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영탄가 (2)
Ayre (2)
어. 그거 베낀 멜로디 맞아. 근데 어쩌라고.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 *
왓슨이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내심 올 게 왔다고 각오했다.
저번에 언젠가 반드시 내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꼭두새벽.
가뜩이나 피곤한 사람을 깨웠다고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노래와 연주를 듣다 조용히 눈물을 흘릴 뿐.
“…….”
이 연주는 왓슨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런던무림으로 건너온 이후로 무공에만 정신이 팔려 잠시 악기를 손에서 놓긴 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해왔고 실력에도 나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연주는 오로지 사자심법·개改의 2단계 부작용이 금제를 부수고 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평소 내가 즐겨 연구하는 중세 음악이나 즉흥곡, 혹은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는 밝은 곡이 아닌 오라토리오의 아리아를 고른 것도 그때문이었다.
그런데, 곤히 자는 사람을 아침 댓바람부터 깨우면서까지 연주한 단순한 멜로디가 왓슨에겐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왓슨이 평소부터 음악에 관해 논하거나 예민한 감수성을 보인 일은 없었기에 나로선 뜻밖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관찰과 경험을 통해 생겨난 나의 비자발적 편견을 따르면 런던무림의 숙녀는 일반적으로 사소한 일에도 극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반면 왓슨은 군에 복무했던 경험 때문인지 또래 여성들보다 감정의 동요를 쉽게 내비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눈물을 목격한 순간 나는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살던 세상에서 보낸 삶과 이쪽 세상에서 보낸 스물여덟 해의 인생을 통틀어서 나 셜록 홈즈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눈물짓게 만든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단언컨대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멋진 연주였다네.”
심지어 왓슨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내게 찬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마치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존 왓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랬다면 다행이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의 입은 멋대로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왓슨은 내가 투정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기이한 일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로 왓슨을 울렸다는 사실이 뿌듯해 내심 검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어째서 저런 싹퉁머리 없는 대꾸밖에 하지 못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의 무의식이 일으킨 거부반응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존 왓슨의 존재를 제인 왓슨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완전히 대체하게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사 표현.
나는 분명 지금 함께 지내는 왓슨 역시 친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럽 어딘가에 제인 왓슨의 쌍둥이 오빠 존 왓슨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노래는 그저 그랬지만.”
크게 상관은 없는 이야기이긴 하나 왓슨이 감동한 건 나의 연주만이었지, 노래는 영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실은 나의 노래가 바이올린 연주만 못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아리아의 가락을 따라 노랫말까지 읊은 데엔 응당한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하겠네, 홈즈. 앞으론 오전에 출근하는 날에 악몽을 꾸다 지각할 일이 없겠군그래.”
“……심마를 물리치기 위함이었으니 이해해주게.”
날 놀리려는 건지 빙글빙글 웃던 왓슨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진 않았다.
“자네를 깨워놓고 이런 얘길 하는 건 조금 미안하지만 밤을 샜더니 피곤하군. 장관을 만나러 가려면 미리 자둬야겠어.”
“뭐라고?”
왓슨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노려봤지만 무시하고 창틀에서 일어나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미리 준비해둬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군.”
왓슨의 단잠을 깨워가면서까지 연주에 집중한 보람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던 기괴한 환청은 이제 들리지 않는다.
눈을 감고 기억의 궁전을 관조하자 아까 보았던 검은 책의 표지가 닫혀 있는 게 보였다.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마공의 부작용을 억누르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겠지…….”
언젠가 스승처럼 탈마Detoxified의 경지를 넘어서게 된다면 모를까, 그 전까진 책에 봉인해둔 심마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만일 저 안에 가두어둔 것이 풀려난다면 그 결과는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안정적인 수사 자문가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만전을 기해야 하겠지.
새삼스럽지만 바이올린을 익혀두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헨델이 영국에 귀화한 것에 감사해야겠는걸.”
음공의 달인이 작곡한 작품엔 음의 높낮이와 장단이 지닌 수비학적 관계에 내력이 반응하며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아까 왓슨에게도 말했듯이 조금 전 연주한 주적은덕무량대수 역시 이에 해당된다.
이 곡조는 마공의 기운과 심마를 배제하는 항마降魔의 힘을 지녔는데, 런던무림에는 이 노래와 얽힌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운기조식에 열중하던 5월의 어느 날, 헨델은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영감에 이끌려 오라토리오 사울의 구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동굴에 숨어 폐관 작곡을 시작한 그는 판관필로 손수 청강석에 한땀한땀 악보를 새겼는데, 음표를 아로새길 때마다 사무엘경을 암송하며 성지를 향해 세 번씩 절을 올렸다.
식음을 전폐하고 작곡에 몰두하던 헨델은 무려 사십일이 지난 다음에야 동굴을 벗어났고, 판관필을 쥐고 있던 오른손과 무릎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그 얼굴에선 한동안 강렬한 광채가 뿜어져 나와 뭇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착각하기까지 했다.
