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 의인의 삯 (2)
Good Shall Be Repaid (2)
무복이 무인을 만든다. 나체의 협객은 강호에 거의, 혹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마크 트웨인-
* * *
모리어티를 대적하기 위해선 나 자신이 강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무인이 강해지는 데엔 시간과 영약, 그리고 깨달음을 비롯한 기연이 필요하다.
놈이 어둠 속에서 새로운 범죄를 꾸미는 동안 나 역시 그 틈을 이용해 최대한 새로운 성취를 이룩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세도가들에게서 최대한 많은 보상을 받아낼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당장 배후를 일망타진할 수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의 공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내가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본 걸까.
장관이 시종에게 손짓해 지시를 내렸다.
“준비해둔 물건을 가져와라.”
“예. 대인.”
집무실을 나섰던 시종은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가 들고 있는 보따리는 두 개.
“이건…….”
장관의 시종 클라크가 두 개의 비단 보따리를 펼치는 동안 나는 잠시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첫 번째 보따리 안에 들어있던 건 두 가지 색상의 원단과 하얀 편지봉투.
봉투를 봉인한 실링왁스에는 내무부의 휘장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보따리에 들어있던 옷감은 하얀 원단과 검은 원단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양이 상당해 셔츠와 바지, 거기에 조끼와 코트까지 정장 한 벌을 전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허…….”
나는 가까이 다가가 옷감의 재질을 살폈다.
올이 곱고 가는 데에다 윤기를 발하는 섬유.
한눈에 보아도 상등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상등품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저건 사치품. 그것도 지독하게 희소해서 쉽게 손에 들어오지 않는 고가의 물건이다.
“소양타Vicuna의 털로 만든 원단이군요.”
비쿠냐 울.
머나먼 남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안데스 산맥에 서식하는 낙타과의 동물 비쿠냐에게서 깎아낸 털을 부르는 이름이다.
런던무림에선 흔히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남미무림인들이 가축으로 기르는 알파카라면 어느 정도는 친숙하게 느낄 것이다.
비쿠냐는 쉽게 말하면 가축화 되기 이전의 알파카, 즉 알파카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야생동물이었다.
놈들은 스페인인들의 남획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무척이나 귀중하게 취급되던 동물로, 길들일 수 없는 특유의 생태 탓에 안정적으로 털을 수급하는 것이 어려웠다.
고대 잉카 제국에선 비쿠냐의 털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는 건 제왕밖에 없었다고 하니 그 위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런 호사스러운 원단에 사용되는 건 신선의 섬유라 불리는 부드러운 속털뿐.
3년에 한 번씩 잡아다 털을 밀 경우 한 마리의 비쿠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속털은 고작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임페리얼 척관법으로 계산하면 5온스 정도.
지금 내 눈앞에 놓인 건 그 귀하디귀한 비쿠냐의 속털을 모아 정장 일습一襲에 목도리까지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한 원단이었다.
“제 눈을 의심하고 싶어지는 지경이군요.”
게다가,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평범한 비쿠냐 울小羊駝毛이 아니다.
-찌릿
나는 원단의 양쪽 끝을 잡고 오른손에서 미량의 진기를 흘려보냈다.
이윽고 기다랗게 직조된 옷감을 타고 진기가 막힘없이 흘러가 반대쪽 끝으로 빠져나와 내 손끝을 타고 체내로 돌아왔다.
“맙소사.”
단 한 톨의 공손실功損失도 없이 그대로 돌아온 내력.
심지어 섬유를 통과한 진기는 강렬한 양기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의류에 사용되는 섬유를 이만한 길이로 짜낸 다음 약간의 내공을 흘려보낼 경우 대부분의 공력이 사방으로 흩어져 소실되는 법인데.
이 원단은 마치 육체의 연장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가는 진기를 어떠한 저항도 없이 매끄럽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쿠냐의 속털에 그런 공능이 있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흘려보낸 진기를 심법 없이 변화시키는 공능을 지닌 건 몇몇 특별한 영물의 털가죽뿐이다.
다만, 그런 천재지보를 엮어 만든 원단 역시 섬유를 통과한 공력을 일절 밖으로 흘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이전에 용봉지회에서 여왕 폐하가 기르는 영물의 털에 진기를 흘려보냈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폐하를 모시는 영물 앙고라 고양이와 두 보더콜리의 털은 진기와 반응해 빛을 발했다.
이는 구리나 쇠가 뜨겁게 달궈져 붉게 빛나는 고온발광과 같은 이치로 열무학熱武學 용어를 빌리면 진기의 복사Radiation로 인해 흘려보낸 공력이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발생하는 공손실은 평범한 섬유보다 훨씬 크다.
고로,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
“한 마리의 영물에게서 취한 털로만 짜낸 원단이로군요, 이건.”
“정확히 보았군”
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천년소양타Ancient Vicuna의 등에서 깎아낸 털이다.”
“천년소양타……?!”
천년소양타는 양기의 화신이라 불리는 남미의 전설적인 영물.
평범한 비쿠냐 한 마리의 가치가 어지간한 영물과 맞먹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물이 된 비쿠냐의 값어치가 어떨지는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대량의 원단이 전부 영물 비쿠냐 한 마리의 등에서 깎아낸 속털이라는 건―
“크기가 엄청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여기 있는 게 올해 채집한 천년소양타의 털 중 사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하커트 경이 눈짓하자 그의 시종 클라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천년을 살아 영물이 된 소양타는 안데스의 봉우리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합니다.”
