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여왕의 이름으로
By Order Of The Queen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연기延期는 시간을 훔치는 양상군자와 같다.
-찰스 디킨스-
* * *
도시를 찾는 이가 늘면 잠시 객잔의 매출이 오르고 거리에 활기가 돌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림사를 찾아 몰려든 이들 사이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지면 런던이 아사리판阿闍梨判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일 터.
런던 곳곳에서 무림인들의 충돌이 일어나면 죄 없는 이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뒤집어쓰게 되리라.
“걱정 마십시오. 저도 스승도,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도 입이 싼 쪽은 아니다 보니. 비밀은 지켜질 겁니다.”
장관대인이 협조해주신다면 말이죠.
나는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삼켰다.
이쯤 말하면 하커트 경도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순순히 넘겨주지 않는다면 골치아픈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혹시 해서 묻는 거네만, 방금 말한 마이크로프트라는 사내는 영창英廠의 수장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혹시 대인께선 그와 막역한 사이신지…….”
내무장관이 정색한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심했습니다. 그자와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동생인 제가 하는 말이니 믿어주십시오.”
“……동의하네. 자주 만날 사람은 아니지.”
다행히도 장관은 말짱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마이크로프트와 친한 사이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뛰쳐나갈 생각이었는데.
“그 남자의 동생이었다니,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 자네들은 원하는 걸 얻는 데에 재주가 있어. 적을 만들기 쉬운 유형이지만, 감당할 그릇이 된다면야…….”
어쨌든, 자네가 뭘 원하는지는 잘 알겠네.
장관은 그렇게 말한 다음 서랍을 열어 기다란 쇳조각 일곱 개를 꺼냈다.
아마도 저것이 스코틀랜드 야드 지하통로를 여는 열쇠인 듯했다.
“특이하게 생겼군요.”
“다들 그리 말하더군.”
다만, 장관은 내게 그것을 건네는 일 없이 보여주기만 한 다음 곧바로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아쉽지만 이걸 내줄 수는 없다. 열쇠를 안전히 보관하는 것도 내가 맡은 역할이라서 말이지.”
“…….”
그럼 처음부터 보여주질 마시던지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어떻게든 참아냈다.
“이 열쇠를 빌려주는 건 자네가 폐하의 인정을 받은 다음 언젠가 런던의 안전을 위해 지하를 방문해야 할 때 고려하도록 하지.”
“까다로운 조건이군요.”
“이건 그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지하에 들어가려는 자를 위한 물건이 아니니까.”
지하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장관의 태도가 확고하니 더 얘기해봤자 소득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열쇠를 직접 이 두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하다.
“좋습니다. 그럼 열쇠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도록 하죠.”
“그래. 추포산은 나중에 레스트레이드를 시켜 보내도록 하지.”
나는 장관에게 인사를 마친 다음 비단 보따리를 챙겨 집무실을 나섰다.
* * *
마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왓슨은 아직 퇴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후에 출근했으니 못해도 열두시를 넘은 즈음에야 동료와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귀한 걸 받아버렸군.”
나는 다시 한번 장관에게 받아온 비단 보따리 두 개를 책상 위에 두고 풀어 보았다.
천년소양타의 털Ancient Vicuna Wool로 만든 원단.
그리고 독각화망의 뿔.
이 원단으로 옷을 지어 입기만 해도 도창불입Bladeproof과 수화불침Water&Fire Resistant을 이룬 것과 동일한 공능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에 더해 단 한 마리의 영물에서 깎은 털로만 직조한 원단이기에 진기를 흘려보내도 아무런 공손실Kung-Fu Loss이 발생하지 않는다.
“……덕분에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 늘어나겠군.”
십팔반병기Eighteen Arms라는 틀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스승이 창시한 종합무공인 바리츠엔 다른 문파에선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할 특이한 초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이하다는 건 나권식Bare Knuckle이나 쾌검Rapid Sword 등 비교적 상식적인 범주에 속한 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바리츠 고유의 무기술, 그러니까.
우산으로 적을 제압하는 산타Rain Dance.
자전거를 무기 삼는 은륜무Silver Waltz.
의자로 싸우는 좌석박격Chair Shot.
겉옷으로 펼치는 외투희법Coat Trick 등에 관한 이야기다.
“외투희법外套戱法은 시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를 얻게 되다니.”
외투희법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옷을 무기로 삼는 상승무공으로 일장Four Yards 안의 상대와 싸울 때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공방일체의 무기술이다.
대성하면 적에게 반격을 허락하는 일 없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봉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어 가히 범인을 추포하는 데 마이센맞춤Meissen Bespoke Ceramic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편리한 무공을 내가 여태껏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동안은 무공범죄자와의 생사결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옷이 없었지…….”
나는 어디서 구해온 건진 몰라도 멋들어진 천잠보의Heavenly Silk Suit를 입고 있던 스승을 떠올렸다.
