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니 (1)
Touchable, Untakable (1)
강호인은 자신의 애병과 명예만 빼앗기지 않으면 의외로 불만 없이 잘만 살아간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 * *
허드슨 부인은 구음절맥을 앓으면서도 쌍둥이 오빠를 찾기 위해 대도시로 나온 왓슨의 처지에 깊이 공감해주었고 상당한 액수의 신고자 포상금을 포기하면서까지 왓슨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맹세했다.
“걱정 마세요.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밖으로 절대 새어나가지 않을 테니까.”
허드슨 부인의 약조를 들은 다음에야 나와 왓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궁녀가 돌아간 직후 메이드가 바로 퇴근해서 다행이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면 경찰에 끌려갈 예정이긴 하나 녀석이 이걸 엿들었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했겠지.
“홈즈 씨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절맥증의 치료까지 가능한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두 분이 함께 지내게 된 것도 분명 무언가의 연이겠죠. 그럼, 궁금증도 해소되었겠다, 저는 자러 가볼게요.”
다 먹은 그릇은 계단 앞에 두시면 돼요.
허드슨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금을 펴서 만든 성지 두루마리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까 왓슨보다 먼저 올라와 천년소양타모 원단과 독각화망의 뿔을 치워놔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대화가 더욱 길어질 뻔했다.
“……내가 허드슨 부인에게 죄송한 짓을 하고 말았군, 홈즈.”
한편 왓슨은 허드슨 부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책하지 말게. 자네가 성별을 감춘 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이 나라에서 여인이 의사가 되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내가 말하자 왓슨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의 의사로서 많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성별로 인해 누군가가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본다면 그건 조금 슬플 것 같군. 물론 나는 매우 뛰어난 의사가 아니긴 하네만.”
“겸손은 미덕이 아닐세, 왓슨.”
아직 그녀가 본격적으로 의술을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긴 하나 평소 해부학과 무학에 관해 교류해본 나로선 왓슨보다 실력이 좋은 의사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었다.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네는 이미 훌륭한 무인이자 의사일세.”
“초대장은 자네 덕에 얻은 거나 진배없는 걸, 뭘.”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왓슨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드슨 부인에게 성별이 들통나 우울한 기색을 보이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민거리가 해결되자마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두 개의 편지 봉투를 집어 들고 있었다.
“어떤가, 홈즈. 셋을 센 다음 같이 열어보지 않겠나.”
“그 전에 자네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는데, 기억하고 있나?”
“앗.”
왓슨은 그제야 자신이 어째서 병원에서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바로 걸어왔는지 떠올린 듯 초대장을 테이블에 두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이, 잊고 있던 건 아닐세. 정말이야. 자네가 간밤에 겪은 일을 들려주겠다길래 이렇게 서둘러 집에 돌아왔지 않은가.”
“하하. 어련하실까.”
나는 지난 새벽 그녀가 잠든 사이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자세히 들려주었다.
사건의 배후를 캐내기 위해 변장한 다음 구속당한 유령권마를 찾아가 심문하는 과정에서 암살 시도로부터 그의 목숨을 구하고, 다리 위에서 살인멸구를 시도한 범인의 흔적을 찾아 정체를 특정한 등.
다만, 제임스 모리어티와 세바스천 모런에 관한 정보는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만에 하나 놈들의 성명을 왓슨이 알게 된다면 우연히 그 이름을 마주했을 때 무심코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령권마를 죽이려 한 모런 대령이 저격검수라는 사실을 덮어둔 것 역시 그녀의 나쁜 기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창문도 없는 방에 감금된 유령권마의 목을 노릴 정도의 무인이라니, 실로 엄청난 기감과 무위를 지닌 자로군.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주친 저격검수들이 그랬었지.”
실제로 내가 세바스천 모런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왓슨은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얘길 먼저 해주었다면 점심때 자네에게 성을 낼 일이 없었을 걸세.”
“그러게 말이야.”
“으음. 어째 제대로 사과하는 적이 없군, 자네는.”
“내가?”
“됐네. 내가 앓다 죽어야지.”
왓슨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말을 이었다.
“연주가 훌륭해서 망정이지, 뜬금없이 바이올린을 탄주彈奏하길래 드디어 이자가 미쳐버리고 만 건가 싶었는데 간밤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겠네.”
“심란心亂한 마음인가. 뭐, 비슷하지.”
심마心魔든 심란心亂이든 그게 그거다.
괜히 이 화제를 끌어봤자 왓슨이 우울해지기만 할 것 같아 빠르게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로 했다.
“실은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저기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 있지 않나. 궁녀의 말을 듣기론 자네와 내가 받은 게 종류가 다른 것 같아서.”
“정말인가? 흐음…….”
왓슨이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 봉투 두 개를 번갈아 보기 시작한 그때.
“도둑이야!!!”
아래층에서 비명이 울리나 싶더니 허드슨 부인이 경공을 펼치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허드슨 부인.”
숨을 헐떡이던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성지!! 성지가 사라졌어요!!”
“뭐라고요?!”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왓슨이었다.
“큰일입니다, 성지를 도둑맞다니. 이건 홈즈의 능지형Dismembering 안건이 아닌지…….”
