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 의인의 삯 (1)
Good Shall Be Repaid (1)
적절한 협행에 전력을 다한 무인은 더없이 풍요로운 보수를 얻게 된다.
-랠프 월도 에머슨-
* * *
“그만 뛰어다니게. 다리 상태가 좋아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면서.”
“알겠네!”
왓슨은 다시 가만히 자리에 앉았지만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원고 집필을 허락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부터 내무장관을 만나 나눌 이야기가 예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잠깐은 그녀에게 펜을 쥐여주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코앞까지 닥쳐온 모리어티의 위협을 잠시 걷어낸다면 활약을 각색해 기고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정보조직을 찾아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니 왓슨의 도움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모리어티가 세바스천 모런을 보내며 꼬리를 드러냈으니 다음 수로 이를 응징해야 한다.
놈과의 논검체스 대국對局이 시작된 이상 이쪽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는 없는 법.
“병원에서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게. 자네가 잠든 사이 내가 겪은 일에 관해 알려주겠네.”
나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먼저 1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내무장관에게 합당한 나의 몫을 받고 대국大局을 논할 차례다.
내가 왓슨을 두고 혼자 향한 곳은 웨스트민스터 궁이었다.
베이커가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 직접 운행하는 지하철이 없는 관계로 이번에도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야만 했다.
“……그새 치워두었나. 예상대로군.”
다리 위를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가 자취를 감춘 걸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지만 모리어티의 뻔뻔함이 감탄스러워질 따름이었다.
“셜록 홈즈 님이시군요. 장관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위병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올라가자 오늘도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하커트 경의 모습이 보였다.
“일찍 다니는 성격으론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않습니까.”
넉살 좋게 받아치자 장관이 한숨을 쉬며 허공섭물을 멈췄다.
소리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서류와 도장.
“일단은 앉게.”
이번에도 장관의 시종이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나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어디서 이 정도의 잠행술을 익힌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소천마 셜록 홈즈. 자네에겐 벌써 세 번이나 도움을 받았군.”
하커트 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하도 담담해서 처음 들었을 땐 그것이 내게 고마움을 표하는 말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도움이라뇨. 강호의 도리를 바로 세우고 협을 행하는 건 신사된 자의 의무. 부디 괘념치 마시길.”
내가 기억하기로 내무장관은 부하들의 입을 통해 저번 강시 사건 해결의 공로를 치하하는 포상을 내리겠노라 약속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령권마가 연쇄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바람에 지급이 늦어졌지만.
오늘 나를 불러낸 건 미뤄둔 포상을 주는 겸 이번 사건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일 터.
실은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무장관이 경찰청장이 그랬던 것처럼 나의 공헌을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먼저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내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뜻이겠지.
“무엇보다, 장관대인께서 직접 탐안探案과 추포追捕를 의뢰하신 건 이번이 처음인 거로 기억합니다.”
신경 쓰이는 점은 내가 그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엮인 일이 두 번밖에 없다는 점이다.
고독대선의 강시를 상대했을 때와 유령권마 사건.
장관은 나의 도움을 받은 게 도합 세 번이라고 했는데, 나머지 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했다.
설마, 용봉지회 사건을 해결한 걸 말하는 걸까.
“겸손한 사내라곤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뜻밖이로군.”
“장관대인께선 직설적이시군요.”
“쓸데없는 말을 싫어할 뿐이지.”
그가 말을 마친 직후 가만히 나를 주시하다 입을 열었다.
“……새벽에 보낸 편지는 잘 읽었네.”
“급한 일이었던지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방금 한 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나.
장관이 말한 대로 나는 세바스천 모런의 흔적을 발견한 다음 베이커가 의화단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티모시 영의 입을 통해 알아낸 새로운 단초와 연관된 것이었다.
“흥미롭더군. 의회 앞에서 시위하던 자들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게 사주를 받았을 거란 이야기.“
장관의 대답에 나는 잠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중대한 사안인데 고작 흥미롭다는 말 정도로 정리하다니.
이렇게나 손발이 맞지 않는데 함께 모리어티를 상대할 수는 없다.
이번엔 포상만 챙기고 다음부턴 의뢰 외의 일로는 만나지 않는 쪽이―
“그래서 확인해보았네. 정확히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더군.”
“……?!”
무표정한 얼굴 탓에 당연한 반응도 즐거운 반전이 되는 기묘한 대화.
일단은 하커트 경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큰 수확이었다.
“확인하셨다고 하심은, 어떤 식으로―”
“일전에 그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밀정을 보내 확인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엔 이렇다 할 낌새가 없어 신경을 껐지만, 심증이 생긴 이상 이대로 아무 조치 없이 넘어갈 순 없게 되었지.”
장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위대는 일월성신교日月星辰敎라는 이름을 내건 신흥 종교 집단의 신도들이었다.”
“일월성신교……! 바로 그놈들입니다!”
일월성신교Church of Asteroid.