직접 안데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영물의 생태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남미의 고산지대에 산봉우리만 한 고대 알파카가 살고 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물 한 마리의 털만을 사용해 만든 원단…….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군요.”
“고독대선의 실험체를 처리해 혼란을 막고, 역성혁명의 싹도 잘라냈으니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할 수 있겠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 개인의 입장에선 고가 기생한 강시를 하나 처리했을 뿐이지만 여왕 폐하의 정부가 보기엔 상당한 공로였던 모양이다.
“이 정도 되는 원단을 가공할 수 있는 장인은 런던에도 몇 없을 테죠.”
나는 원단 위에 놓인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 든 건 장관대인께서 직접 적으신 소개장이겠군요. 과연, 새빌 로의 장인이라면 이걸 다룰 수 있을지도.”
“잘 알고 있군.”
“아무래도 사부가 살던 곳이다 보니.”
“호오.”
내가 새빌 로에 관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보인 건지, 아니면 사부라는 단어에 반응한 건진 모르겠다.
다만, 이 대화를 통해 살풍경한 집무실 탓에 알아보기 쉽지 않았던 장관의 개인적인 기호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격식에 신경을 쓰는 유형이었군.’
새빌 로Savile Row는 런던 중심부 메이페어를 가로지르는 거리의 이름이다.
이곳은 비스포크 정장의 성지로 익히 알려져 있었는데, 런던의 신사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오고 싶어 하는 장소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찾아간 적은 없지만 과거 나와 마이크로프트가 수련하던 스승의 저택 역시 새빌 로에 있어 내겐 상당히 친숙한 곳이었다.
마감 솜씨와 재질로 미루어보아 지금 하커트 경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구두도 새빌 로에 점포를 가진 장인의 손을 거친 물건.
무려 내무장관씩이나 되는 자가 친히 소개장을 적었다는 건 여기 있는 천년소양타의 털로 만든 원단으로 내게 옷을 만들어줄 장인이 돈만 준다고 의뢰를 받지 않는 까다로운 자라는 소리겠지.
“귀한 선물을 받았군요.”
“이게 끝이 아니네만.”
“참. 하나 더 있었죠. 실례했습니다.”
이어서 장관의 시종이 두 번째 비단 보따리의 매듭을 풀었다.
예상대로 그 안에 들어있던 물건 역시 상당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독각화망Unicorn Salamander의 뿔…….”
내 팔뚝만 한 길이의 예리한 꽈배기 모양의 뿔.
신화 속 영물인 일각수一角獸의 뿔과 닮았지만 밝은 주황색을 띤 걸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양기가 느껴집니다.”
“가치로 따지면 용봉지회에서 자네가 받은 내단의 서너 배 정도 귀하다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뿔을 감싸고 있던 게 특수한 가공을 거친 비단이었는지 매듭을 풀기 전까진 아예 뿔이 발하는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다시 시종이 보따리에 감싼 원단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쪽 역시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였다.
“무도회장 비무대 아래에 인가 없이 통로를 설치하고 거울 뒤에 비밀 관객석을 증축한 올맥과 용봉지회의 승부 결과를 도박꾼들의 내깃거리로 전락시킨 웨넘사에게 벌금을 징수했다.”
“훌륭하군요.”
“이건 압수수색 중 범죄수익환수 명목으로 가져온 물건이다. 내 재량으로 자네에게 주는 것이다지”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어차피 내단은 용봉지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자네가 우승해서 가져갔을 테니. 사건 해결에 공을 세운 것을 고려하면 추가적인 포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쪽은 예상치 못했던 보상이었다.
용봉지회에서 이미 내단을 얻었을뿐더러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금일봉을 받았었기에 추가로 내무장관이 무언가 줄 거라고 기대한 적이 없던 까닭이다.
“어디 쓸진 잘 고민해보게. 돈을 받고 팔아도 좋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가공해도 나쁘지 않을 거다.”
“감사히 받아가도록 하죠.”
장관이 말한 대로 독각화망의 뿔은 내단과 달리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과거엔 내단을 삼키는 것처럼 뿔을 잘게 가루로 갈아 복용하거나 한음기공寒陰氣功에 당한 상처에 뿌리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영물 부산물의 가공 기술이 발달한 근래엔 훨씬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날카롭게 깎아내 음기를 다루는 적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는 일격필살의 비수를 만든다든지.
아니면 그 단단함과 내포된 거대한 양기를 이용하기 위해 구두굽으로 만들어 권각술의 위력을 배가시키는 등.
창의력만 충분하다면 말도 안 되는 응용법을 떠올릴 수 있다 보니 독각화망의 뿔은 범용적인 소재로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걸 준비해주었군. 과연 장관급 무인은 다르다 이건가.’
실은 이쪽 역시 내단 이상의 양기를 품은 극양지물이다보니 왓슨에게 복용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Chimney같았다.
내가 정립한 이론을 따르면 독각화망의 뿔 역시 전통적인 방식을 통해 가루약으로 만들 경우 팔음절맥의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왓슨의 혈도와 거기 박힌 음기의 못이 이미 독각화망의 양기에 내성을 지니게 된 까닭이다.
만일 왓슨이 뿔을 복용한다 해도 저번처럼 혈도를 막은 못을 직접 갈아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이를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혈도가 독각화망의 양기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니까.
‘오히려 잘 됐지.’
단언컨대 이 뿔은 내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왓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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