지금 농담할 때인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영제국의 지엄한 법도를 따르면 관리소홀로 성지를 분실하는 건 삼족주멸Family Funeral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중죄가 맞다.
타인이 훔쳐갔으니 정상참작이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엄벌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그건 내가 성지를 되찾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
슬슬 메이드의 배후를 추궁할 생각이었으니 그녀를 붙잡는 겸 성지도 찾아오면 되는 일이다.
대비책은 진즉에 마련해두었으니까.
“일단은 1층으로 가봅시다. 사당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확인해야 하니.”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자 왓슨과 허드슨 부인이 내 뒤를 따랐다.
“자네는 어떻게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가, 홈즈.”
“그야 평소부터 이런 상황을 충분히 대비해두었으니까. 안타깝게도 첫 번째 대비책은 우리의 날쌘 양상군자에게 돌파당한 모양이지만.”
1층, 허드슨 부인의 방.
문 앞에 멈춰선 나는 부인을 향해 돌아서서 양해를 구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허드슨 부인.”
“예. 부탁드릴게요.”
허드슨 부인이 고개를 끄덕인 걸 확인한 다음에야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허.”
절도 현장은 깔끔했다.
실내에 보이는 흔적은 전무.
침대 옆에 마련된 자그마한 사당의 제단은 금고처럼 쉽게 열 수 없도록 제작되었다.
자물쇠와 경첩 모두 소량의 백련정강을 사용해 만들어 쉽게 내용물을 가져갈 수 없도록 만든 주문제작품.
범인은 굳이 정공법으로 사당을 열려고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외벽을 확인하자 예상대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군. 따라잡을 수 있겠어.”
뒤따라온 허드슨 부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했다.
“사당에 성지를 모셔둔 다음 자물쇠를 잠갔어요. 목이 말라 잠시 물을 마시러 부엌에 다녀왔는데 제단 안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요?”
“창문을 열고 확인했을 땐 이미 범인이 도망치고 있었겠군요.”
허드슨 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열쇠 좀 빌리겠습니다.”
부인이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가정용 사당의 자물쇠를 열었다.
사당 안에는 아기 예수와 천수성모, 그리고 세 명의 동방박사를 본뜬 도자기 인형이 향과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놈은 값이 나가는 도자기 인형은 그대로 두고 성지만 갖고 달아났습니다. 성지를 받은 걸 확인하고 메이드가 움직인 거겠죠. 발자국의 크기가 다른 걸 보니 직접 절도를 실행에 옮긴 공범이 있던 모양입니다.”
집에 들어와 제단 자물쇠를 따려 했다간 내가 눈치챌 게 뻔하니 외부에서 검기를 발하는 일 없이 예리한 날붙이로 벽을 도려낸 것이다.
그 다음은 간단하다. 슬쩍 손만 집어넣은 다음 성지聖旨를 훔쳐 달아났겠지.
“제까짓 게 도망쳐봤자 그리스도의 못자국 난 손바닥 안이지.”
-주장회회 소이불루主掌恢恢 疎而不漏
-Jesus Put All In His Pierced Hands, So It’s Blocked
예수의 손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엉성해 보이지만 악인은 갈릴리 어부의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결코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다행히도 나는 메이드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독을 반입한 걸 확인한 날부터 돌발사태에 대처할 방법을 마련해두었다. 추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그걸 대체 어떻게……?”
“이렇게.”
나는 현관문으로 걸어가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음색이 거리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달빛이 내리쬐는 베이커가의 건물 지붕 위로 수십 명의 꾀죄죄한 꼬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건너편 인도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킨 금발의 소년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베이커가 의화단焙烤街義和團, 홈즈 나으리의 지시를 완벽하게 수행 중임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모자를 벗은 위긴스가 정겨운 동런던 사투리Cockney로 인사했다.
* * *
“이쪽이라고 했나.”
“네, 나으리.”
잠시 후, 나는 개방 꼬마들의 안내를 받아 메이페어 방향으로 베이커가를 남하하는 중이었다.
“메이드의 기둥서방으로 보이는 놈은 포트먼 스퀘어 앞에서 우회전, 그대로 하이드 파크 쪽으로 갔습죠. 그 다음은…….”
도둑은 런던 시민들의 쉼터인 하이드 파크와 켄싱턴 가든 사이를 통과. 그대로 로열 앨버트 홀 방면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대체 언제부터 메이드에게 미행을 붙였던 건가.”
한편 왓슨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힘겹게 나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메이드의 정체가 범죄자인 걸 파악한 과정이 궁금해 미칠 지경인 듯했다.
“일하기 시작한 다음 날엔 이미 꼬마들을 붙여놓았다네.”
“무슨 수로 그녀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거지? 아니. 그보다 어째서 그동안 메이드를 가만히 놔둔 건가.”
“설명은 나중에 하겠네. 일단은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어.”
나는 위긴스와 꼬마들에게 동전을 던져준 다음 왓슨의 어깨를 두드렸다.
“먼저 놈을 잡으러 가봐야겠네. 일이 끝나면 해러즈 백화점 맞은편의 펍에서 보세.”
#