처음 듣지만 퍽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하기 전 모리어티가 교수의 신분으로 발표한 논문의 제목이 바로 소행성역학The Dynamics of an Asteroid이었으니까.
“저는 일월성신교를 이끄는 지도자야말로 이번 사건의 배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거는, 편지에 적어둔 대로 새벽에 암살시도를 저지하며 알아낸 단초입니다.”
소행성Asteroid은 흔히 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모리어티가 양지에서 사용하는 신분이 성산파나 국교회의 사제 혹은 신흥 종교 집단의 교주라고 추측되는 상황에서 일월성신교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쪽 세상으로 건너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런던과 런던무림은 뒤틀린 거울에 비춘 상像과 같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는 건 아니더라도 이란성 쌍둥이인 존 왓슨과 제인 왓슨처럼 수많은 공통점을 지닌 기묘한 두 세계.
두 세계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건 모리어티를 찾아내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될 터.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네.”
내무장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조사를 시작하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확실한 물증이 없고 모리어티의 무공 수준 역시 파악하지 못한 지금 놈을 잡아다 구속하거나 숨통을 끊는 건 어려울 것이다.
허나, 스코틀랜드 야드를 비롯해 강력한 공권력을 손에 쥔 내무장관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모리어티에게 적잖은 타격을 줄 수 있다.
당장 모리어티가 잉글랜드의 전장Bank에 실명과 차명으로 보관 중인 자산을 찾아내 동결하기만 해도 영국에서 벌이는 무공 범죄 컨설턴트 활동을 대폭 제한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어려울 것 같군.”
하지만 내무장관의 의견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장관대인! 대체 어째서 결정을 미루시는 겁니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우유부단하게 구는 그의 태도를 성토하려 했지만 하커트 경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맹세컨대 이런 중요한 결정을 미룰 이유는 내게 없네.”
“하면, 어떤 사정이?”
돌아온 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편지를 받자마자 왕립무학회와 런던무림맹의 고수들을 징집해 함께 서더크Southwark로 향했네. 일월성신교의 교회가 있는 곳이지.”
“……!!”
설마 내무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직접 범인을 잡아들이기 위해 나설 줄은 몰랐는데.
일월성신교의 존재를 파악하고도 기만전술에 당해 사건의 흑막을 놓쳤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가 하면…….”
나는 전 신경을 귀에 집중해 내무장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말입니까.”
“그렇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귀를 의심했지만 하커트 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교회의 건물도, 신도도, 그들을 이끌던 젊은 신부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며칠 전 밀정을 보냈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곳에 있었는데 말이지.”
장관이 넌지시 두 잔째 차를 따르던 시종에게 눈길을 던졌다.
보아하니 장관이 보냈던 밀정의 정체가 바로 그였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존재감이 심하게 흐릿하다 했더니 잡일 시키려고 고용한 시종이 아니었군.
반박귀진의 경지에 달한 고수라면 시종으로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저자는 아마도 특별한 잠행술을 익혔거나 기척을 지우는 데에 재능을 지녔을 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유형.
“유능한 부하를 두셨군요.”
“클라크가 녹봉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내가 기용하진 않았을 거다.”
장관의 시종이 가슴에 한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보였다.
“어쨌든, 아직 조사를 이어가고 있긴 하나 신도는 물론 일월성신교를 이끌던 젊은 신부에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초가 또 하나 늘었다.
젊은 신부라.
모리어티는 어쩌면 여왕 폐하와 같이 반로환동을 이룬 고수일지도 모른다.
“근방에 거주하는 주민을 상대로 심문을 시도해봤지만 처음부터 그런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군.”
아무래도 교회 근방에 살던 주민들은 유령권마가 당한 것처럼 사이한 술법에 홀려 기억을 잃었거나 인지가 왜곡된 모양이다.
“기이하군요.”
진법을 펼치는 정도로 왕립무학회와 런던 무림맹의 고수들을 속이는 건 어렵다.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리어티가 작정하고 숨어버린 이상 찾아내는 건 쉽지 않겠지.
“용모파기를 제작해 조용히 수사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술법에 능한 것은 물론 전화를 사용한 살초와 마공을 타인에게 전수할 수 있는 고수입니다. 쉽지 않은 상대일 테죠.”
“동의한다. 우린 어쩌면 새로운 대마두大魔頭의 출도를 목격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가능하다면 유럽 무림맹과 타국 경찰의 협조도 요청해보도록 하지.”
“현명한 판단입니다, 장관대인.”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처사였다.
나는 모리어티의 계획을 방해하고 이른 단계부터 놈의 그 위험성을 알리는 데에 성공했다.
유럽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대규모 천라지망Enclosure Movement을 펼칠 수는 없을지언정 놈의 활동에 제약을 걸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번 모습을 감춘 이상 놈은 쉽게 양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충분한 준비를 마친 다음 선제공격을 가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게 낫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