그의 외투는 검강을 일으켜도 쉽게 잘라낼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당장 내가 초절정의 고수와 붙는다 해도 천잠보의를 사용해 외투희법을 펼친다면 상대를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망할 늙은이 같으니라고. 격체전력으로 내공을 불어넣을 여유가 있으면 옷도 두고 떠날 것이지.”
……라고, 스승을 원망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마침내 내게도 기연이 찾아와 억만페니를 쌓아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원단을 얻게 되었다.
장관 앞에선 도저히 노골적으로 기쁜 티를 낼 수 없어서 참고 있었지만 하숙집에 돌아온 이상 거리낄 건 없다.
부드러운 원단에 볼을 부비자 나도 모르게 절로 얕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아…….”
아무리 도리가 협객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는 말이 있다 해도 품위 있는 의복을 갖추는 건 런던무림을 살아가는 신사의 필수덕목Cardinal Virtues.
여왕 폐하 역시 부유한 무림세가나 대형문파의 후기지수Super Junior 이상의 경지를 이룬 내가 성취에 걸맞은 복식을 갖추길 원하시는 게 틀림없다.
나는 원단을 책상에 두고 버킹엄 궁전을 향해 절을 올렸다.
구배지례Nine Styles Of Bow 중에서도 가장 정중히 예를 갖추는 큰절Grand Kowtow이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내일 새빌 로의 장인을 찾아가 치수를 재고 옷을 주문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들뜬 모습을 왓슨에게 보이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울 듯해 진정 작용이 있는 천산설련실天山雪蓮實의 과즙을 희석해 혈관에 주사했다.
7% 농도의 영약액이 흡수되자 서늘한 음기가 혈도를 질주하며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무도회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군.”
흥분이 가라앉아 착수해야 하는 일들에 관한 정보가 다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직 초대장이 도착하진 않았지만 버킹엄 어전 무도회까지 남은 시간은 30일하고도 조금.
용봉지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직접 누군가와 비무를 치르는 일은 없겠지만 그 대신 폐하와 논검체스를 두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둔 게 3년 전이었나, 논검체스.”
폐하의 실력을 견식한 적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강호의 고수들은 논검체스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논검체스의 실력이 무학의 성취와 비례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빅토리아 폐하께서 만족하실 만한 대국을 진행하기 위해선 상당한 준비가 필요할 터.
“미리 감을 되찾을 필요가 있겠어.”
앞으로 한 달 동안, 하오문에 접촉할 방법을 찾는 틈틈이 전성기의 논검체스 실력을 되찾아야만 한다.
마침 지금은 왓슨이 퇴근하기까지 전까지 시간이 넉넉히 남아있는 데에다 따로 급히 할 일이 없다.
나는 책장 구석에 꽂아두었던 기보집을 꺼내 복습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공세가 아닌가. 여왕출수Queen’s Gambit부터 시작해 물 흐르듯이 중앙을 공략한 다음 빠른 체크메이트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바퀴가 마찰하며 발하는 소음도.
“왓슨은 아니군.”
그녀는 얼마 전부터 버킹엄 어전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빌려야 한다는 이유로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었다.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출퇴근 하는 것도 그런 절약의 일환이었다. 물론 이 역시 다리의 상태가 예전보다 좋아져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유령권마 사건의 포상으로 상당한 금전을 지급받은 데에다 병원에서 받는 봉급이 있으니 하루 호사스러운 드레스를 빌리는 정도야 어렵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자주 들르는 도박장에 빚이라도 진 모양이다.
“음?”
그런데, 마차가 발하던 소리가 정확하게 하숙집 앞에서 멎었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었던 모양이다.
이 시간에 마차를 타고 찾아왔다는 건 의뢰인일 텐데.
“저건…….”
슬며시 창밖을 내다보자 작은 순백의 이륜마차Buggy가 문앞에 멈춰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차 지붕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문장紋章은 런던, 아니 잉글랜드에 사는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야단났군.”
나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직 퇴근하지 않고 남아있던 메이드가 현관문을 열기 전에 어떻게든 1층에 도착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과 자세로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 괜찮으세요?”
문을 열려던 메이드가 걱정된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계속 백고에게서 얻어낸 해독제를 넣고 있는데 질리지도 않고 매끼마다 독을 타는 주제에 뻔뻔하긴.
“뭘 하고 있나. 손님이 오셨는데 어서 열지 않고.”
“아, 넷.”
멍한 표정의 메이드가 문을 열자마자 거센 찬바람이 집안에 몰아쳤다.
메이드를 따라 나온 허드슨 부인이 들이닥친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던 그때, 고고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방문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각
안으로 들어온 건 단정하게 머리를 틀어올리고 고귀한 인상을 풍기는 여인이었다.
귀족. 그것도 상당한 지위를 지닌 가문의 영애.
그녀의 직책은 타고 온 일인승 마차에 새겨진 인장만 보아도 명확했다.
“백금성Buckingham의 전령Messenger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언 일로…….”
“……누추?”
허드슨 부인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방문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들고 있던 두루마리Scroll를 꺼내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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