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70화 (70/110)

070. 대국 개시

Opening

강호의 명성이란 협행의 향기를 뜻한다.

-소크라테스-

* * *

“좋은 아침입니다. 부인. 왓슨.”

“……아침 인사를 하긴 조금 늦은 시간이군요, 홈즈 씨.”

피곤한 얼굴의 허드슨 부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충분히 자다 와서 개운해 보이는군. 누군 새벽부터 동거인이 시끄럽게 굴어서 피곤해 죽겠는데 말이야.”

왓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주는 잘 들었지만 자신을 일찍 깨운 다음 내가 혼자 자러 간 게 억울한 듯 썩 좋지 않은 표정.

“이상하군. 자네는 연주를 듣고 감동해 눈물까지 흘린 거로 기억하는데.”

“제대로 감상을 공유할 틈도 없이 누가 혼자 자러 가지만 않았어도 참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나?”

그나저나 내가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내려가더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짜 콧수염을 붙이고 역용술까지 완벽히 마친 걸 보니 왓슨도 변장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모양이다.

“앞으로는 조심하겠네.”

“그래. 자네는 좀 조심할 줄 알아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식탁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두 사람의 앞을 지나 주방으로 향했다.

뜻밖의 발견은 차치하고, 조심해야 할 일은 사실 따로 있었다.

“어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도 되는데.”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점심 식사를 조리하고 있던 메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의 메뉴는 계단협병Egg Sandwich과 우육가리탕Beef Masala.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메이드에게 담담히 내가 목격한 것을 전했다.

“아아. 이건 실례. 다른 건 아니고 조금 전에 계단에서 불이 나는 걸 봐서 말이죠.”

“콜록! 이게 무슨 냄새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허드슨 부인이 연기에 목이 메여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나!!”

메이드는 곧바로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불을 끄러 달려갔다.

주방에 남은 건 나 혼자. 주머니에서 약병 두 개를 꺼내 내용물을 카레 냄비에 들이붓고 국자로 휘휘 저은 다음 창문을 열었다.

-철퍽!

불씨는 금방 꺼졌다.

애초에 모여있던 먼지를 미약한 공력으로 일으킨 삼매진화로 태웠을 뿐이니까.

“어휴. 깜짝 놀랐네요. 난데없이 웬 연기가…….”

“벽에 옮겨붙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부인. 그나저나 대체 어디서 불씨가 난 건지.”

주방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의심 가득한 두 여인의 눈초리가 나를 향했지만 손바닥을 펼쳐 곰방대를 소지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식탁에 앉았다.

메이드는 불을 끄자마자 서둘러 음식을 날랐고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쳤다.

아무래도 내가 마지막에 가미한 비밀 스파이스의 양이 적지 않았던 탓인지 커리를 먹는 내내 부인과 왓슨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지만.

“재료가 상했나……. 아니면 메이드의 레시피에 문제가…….”

다시 2층으로 돌아온 왓슨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역용술을 잠시 풀고 가짜 수염을 떼어내 식사 중에 묻은 커리를 닦아내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그걸 투여하는 빈도가 너무 잦았던 모양이다.

우리 셋의 몸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매 끼니마다 음식의 맛을 의도적으로 망치는 건 내게도 상당한 고역이었다.

“분명 예전엔 먹을 만했는데.”

“동의하네. 아무래도 부인에게 메이드를 교체하는 걸 건의해봐야겠군. 우리가 집을 비울 때 출근하지도 않는 주제에 너무 게을러.”

불을 지른 것도, 허드슨 부인의 레시피를 따라 메이드가 만든 요리를 망친 것도 모두 나였지만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소신대로 말했다.

지금 이 집에서 일하는 여급은 본래였다면 진즉에 레스트레이드를 불러 체포하게 시켰어야 하는 범죄자였으니까.

‘슬슬 이용 가치가 없어졌으니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하는 게 맞겠지.’

저 메이드는 고용인의 계약이 갱신되는 수태고지일(이젠 가브리엘 천사님 오신 날로 공식명칭이 변경된), 그러니까 3월 25일을 한창 넘긴 즈음 전임자가 그만두며 부인이 급히 구한 신입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나를 노리고 온 살수로 이 이야기는 허드슨 부인에게만 귀띔하고 왓슨에겐 비밀로 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살수의 흉계를 모른 척 내버려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매 끼니마다 음식에 다양한 독을 타주는 덕에 굳이 내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진 까닭이다.

‘이럴 때 스승의 메이드가 있어줬다면 망설이지 않고 교체했을 텐데.’

살수의 무공은 삼류라 그 정체를 아는 허드슨 부인을 해칠 수 없었고, 그런 주제에 고용주가 자금을 넉넉하게 주는지 다양한 독을 반입했다.

그리고, 언이 준 백고는 독을 먹으면 이에 대응하는 해독단을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생태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사실에 착안했다.

메이드가 식사에 미량의 독을 타기 시작한 사실을 눈치챈 당시, 나는 소장하고 있던 독을 전부 백고白蠱에게 먹여 맞춤형 해독단을 다수 확보한 상태였다.

독을 구매하는 데에 추가로 자금을 투자하고 싶진 않았던 나는 그녀가 보관한 독을 조금씩 훔쳐서 고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살수는 아무리 독을 먹여도 우리 셋의 몸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 차례차례 다른 독을 가져와서 음식에 넣었고, 덕분에 백고는 다양한 미식을 즐기며 나날이 쑥쑥 자라는 중이었다.