헨델의 지극정성이 원시천부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아니면 그의 재능과 수련이 이뤄낸 기적일까.
이유가 어떻든 단순한 곡조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공능이 깃들게 되었으니 그 신묘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율을 악기로 연주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구결을 노래한 건 손끝에서 펼친 음공과 호흡을 통해 펼친 음공을 공명시켜 상승효과를 일으키기 위한 방책.
기대했던 대로 나는 노래에 깃든 영성을 빌려 심마를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다.
“단번에 성공할 줄이야. 스스로의 재능이 두려워지는군.”
상식적으로 이는 강호 제일의 정순한 공력을 쌓아 마인들과 맞서는 성산파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아닌 이상 일으킬 수 없는 조화.
부작용을 억누르고 있다 해도 내가 마공 사용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산파 무인의 힘을 빌리려 했다간 사도좌Vatican의 사냥개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나설 터.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특별한 준비 없이 심마를 가라앉히는 공능을 지닌 헨델의 아리아는 앞으로도 내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만일 장인의 손길이 닿아 영성이 깃든 악기가 있다면 음공을 펼치기 훨씬 더 수월해지겠지.
“레스트레이드나 다른 경감들이라면 속여넘기거나 입단속을 시킬 수 있겠지만…….”
강적과 마주친다 해도 티모시 영처럼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마공을 펼치는 건 삼가 마땅하다.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성산파 무인이 마공 사용자라면 누구든 죽이려 든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최소한 그들의 눈이 지켜보는 곳에선 정파 무공만을 수련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이곳이 가톨릭의 세력권을 벗어난 잉글랜드라 해도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궁지에 몰려 직접 마공을 펼치기라도 했다간 가라앉힌 심마가 다시 날뛰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마공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력한 영약을 섭취해 내공을 증진시킴은 물론 계속해서 기억의 궁전에 존재하는 초식과 무리를 나의 정신과 동조시켜야만 한다.
-쿨럭!
“……아까부터 과할 정도로 무리했군.”
새벽에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제자일 검법의 절초를 흘려내다 입은 내상이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짧게 운기조식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남의 잠을 깨워두고 혼자 쉬러 가겠다는 얘길 듣고 토라진 건지 왓슨은 1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홀로 남아 잠을 청했다.
그런데―
-뽀득
침대 밑에서 요상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매트리스 아래에 감춰둔 유리돔 씌운 화분을 꺼내자 이따금 독을 먹이로 주며 키우던 백고白蠱가 희끄무레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건……대체…….”
애벌레는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규칙적으로 몸을 꼬아대며 유리돔을 머리로 두드리고 있었다.
“음공에 반응하고 있는 건가.”
쉽게 판단할 순 없지만 백고가 발하는 기파는 얼마 전 용봉지회 살인사건에 사용된 독을 먹이로 주고 살폈을 때보다 한층 강해져 있었다.
나는 이 벌레가 진주언가가 자랑하는 영물이고 주변 환경과 먹이를 조절하면 소유자에게 여러 이로운 수확물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음공이 지닌 상서로운 기운마저 자신의 양분으로 삼을 줄이야.
고의 생태는 나의 전문분야가 아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무심코 유리돔을 열어젖힌 그때.
-툭
놈의 머리통만 한 둥근 구슬이 고의 등에 뚫린 구멍을 비집고 나왔다.
알록달록한 대리석을 완벽한 구의 형태로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영단靈丹.
평소 독을 먹인 다음 바로바로 뱉어내던 맞춤형 해독단과는 아예 생김새 자체가 달랐다.
“……조만간 언을 만나봐야겠군.”
나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주머니에 갈무리한 다음 화분을 침대 밑에 돌려놓았다.
예상치 못한 수확물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엔 조금 더 기다릴 필요가 있을 듯했다.
* * *
잠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오늘 왓슨의 출근 예정 시간은 오후.
같이 점심을 먹은 다음 느긋하게 같이 하숙집을 나가도 장관과의 약속시간엔 늦지 않을 것이다.
아까 내가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1층으로 내려간 걸 보니 허드슨 부인도 바이올린 소리에 깼을 거라 짐작하고 하소연하러 간 모양인데.
점심을 먹는 내내 부인과 왓슨의 잔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물론, 오전 6시 20분부터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하는 사람을 좋은 하수인이라 부를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하숙비를 지불하는 데에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곤 해도 말이다.
그래도 이 나이 먹고 누군가의 꾸지람을 듣는 게 부끄러운 일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내겐 식사를 걸러선 안 되는 수백 개의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왓슨과 허드슨 부인의 목숨을 위험에서부터 지키는 것이라든지.
“……여깄군.”
나는 협탁 서랍에 넣어둔 약병을 두 개 꺼내 챙긴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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