리어티는 유령권마의 목숨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사실에 분개할 것이다.

모리어티가 이번 사건의 배후라는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아직 법으로 옭아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숨통을 조일 첫 번째 실마리는 수중에 들어왔다.

유령권마의 입에서 나온 단초를 따라간다면 모리어티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한 걸음씩 필요한 과정을 밟아가며 놈을 제거하기 위한 힘을 손에 넣어가면 언젠가 내 칼은 놈에게 닿을 테니까.

그리고 이쪽 세상의 런던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모리어티를 죽이는 외에도 아직 남아있다.

“왓슨…….”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있는 레이디가 조수로서 모자라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 나의 지음知音이 되어주었던 그 사내를.

“…….”

나는 창가의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왓슨을 찾으려면, 그리고 계속해서 모리어티를 추적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딸깍

비밀 서랍을 열자 한 권의 수첩이 나타났다.

나는 블렌딩 티를 한 모금 들이켜고 가죽 표지를 열었다.

평소 제대로 된 메모라곤 한 적 없는 내가 굳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은 이유는 하나.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첩이 담고 있는 건 바리츠의 비급 같은 게 아니다.

이쪽 세상의 내가 남들이 읽어볼 수 없도록 악필로 휘갈겨 쓴 메모.

“……가까운 시일 내에 그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겠어.”

나는 또 다른 셜록 홈즈가 런던 무림에서 조사해온 비밀스러운 조직에 관한 기록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메모를 읽는 내내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쪽 세상의 내가 경험한 일들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안에 적힌 내용이나 그걸 작성할 때 느낀 감정 역시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직접 수첩을 열어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이래야 나답지.”

아무리 사는 세상이 달라져도 셜록 홈즈라는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첩의 첫 페이지에 적힌 건 런던과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어떤 결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작은 단초를 조합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뿌리내려 갖은 비밀스러운 정보를 취급하는 이 집단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 신비로운 문파는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대가를 지불하는 자에게 귀중한 지식과 정보를 판매하고 있었다.

스승의 밑에서 무공을 수련하던 시절 그 활동을 눈치채지 못한 건 저들이 까다롭게 고객을 가려받던 까닭이었다.

결사가 다른 문파를 이끄는 장문인 혹은 장로에게만 문을 열고 있으니 후기지수인 내가 눈치챌 수 있을 리가.

강호에서 이렇다 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건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래도 왓슨과 모리어티를 계속 추적하기 위해선 그들과 접촉해 연결고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오문下午門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모리어티와의 정보격차를 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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