‘뭐, 덕분에 돈은 많이 아꼈으니 됐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메이드가 새로운 독을 가져올 때마다 직접, 혹은 허드슨 부인을 시켜 훔친 다음 해독단을 제조했다.

오늘 커리에 넣은 것 역시 해독단을 갈아 만든 가루.

왓슨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 또한 이와 연관이 있었다.

청결과 안전을 중시하는 그녀의 천성을 고려하면 식사에 누가 독을 넣는 걸 방치하거나 벌레가 만들어낸 부산물을 섭취하는 데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동안 독을 수급한 덕에 나를 포함해 이 집에 사는 셋은 런던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지효성 독에는 면역이 되었다.

그뿐인가. 이대로 계속 독을 먹이면 조만간 백고가 저번에 먹인 시독의 해독단도 만들어줄 것이다.

‘고독대선蠱毒大仙의 집념을 고려하면 반드시 런던에서 다시 혈겁을 일으키려 할 터.’

놈이 돌아오기 전에 맞설 수 있도록 대비를 마쳐야만 한다.

다만, 일단은 꼬리를 드러낸 모리어티부터 견제해야겠지.

“참. 그러고 보니 홈즈, 아직 그 얘길 자네에게 하지 못했군.”

“음?”

아직 장관을 만나러 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왓슨이 생각지도 못한 화두를 던졌다.

“이야기라면, 어떤 것 말인가.”

“내가 스코틀랜드 야드 지하에서 수수께끼를 하나 찾았다고 하지 않았나.”

“기억하고 있네. 자네가 얘길 꺼내려던 와중 열차가 출발한 탓에 듣지 못했지.”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서 왓슨이 야드 지하를 걷는 동안 겪은 일에 관해 말해주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기적 소리가 울렸던가.

한동안 모리어티의 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어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실로 구미가 돋는 화제였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고지식한 역근경 수련자들이 지하 통로를 지나는 이들에게 안대까지 씌우고 비밀을 지키려는 걸 보니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건 확실할 터.

“말해보게.”

“노래였네.”

“노래?”

“맞아.”

내가 묻자 왓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멀리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네. 오래된 영어 같긴 한데, 발음과 문법이 어눌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겠나. 자네가 말한 어눌한 노래 말일세. 약간이라도 좋으니 노랫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알려주게나.”

“으음……. 짧은 구절을 반복하고 있어서 외우긴 어렵진 않았네만.”

왓슨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윽고 가락이랄 것이 없는 기이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몸은 보리수로 되어있다 身是菩提樹

-I am the tree of my bohdi

-마음은 명경 心如明鏡臺

-And mirr’r is my heart

-부지런히 털고 닦아 時時勤拂拭

-Wipeth off ov’r a thousand times

-먼지가 없도록 하라 莫遺有塵埃

-Collecteth dust not

.

.

.

노래를 마친 왓슨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흠흠. 아미수녀회의 시스터比丘尼도 아닌데 독경讀經 비스무리한 걸 해버리고 말았군.”

“…….”

한편,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홈즈. 혹시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네.”

언젠가 스승이 말한 적 있다.

런던 어딘가에는 소림사에서 건너온 무승武僧들이 정착한 왕림Kingswood 이상의 정통성과 역사를 지닌 비밀스러운 세력이 존재한다고.

어째서인지 스승은 그들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러운 노래를 알고 있었고 이를 제자인 나에게도 전해주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며, 기억해두라는 당부와 함께.

“아무래도 자네가 발견해버린 모양이군.”

“무엇을 말인가.”

“런던무림에 200년 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을.”

“뭐라고?!”

왓슨이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믿을 수 없군! 드디어 내가 조수로서 한 건 해냈다는 뜻인가?! 부탁이네, 홈즈! 이번 일을 자네와 내 모험담으로 적어 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

“아직은 어렵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은가. 무엇보다 지하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간 스코틀랜드 야드의 헨더슨 청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그럼 대체 언제까지 자네의 공로가 멍청한 경찰들에게 빼앗기게 두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말인가!!”

유능한 조수이자 뛰어난 의원인 그녀는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왓슨이 나의 명예를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둘의 활약이 런던 시민들의 입을 오르내린다면 생활이 윤택해지는 건 물론 수사를 진행하는 것도 수월해지겠지.

다만, 그 덕에 예상보다 모리어티와 일찍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해야만 한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지하에 숨겨진 그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나가는 것 역시 곤란하고.

버킹엄 어전 무도회에 출석하면 그 이후로는 나에 관한 입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테고 모리어티도 나의 존재를 눈치채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진, 최대한 숨을 죽이고 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어떻게든 작게나마 타격을 주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네가 정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고려는 해보겠네. 단, 정보가 그대로 유출되지 않도록 잘 통제할 필요가 있겠지.”

다만 동거인인 왓슨의 의견을 계속해서 묵살할 수는 없다.

저렇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하고 있는데 계속 거절하는 쪽이 더 어렵다.

“정말인가? 홈즈!”

“이 얘긴 이따 돌아오면 마저 하도록 하지.”

“알겠네! 그럼 밤에 보세!”

다리가 불편한 주제에 왓슨은 소파에서 뛰어오를 것만 같은 기세로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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